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 요정의 숲 (6)
“뭔 일 있는가?”
난 다음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하루얀의 집에 틀어박혀서 자기혐오에 빠져있었다. 아악! 그렇게 당하고 그냥 벙찌게 서있었다니! 완전 최악이야! 최소한 밀어넘어뜨리기(?) 정도는 했어야지.
아니, 애초에 그런 상황에서 난 대체 뭐를 한거냐! 여자한테 고민하던 걸로 칭얼거리기나 하고! 아아악! 쪽팔려! 혼자 몸으로 절규하고 있는 날 보며 하루얀이 황당함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으..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어쩐 일이시죠? 기뻐보이시는데.”
“아, 유우라의 치료가 끝났네. 좀 겁먹은 상태긴 하지만 완전히 회복됐다는군.”
아. 그렇군. 난 즉시 잘됐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가서 인사만 하고 떠나야겠어. 너무 오래있었더니 요정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서로 이상한 물만 드는 것 같아. 각오를 다진 나는 하루얀을 따라 마을의 치료소로 향했다.
정신치료 기간 중에는 절대 안정이 중요해서 치료사외엔 면회도 사절이었고 예전 구해줄땐 하도 몰골이 말이 아니어서 사실상 첫 만남이나 다름없다
난 들어서기 전에 옷가지를 정리하고는 막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런데 그때 안에서 쨍그랑 하고 뭔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들렸다.
하루얀과 한번 시선을 마주친 후 난 곧장 문을 박차고 안으로 달려 들어갔는데, 그곳에선 의외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분명 유우라일거라고 추정되는 소녀 요정이 치료사 요정을 향해 마구 물건을 집어던지며 비명을 지르고 있다. 치료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피하고 있었으나 더 큰 문제는 그 소녀 쪽이었다. 저건 히스테리도 뭣도 아닌 그저 극도의 공포에 질려 발악하는 것이었으니까.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모르겠습니다. 장로님. 처음엔 말도 하고 괜찮았는데.. 어깨에 손을 짚었더니 갑자기.”
빠르게 상황을 확인한 하루얀이 진정시킬 의도로 주문을 외우려 하자 소녀는 더욱 큰 비명을 지르며 이번엔 하루얀에게로 물건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 정도 수준의 마법사가 고작 어린 소녀가 던지는 물건에 주문을 실패할리는 없었지만, 증손녀의 발작에 당황했는지 하루얀은 주문을 취소하고 몇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소녀는 물건을 던지는 것은 멈췄지만 마치 최후의 궁지에 몰린 쥐처럼 침대 구석에 바싹 붙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불 밖으로 배꼼 내밀어진 공포에 질린 눈동자는 쉴 새 없이 치료사와 하루얀을 번갈아 살피고 있다.
..어? 두 사람만? 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한걸음 다가섰다. 하루얀이 내게 주의를 주었지만 난 무시하고 천천히 침대 곁까지 다가섰다.
이상하게도 내가 다가서는 데는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고 오히려 날 간절히 바라보고 있던 소녀는 내가 바로 옆까지 가자 갑자기 내게 와락 달려들었다.
“와, 앗..!”
좀 놀라서 휘청거렸지만 난 품안에 무사히 소녀를 안아들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안절부절 하고 있으니 소녀가 그런 내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사, 살려주세요.. 저들이.. 날 죽일 거예요.”
“..어, 저기 그게. 괜찮아. 저 사람들은 안 그래.”
당황하면서도 내가 달래기 위해 그렇게 말하자 소녀는 날 더욱 꽉 붙잡으며 애원한다. 마치 어린애 다루는데 재주가 없는 내가 저들에게 자신을 넘기려고 하는 것을 눈치 챈 것처럼.
“제발.. 살려주세요. 버리지 마세요. 제발..”
“..알았어. 저 사람들이 절대 손 못 대도록 해줄게. 그러면 됐어?”
소녀는 벌벌 떨면서도 고개를 앙증맞게 끄덕였다. 난 소녀를 다시 조심스레 침대에 눕히고 두 사람에게 나가라는 신호를 했고, 간신히 그들이 밖으로 나가자 소녀는 그제야 안심했는지 색색거리는 작은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버렸다.
휴우.. 이건 또 무슨 일이야. 난 절대 소녀가 깨지 않도록 신중하게 밖으로 나왔고 그곳에선 심각한 표정의 하루얀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죠?”
