65화 - 탈출 동료 (2)
“그동안 쭉 고민해 봤는데 말이죠, 아무래도 그 괴물들은 ‘섀도우 쉬프터’ 라는 마물이 아닐까 싶어요.”
“마물? 마물이라면 그 마계에 산다는 그거?”
“예. 마계라도 해도 사실 여러 개라고 하기 때문에 어디에서 왔다고 말할 수 없지만, 교단의 고문서에서 섀도우 쉬프터라는 마물에 대해 읽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꾸고 다른 생물체의 흉내를 내는 등, 지금 저 괴물들과 들어맞는 부분이 많네요.”
마물이라. 그래서 그렇게 생소했던 건가.
원래 이곳 그라이암 대륙에 존재하는 괴물들이란 대부분 놀이나 고블린, 코볼트, 리자드맨, 트롤, 오크, 오우거 등으로 구분되는 휴머노이드 몬스터들이다.
그 외에도 바다 속에 사는 몬스터들이나 극히 개체수가 적은 특이한 몬스터들도 있긴 하다지만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괴물’ 이란 주로 이 휴머노이드 몬스터들을 말한다. 그런데 마물이란 그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는 존재였다.
고대 마도시대 때의 기록으로 밝혀진 바이지만, 그라이암 대륙을 포함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차원계 외에도 다른 차원계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 흔히 지옥이라 묘사되는 ‘마계’ 라는 곳이 실존한다고 한다. 바로 그곳에 ‘마족’이라고 불리는 종족이 살고 있으며 그에 대해 철저히 하위의 종족이라 할 수 있는 ‘마물’ 들이 존재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즉 마물들은 다른 차원계의 몬스터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다만, 평균적으로 인간들이 휴머노이드 몬스터들보다 나약한 반면에 마물들은 마족들보다 철저히 약한 존재라는 차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마물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사실 이 정도 널리 알려져 있는 짧은 지식이 전부. 그건 루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중 던컨이 대표적으로 질문했다.
“근데 마물 같은게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기도 하나?”
“아하하, 물론 아니죠. 무엇보다도 다른 차원의 존재니까. 보통 마물은 고위 마족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거나 할 때 그 힘의 영향을 받아 일부가 따라오거나 하게 된다고.. 어?”
태평하게 설명을 하던 루치나 그걸 듣고 있던 우리나 가릴 것 없이 모두 동시에 당황해버렸다. 무슨 소리야 그건?
“마족이라도 넘어왔단 소리야?”
“서, 설마요. 만일 그랬다면 벌써 난리가 나도 한참 났을 텐데.. 그건 아닐 거예요.”
마족이란 존재는 모르긴 해도 엄청나게 강력한 존재다. 사실상 세계에 직접적인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는 ‘신’ 이라는 존재에 가장 가까운 존재로 묘사되며, 흔히 고위 마족이라 불리는 존재가 하나만 나타나도 그 세상의 존속을 염려해야 하는 존재로 묘사되기도 한다.
어떻게 아느냐고? 황금왕 하이델이 종식시킨 그 긴 암흑기 역시 세상을 지배한 휴머노이드 몬스터들 뒤에 ‘메피스토’ 라는 고위 마족이 있었다.
하이델이 최후에 그 마족을 쓰러뜨림으로써 암흑기가 종식된 것이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에.. 분명 그건 아닐 겁니다. 마족 등이 넘어오거나 하는 일은 교황청에서 신탁을 통해 미리 감지할 수 있으니까. 마족이 그리 쉽게 다른 차원을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분명 뭔가 매개가 이루어져야 하는만큼 신탁만 있으면 저지할 수 있어요. 교황청의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죠.”
루치는 잠시 동안 곰곰이 생각을 해보더니 곧 전혀 걱정할 것 없다는 듯이 히죽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교황청이 그런 일을 하고 있었단 말이야? 처음 듣는데.. 그건 그래도 잘하고 있는 짓이군.
“..신탁이란게 정말 이루어지긴 해?”
