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 왕자같은 공주 (1)
다시 처음 유우라를 만났던 곳 근처, 즉 로세하이안 왕국의 서북부 지역에서 여행을 시작하게 된 나는 하루 동안 요정 마을에서의 추억으로 맘껏 궁상을 떨어버리고는 기운차게 새 출발을 했다.
사람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더니 당당히 캬르한 산맥을 벗어 난지 두 달이 지나고 나서야 다시 여행을 시작하게 되다니. 그것 참.
원래 목적지였던 서부의 대도시 피아이란은 대장간 때문에 목표를 삼은 곳이었기에 이미 푸른 날개 요정족 최고의 야장에게 도움을 받은 지금에 와선 별 의미는 없어졌지만 어쨌든 산골 촌놈인 나는 ‘대도시’ 라는데 목표를 두고 그대로 피아이란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거기에서 용병일 같은걸 하나 구해서 돈을 좀 벌고..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보부도 당차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몇 일간을 걷고 길손들 짐마차에도 얻어타고 하면서 이동하다보니 난 피아이란에서 하루 정도 거리인 작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야호, 간만에 노숙이 아닌 숙박이군. 난 신이 나서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여관을 찾았지만 역시 세상일은 만만치가 않다.
“방 없수. 지금 시즌엔 방 찾기 어려울걸?”
몇 군데 더 돌아다녀 봤지만 어딜 가나 이런 대답이 전부였다. 기껏 마을까지 들어왔는데 또 나가서 노숙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 그보다 아무리 대도시 근처라지만 여관이 이렇게 많은데도 방이 없다니. 척 봐도 피아이란이라는 대도시 근처의 가도에 인접한 마을이란 이점 덕분에 숙박업을 위주로 하는 마을인 것 같은데 말이야. 난 일단 길가는 아저씨 한명을 잡아서 물었다.
“저기요, 어르신. 여긴 왜 이렇게 여행객이 많죠?”
“어디서 왔기에 그것도 모르나? 이제 나흘 후면 피아이란에서 대축제가 열린다네. 왕자와 공주 전하까지도 참석하는 로세하이안의 명물 축젠데, 모르는가?”
오히려 물어본 내가 이상한 놈 됐다. 쩝, 난 산중에서 십년을 살았는데 알 리가 없지. 아무튼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운이 좋군. 이런 걸 빠질 순 없지. 난 힘을 내서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 정확히 다섯 번째 숙소에 도착했을 때 내 귀에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방이 없다는데도 그러십니다.”
“방이 없으면 비워라! 나와 저분에게 노숙이라도 하라는 거냐?”
보아하니 누군가 여관 주인에게 방을 내 놓으라 행패라도 부리는 모양이다. 언성을 높이고 있는 사람을 보니 삼, 사십대 쯤 되어 보이는 건장한 체구의 사내였는데, 그가 열을 올리며 가리키는 방향에는 훤칠한 말에 올라탄 채로 여행자나 모험가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고급품이 분명한 중갑주를 입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금방 전쟁터에서 달려오기라도 한 듯이 멋들어진 모양의 투구까지 쓰고 있어 누군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귀족인가? 아니면 기사?
어느 쪽이던 저렇게 생떼를 부리니 여관주인도 곤란한 모양이다. 둘 다 지체가 높은 사람으로 보이니 함부로 굴 수도 없을 테지. 그때 그것을 조용히 지켜보던 그 갑주를 입은 자가 천천히 말을 몰아 그 곁으로 다가서더니 화를 바락바락내는 사내를 말렸다.
“그만두게. 방이 없단 걸 어쩌겠는가.”
어라? 직접 물어볼 수고를 덜었다.. 라고 생각하며 그냥 지나치던 나는 그 갑주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는 목소리거나 해서가 아니라 아주 의외로, 나지막하게 깔긴 했지만 분명 여성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놀라운데? 저런 갑주는 방어력은 탁월하지만 어지간히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은 무게와 불편함 때문에 감히 입고 다닐 수 없는 물건이다.
저런 걸 여자 몸으로 저렇게 입고 다닌다면 귀족 영애는 절대 아닐 것이고, 아무래도 이곳 로세하이안의 여기사인게 틀림없다.
아, 여기사라.. 음. 근데 왜 모든 직업 앞에 ‘여’ 자만 붙으면 이렇게 흥미가 돋워지는 걸까? 여기사, 여종업원, 여의사, 여도적.. 내가 그런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그 화를 내던 사내는 어처구니 없어하는 얼굴로 물러서더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리되면 노숙을 해야 하는데 어찌..”
“내 한 몸 편하자고 몇 사람이나 억울하게 불편을 감수해야하는 것보단 노숙이 나을 것이네. 그리고 성의는 고맙네만 자네와 만나기 전에도 노숙 정도는 얼마든지 했으니 괜한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음.. 맞아. 기사라면 여자든 남자든 마땅히 저래야지! 암. 그 여기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미련 없는 태도로 마을 입구 쪽을 향해 말을 몰았고 그 사내도 급히 옆에 세워둔 말에 올라타더니 그 뒤를 따랐다.
역시 저 사내도 단순히 기사의 종자나 하인 정도로는 보이지 않는다. 말에 올라타는 폼만 봐도 기마술이 절대적으로 몸에 익어있고 복장은 비교적 단촐하지만 허리에 차고 있는 검만은 상당한 물건으로 보인다.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만.. 어깨를 으쓱하며 잠시 가져본 쓸데없는 관심을 접은 나는 숙박하는 걸 체념하곤 마을 입구 쪽으로 발걸음으로 옮겼다. 결국 또 노숙이군.