“면목이 없네. 아무래도.. 어린아이가 너무 충격을 많이 받은 모양이야. 인간들에게 잡혀갔던 일만해도 견디기 힘들 텐데, 그것을 치료했더니 오히려 얼마 전에 요정들이 그 아이에게 칼을 들이밀었던 일에 대한 충격이 더 생생해진 것 같군. 아직 확신을 할 수 없지만 같은 종족인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네.”
요정이 요정을 두려워해서 인간한테 매달린다니.. 난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제 떠날 참이었는데 골치 아프게 됐다.
내 숙소는 본의 아니게 하루얀의 집에서 치료소, 그것도 그 유우라가 요양하고 있는 치료실로 옮겨졌다. 유우라의 맞은편에 작은 간이침대를 두고 거기서 생활하는 것이다.
언제든 깨어났을 때 유우라는 주변에 내가 없으면 다시 미친 듯이 울며 발작을 일으켰기 때문에 하루얀의 간절한 부탁으로 그렇게 하게 되었다.
하아~ 정말 미치겠네. 이젠 보모인가. 난 잠들어있는 유우라를 내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칠흑색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땋은 그녀는 어린 티는 났지만 분명 요정답게 아주 아름답다.
흑요석같이 빛나는 동그란 눈망울과 평소에도 살짝 들어가 있는 보조개가 특히 귀엽고 원래는 활기찬 성격이었다는 걸 증명하듯이 전체적으로 기운찬 인상인데ㅡ 안쓰럽게도 지금은 완전히 환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음.. 유우라 예쁘지?”
“어. 크면 굉장히 미인이 되겠는.. 이 아니라. 뭐하는 거야 에릴? 깨면 난리 날 텐데.”
난 창가에 서서 말을 걸어온 에릴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싱긋하고 웃더니 그 긴 은빛 머리카락의 일부를 앞으로 넘겨 쓰다듬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라샤크가 유우라한테 홀딱 반해서 이상한 짓을 할까봐 왔지.”
“어린애, 그것도 아픈 애한테 그럴 리가 없잖아.”
정색하고 대꾸하는 내게 에릴은 미안하단 듯이 미소 짓고는 유우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아직 어린데 그런 방식을 강제하라고 하다니 너무했어. 아, 라샤크. 질리안을 탓하지는 마. 그도 지금 매우 실의에 빠져 있으니까.”
에릴은 안쓰러운 눈초리로 유우라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는 내게 말했다.
뭐.. 나도 이제는 안다. 질리안 녀석이 좋아서 한일도 아니고 오히려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일을 그 고지식한 성격탓에 책임감 있게 떠맡고 나선 것일 뿐이다. 결과가 이렇게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탓할 수는 없다.
애초에 이런 요정을 잡아서 노예로 팔아넘긴 인간들이 죽일 놈들이지. 아, 여기에 있다 보니 인간인 나도 인간이 이렇게 짜증나는데 요정들은 오죽할까.
“탓 안 해. 질리안한테 네 잘못이 아니라 인간들 때문이라고 전해줘.”
에릴은 싱긋 웃고는 뒤로 돌아섰다.
“그렇다는데, 질리안?”
어? 그러자 저쪽 편에서 뭔가 큰 짐을 들고 있는 질리안이 굳은 표정으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녀석.. 얼마 전에 봤을 때보다 무지 핼쑥하잖아.
이해한다. 자기는 유우라를 위해 한 것인데 그것이 실수였던 것으로 밝혀진데다가 간신히 치료한 유우라가 이번엔 요정 족을 두려워 하니 죄책감이 들 수밖에 없을 테지. 난 혀를 좀 차고는 그를 불렀다.
“뭔 김빠진 표정을 짓고 있어. 와서 깨기 전에 얼굴이나 보고가. 몇 일전보다 많이 좋아졌으니까.”
내 평소 그대로의 말투에 그는 발끈하는가 싶더니만 이내 한숨을 좀 쉬고는 창가로 다가왔다. 그는 신중한 얼굴로 유우라를 살펴보고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걸. 하더라도.. 영성을 확인하고.. 아직 어리니까.. 모든 걸 설명하고 본인 의사를 들었어야 했는데.”
어렵사리 나오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 터져 있다. 틀림없이 이 녀석 혼자서 슬퍼하면서 울었으리라. 난 뒤통수를 벅벅 긁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야, 하루얀도 7백년에 처음 보는 경우라고 했어. 영성이 안 상한게 기적이라며. 그런 기적이 일어날 확률까지 네가 무슨 재주로 확인을 하겠냐? 그리고 설명했으면? 달라졌을까? 아니야, 설명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어. 질리안.”