그래도 난 영 교황청이란 곳이 못미덥거든. 그런 내 의심스런 물음에 루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그럼요. 자주는 아니지만 분명히 신탁은 이루어지고 있어요. 내용이야 저 같은 말단 신관이 알 순 없지만.”
너무나 확신감이 찬 목소리라서 난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이 루치라는 자는, 정작 교황청의 규칙은 따르지 않으면서도 꽤나 독실하게 교황청을 믿고 있는 모양이다.
“음, 고대에 봉인되거나 한 마물이 뭔가에 영향을 받아서 우연히 깨어난 걸 수도 있고.. 가능성은 적어도 그 방법은 여럿 있어요. 예를 들면..”
“아, 됐어. 그렇다면 이야기를 복잡한 방향으로 이어가지 말자고. 당장 우리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자. 그래서 섀도우 쉬프터인지 뭔지 하는 마물의 약점이나 그런 건 없어? 가급적 무슨 주문을 외우면 싹 사라진다거나 그런 거라면 좋겠는데.”
던컨이 루치의 길어질 듯한 설명을 저지하며 반농담조로 물었다.
음, 확실히 지금 마족이니 마물이니 우리가 쓸데없는 토론을 벌일 때가 아니지. 나도 기대감이 찬 눈으로 루치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맥없이 대답했다.
“글쎄요, 원래 섀도우 쉬프터는 최하급의 마물이라서 보통의 방법으로도 대응이 가능하다고 밖에는.. 죄송합니다.”
휴우. 결국 답이 없군. 보통의 방법으로 대응이 가능하면 뭐 하냐, 우린 고작 다섯이고 그것도 둘은 비전투원인데.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다고 이렇게 갇힌 상태에서 마물 백 마리를 상대할까. 게다가 역시 더 큰 문제가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종전보다 숫자가 늘어났다는게 좋지 않아. 지금도 수가 더 늘어나고 있을지도 모르지.”
처음에 날 구박한 이후로 조용하던 아이린이 마침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똑같은 말을 꺼냈다.
그렇다. 그게 더 큰 문제다. 뭐가 어찌되든 결국 우리는 탈출을 시도해야만 한다. 이대로 앉아서 죽을 순 없으니까. 그런데 그때 놈들이 숫자가 더 불어나 있다면?
으으.. 생각하기도 싫군. 난 조금 전까지의 그 끔찍했던 전투가 떠올라 몸서리를 쳤다.
“..아마 그건 아닐 거예요.”
응? 모두 한마음으로 한숨을 쉬고 있던 우리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시선의 집중을 받자 말을 꺼낸 슈는 화들짝 놀라며 다시금 아이린의 뒤로 숨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슈?”
모두를 대표해 아이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음, 그녀는 다른 사람들한텐 굉장히 냉정하고 무뚝뚝하게 말하는데 유독 슈에게만은 상냥하다. 어린애라 그런가. 아니면 같은 여자라서 그런가. 가능하다면 나한테도 저렇게 말해줬으면 싶은데 말이야.
“아, 저어.. 아까 전에 올드 원(Old One)이라고 하셨잖아요.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요.”
“그래? 얘기해줄 수 있니?”
슈는 앙증맞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녀가 어릴 적에.. 아니, 잠깐만. 대체 어릴 적이면 언제란 소리지? 흠, 하여튼 어릴 적에 읽은 책 중에 올드 원이라는 존재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고 한다.
모든 생물체는 그 종(種)을 막론하고 끊임없이 생성되고 사라지는 생명 순환의 흐름이 있다.
그 흐름은 종에 따라 길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지만 모탈, 즉 필멸자라면 당연히 해당되는 일이며 이 흐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이모탈, 즉 불멸자들 뿐이다.
그런데 이런 흐름 속에서도 약간 독특한 존재들이 가끔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올드원’ 이라는 존재였다.
그들은 그 정상적인 흐름에서 벗어나 원래의 수명보다 월등히 긴 시간을 살게 되는데, 그 와중에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그 결과 이들은 같은 종족원들 보다 월등히 강한 힘과 지혜를 가지게 되며 심지어는 그 종족의 첫 번째 존재, 즉 창조자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질병처럼 자신을 퍼뜨려 동족을 창조해낼 수 있는 진조(眞祖) 뱀파이어나 원(元) 라이칸스로프의 정체이기도 했다.
“오, 그렇군요. 저도 책을 꽤 많이 읽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처음 듣는 소리네요. 동인(東人)들 사이의 고전인가요?”
루치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슈. 음, 아직 어린데도 공부를 많이 한 모양이다. 굉장한데.
내가 기특하단 시선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다시 한 번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니까.. 그 섀도우 쉬프터의 올드원이 자신의 종족을 늘렸단 소리지? 라샤크가 그걸 죽였으니 더 이상 늘어날 일이 없고?”
던컨의 질문에도 슈는 차분히 끄덕였다. 그런데 이번엔 살짝 고개를 들어 나를 흘긋 바라보고는 덧붙인다.
“저어, 그런데 제가 알기로.. 올드원은 절대 보통의 방법으로 죽이거나 할 수 없어요. 사실.. 보통 사람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고..”
“......”
어쩐지 그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었지. 또 이 창인가.
난 그 올드원이라는 괴물이 마지막으로 경악하며 비명을 지르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단순히 마법을 무력화시키는게 전부가 아니었던 건가? ..사부는 대체 무슨 물건을 가지고 있던 건지.
“자자, 어쨌든 좋은게 좋은 거잖아. 라샤크가 실력이 좋은 탓이겠지. 아무튼 놈들의 정체도 알았고 더 이상 수가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냈어. 이제 어떻게 할까?”
던컨이 활기차게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그 덕분인지, 나름대로 좋은 소식이 있었던 덕분인지 확실히 처음 회의를 시작할 때보다 훨씬 분위기가 좋아진 것 같다. 표정들도 밝아졌고.
성격 괜찮은 친구로군. 나는 가볍게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탈출해야지. 하지만 일단 좀 쉬고. 특히 너희 둘은 지금 빨리 잠이라도 제대로 자두도록 해. 탈출할 때 제대로 싸우려면. 그 사이에 내가 동굴을 좀 둘러 볼 테니까.”
“..당신도 지쳤을 텐데.”
음.. 걱정해주는 건가? 난 아이린의 무뚝뚝한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날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같았는데 말이야. 하긴, 그녀는 내가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보았으니..
“나야 뭐, 적당히 둘러보다가 쉬면되니까.”
내 태연자약한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없이 휴식할 준비를 시작했다. 상황이 상황인만큼 모두가 효율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
자, 나는 일단 이 틈에 구체적인 상황을 좀 파악해 봐야겠군. 파악할 일은 많지. 식량 상태라거나, 저 이상한 방법으로 막혀있는 입구라거나, 혹시 동굴이 다른 쪽으로 탈출할 길은 없는지 라거나 등등.
역시나 심각하게 지친 상태이긴 상태였는지 거의 눕자마자 기절하듯 잠에 빠져든 두 사람을 내버려둔 채 나는 먼저 동굴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사실 쭉 궁금했었거든. 대체 무슨 수로 저 괴물들을 막아내고 있는 건지. 이러다 갑자기 뚫리는 건 아닌지 염려스럽기도 하고.
“두 사람도 같이 가게요?”
난 성큼성큼 걷다가 문득 루치와 슈가 내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는 것을 느끼고는 돌아섰다. 슈는 슬그머니 루치의 뒤에 숨었고, 루치는 밝게 헤죽 웃으며 대답했다.
“예, 어차피 할 일도 없는 입장이라.. 괜찮겠죠? 그리고 슈는 그곳에 할 일도 있거든요.”
할 일? 뭐,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솔직히.. 이 루치라는 남자는 조금, 아니 상당히 꺼려지는 바가 있다. 아주 순박하고 선한 사람인게 분명하고 좀 특이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바로 그 교황청의 신관이지 않은가. 게다가 아무리 봐도 낯이 익단 말이야.