질리안은 내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메고 온 짐을 내려놓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음.. 참 분위기 뻘쭘하네.
혼자 싱긋거리고 있는 에릴을 제외한 두 남자는 어색함 속에서 짧게 악수를 나눴다. 아아, 닭살. 하지만 그건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는지 질리안도 급히 꾸러미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네가 부탁한 무기다. 할아버님이 전해주라고 하셨어.”
앗!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난 깜짝 놀라서 큰소리를 내버릴뻔 하다가 유우라를 보곤 입을 다물고 창을 받아들었다.
와.. 멋진데? 창은 특이하게도 짙은 묵빛 창대를 중심으로 양끝으로 갈수록 색이 조금씩 밝아져서 창날과 꼬리부분은 은빛으로 빛나는 멋들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창날은 내가 요청한대로 단순히 앞이 길쭉한 마름모꼴인 형태였지만 그것에도 은은한 품격이 있었다.
게다가 창대의 손을 잡을만한 부분엔 아주 미세한 스크래치를 예술적으로 새겨놓아 창을 돌릴 때 편하고 힘이 더 잘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꼬리부분은 타격과 창의 중심을 잡는데 쓸 수 있도록 작은 원형 꼬리가 근사하게 붙어있다.
한마디로 대만족. 묵빛 덕분에 너무 화려해보이지 않으면서도 뭔가 다른 품격이 있다. 창 길이는 대략 210 메릴 정도. 창 치고는 좀 짧지만 내 신장으로 휴대하기도 적합할 뿐더러 무엇보다 난 창을 의전용이나 다른 목적이 아닌 모든 전투에 활용하는 목적으로 쓰는 만큼 너무 길면 곤란했다.
내가 홀린 듯 창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자니 질리안이 약간 망설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그.. 인챈트는 성공하지 못했다. 물론 할아버님이 실수하신 것이 아니다. 나도 지켜봤는데 이상하게도 아무리 마법부여를 하려해도 도저히 안 되더군.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 어, 뭐 상관없어. 이렇게 좋게 만들어 질 줄은 몰랐거든.”
마법부여가 안됐다는 말에 좀 아쉽기야 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별 상관없었다. 난 그만큼 이 창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묵직한 느낌도 그렇고ㅡ 문제의 창대도 정말 원하던 그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맘껏 휘둘러보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참아야겠지.
“금속이 생각보다 상당히 재련하기 좋더군. 실패도 적고. 물론, 할아버님의 솜씨겠지만 마치 무기 같은걸 만들기 위해 생긴 금속 같았다. 아, 그리고 남는 부분으로 다른 것도 좀 만드셨다.”
그는 또 다른 짐 보따리에서 몇 가지 물건들을 꺼냈다. 하나는 손목을 보호할 수 있는 간단한 형태의 브레이서였는데 팔에 끼워보니 정말 거의 불편하지도 않고 든든했다.
손아귀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손등 끝 부분부터 손목을 약간 지나서 까지를 보호해주는 소형 갑주가 달려있다.
그리고 나머진 모두 단도였는데 모두 세 자루나 되었다. 음.. 예리하고 휴대도 편해서 아주 쓸 만할 것 같다. 난 하나를 집어서 허리춤 가죽 주머니에 원래 있던 대거 대신 그걸 집어넣고 나머지 두 개는 에릴과 질리안에게 내밀었다.
“이건 너희가 하나씩 가져. 난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니까.”
두 사람이 망설이는 것 같았기에 난 한번만 더 낯 뜨거운 말을 하기로 했다.
“나 어차피 곧 떠나게 될 거라고. 이 아이 상태만 좋아지면. 너희한테 나 기억하라고 주는 선물이니까 제발 나 쪽팔리게 하지 말고 받아주라.”
그러자 에릴은 킥킥거리며 웃고는 받아들였고 질리안도 처음으로 자그맣게 미소를 띄우며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유우라가 일어나려는 듯이 몸을 뒤척이기 시작해서 에릴과 질리안은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서 도망쳤다.
난 그 우스꽝스러운 뒷모습을 보며 푸하핫 하고 웃어버렸고 막 잠에서 깬 유우라는 그런 날 어리둥절한 눈으로도 바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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