정체는 알려지지 않았다지만, 어쨌든 나는 무려 이단심판회의 부회주를 죽인 죄로 교황청에 쫓기고 있는 입장이다.
혹여나 훗날에라도 이 자가 그게 나란걸 눈치 채고 교황청에 보고한다면.. 쳇, 외모 같은 건 어쩔 수 없다지만 일단 언사를 조심해야겠군. 그러고 보면 잠시 동안 같이 있으면서 교황청에 대해 내가 너무 반응을 보였어.
“..저어, 유우라는 괜찮은가요?”
“아, 그 아이는 지금 잘 지내고 있어. 처음엔 상태가 좀 안 좋았었지만 이제 괜찮아. 너무 활발해서 탈이지.”
그 점이 내내 궁금했었는지 슈가 내 뒤를 따라 걸으며 조심스레 물어왔다. 정말 착한애로군. 난 슈를 향해 최대한 부드럽게 대답해주었다.
“다행이네요. 사실 헤어질 때.. 그다지 좋게 헤어진게 아니라서 걱정했었어요..”
“응? 어떻게 헤어졌는데?”
내 반문에는 여전히 나를 어려워하고 있는 슈를 대신해 루치가 기운차게 대답해주었다.
“아아, 라샤크씨. 그건 제가 말씀드릴게요. 사실 우리가 여행 중에 그 요정 소녀가 기절해 있는 걸 발견해서 보살피긴 했지만, 워낙 겁에 질리고 정신이 없는 상태였거든요. 정작 구해준 저희들까지 너무 경계하고 무서워해서 제대로 말도 못 붙일 정도였어요.”
아아.. 그렇겠지. 처음 유우라를 만났을 때의 상태를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다.
“정말 슈가 있어서 다행이었죠. 슈가 노력해준 덕분에 그나마 유우라씨가 슈에게만은 말을 했거든요. 뭐.. 말이라고 해도 알아듣기 힘든 단편적인 것뿐이었지만. 어쨌든 그래서 저희는 며칠 동안 대책 없이 이동했고, 마침 보급도 떨어지고 해서 베질이라는 도시에 들렸는데 거기서 그녀를 잃어버렸어요.”
“..죄송해요. 제가 제대로 챙기지 못해서..”
“아, 슈의 잘못이 아니었어요. 저희가 너무 신경을 못 쓴 거죠. 인간이라면 벌벌 떠는 소녀를 데리고 도시로 들어갔으니.. 모두 흩어져서 여행준비를 하는 사이에, 숙소에서 슈와 함께 쉬고 있던 유우라씨가 슈가 잠시 잠든 틈을 타서 사라져버렸죠. 저희는 도시를 이 잡듯이 수색했지만 도저히 찾지 못했고, 그곳에서 몇 일간 머물며 근처까지 탐문도 해보았지만 결국 찾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슈가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무사하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그렇게 된 거였군. 마지막까지 신경써주진 못한 모양이지만 거기까지 만이라도 챙겨준게 어디냐. 덕분에 유우라가 나와 만났던 장소까지 도망칠 수 있었던 건데.
그리고 대체 어디의 어느 여행자들이나 모험가들이 엉망이 된 채 쓰러져있는 요정을 ‘선의’ 로 보살펴 주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들이 대단한거다. 또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들을 구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고.
“유우라도 정말 고맙게 생각할거야.”
난 그렇게 말하고는 무심결에 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는 흠칫했지만 쑥스러운 듯 그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음음, 착한 아이야. 유우라는 이 아이를 기억할까? 정신치료 중에 기억을 일부분 지운 걸로 아는데..
그렇게 짧게 대화를 나눈 후 다시 걷기 시작한 우리는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얼마 전 내가 죽을 위기를 겪으며 간신히 도망쳐 들어왔던 입구 부분이다.
- 작가의말
이번주는 한 편더 연재를 합니다.
주3회 연재를 하고있지만 종종 추가적인 연재가 있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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