야외생활 경험이 없는 문외한은 간혹 노숙이라는 걸 가볍게 보기도 하지만, 사실 노숙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피곤한 일이다. 잘만한 자리를 잡는 것도 쉬운 일만은 아닌데 불도 피우고, 음식도 준비해야한다.
그런데 불을 피우는 것만 해도 장작을 모으고 한참 신경 써서 바람막이를 세워야하는 등 손이 제법 많이 가는데다가 음식문제에 들어가면 더 귀찮다. 재료가 없으면 사냥을 해야 하고 재료가 있어도 요리라는 매우매우 귀찮은 짓을 해야 한다.
요리를 하면? 여행을 하는 주제에 먹은 그릇이나 취사도구도 한번 쓰고 버릴 수 없으니 씻어야 한다. 그래서 난 대개 말린 고기로 때우거나 사냥감을 간단히 구워 먹는 정도로 끝내긴 하지만 어쨌든 그 걸로도 끝이 아니다.
인간들이 군집한데다가 외곽에 최소한의 울타리가 있는 마을이나 도시 안과는 달리 노숙을 한다는 건 완전한 야생상태에 몸을 맡기는 일이므로, 야생동물이나 각종 몬스터들에 의해 허무하게 황천길 가기 싫다면 불침번도 서야한다.
이 불침번이란 것도 일행이 많을 때나 돌아가면서 설만한 것이지 나처럼 혼자 다닌다면 밤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하는 중노동이다.
뭐.. 나야 대체로 나무 위 같은데 기어 올라가서도 잘 자고, 원채 산중 생활이 익숙해서 주변에 뭐가 다가오면 한참 자다가도 문제없이 일어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으니까. 사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여행을 혼자서 다니는 경우는 없다. 혼자 다니는 모험가나 여행자라면 뭔가 사연이 있는 자라고 봐도 될 만큼.
아무튼 그래서 이 모든 걸 다 잘 극복하고 노숙을 마치면 그걸로 끝이냐? 심지어 그것마저도 아니다. 야외에서 추위와 바람에 시달리며 불침번까지 서고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긴장까지 한 상태로 잠을 자면 숙박을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피로 회복이 더디고 몸도 상하기 십상.
게다가 혹시 운 없게 추적추적 비가 오거나 아주 재수 없게 폭우, 폭설 같은 악천후가 겹치기라도 한다면? 말 안 해도 뻔하지.
재수 없으면 객사다, 객사. 하여튼 정리하자면 노숙이라는 건 이래저래 익숙하지 못한 이들에겐 지독히 힘든 일이고 익숙한 이들에게조차 한없이 귀찮은 일이라는 거다.
“뭐 그냥 그렇다는 거지.”
난 조금 길게 투덜거려보고는 점점 살아나고 있는 불길 속으로 나뭇가지를 마저 집어넣었다. 평상시 밖에서 노숙을 하던 때와는 달리 주변이 상당히 소란스럽다.
나와 마찬가지로 축제 때문에 숙소를 잡지 못한 많은 인원이 노숙을 하러 마을 외곽 근처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이건 노숙이라기 보단 단체 야영이라도 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래서야 늦게 나온 사람은 자리 잡기도 힘들겠군. 다행히 난 마을 밖을 나오자마자 눈치껏 노숙하기 좋은 자리를 재빠르게 선점 했지만.
난 불길이 잘 타오르는 걸 확인하곤 나무에 편안히 기대었다. 그때 마침 나무 위에서 푸드덕하고 새가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렸다. 꽤 늦은 시각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도 용케 여기 내려앉는군? 둥지라도 있나? 난 쾌재를 부르고는 슬쩍 팔을 뻗어 짐 속에서 내 컴포짓 보우를 꺼내들었다.
전문적으로 만든게 아니라 내가 직접 캬르한 산맥에서 질 좋은 나무를 이용해 만든 것이므로 좀 어설프긴 하지만 산맥 근처 대장간 등에서 몇 차례 보강도 하고 또 조정한 무기다.
솔직히 전문가도 뭣도 아닌 내가 대충 만든 것이므로 대단한 물건은 아니지만, 워낙 오래 써서 내 손에 완전히 익은지라 나름대로 쓸 만은 하다.
난 능숙한 동작으로 활을 구부림과 동시에 재빠르게 활현을 걸고는 역시나 내가 어설프게 만든 화살을 시위에 걸고 나무 위를 겨냥했다.
피-슛. 강하게 쏠 필요도 없기에 약간만 현을 당기곤 뜸들이지 않고 바로 발사했다.
그러자 곧장 뭔가에 화살이 박히는 소리와 함께 나뭇가지들이 좀 떨어지더니 곧 생각보다 제법 큰 새 한마리가 화살에 꽂인 채로 땅에 떨어졌다. 음.. 이락조다. 충분히 먹을 수 있는 녀석인 걸 확인한 나는 기분 좋게 이미 숨이 끊어진 새를 집어 들었다.
“참 대단하오.”
짝짝짝짝. 응? 누군가의 감탄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아까 전에 봤던 여기사가 작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꽤 어두운데도 그 눈에 띄는 갑주가 달빛에 반사되어 은은하게 빛나는 걸 보니, 역시나 그냥 철로 만든 물건은 아닌 것 같다.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까웠으니 별거 아니었죠.”
상대가 기사라는 걸 알면서도 튀어나온 내 꺼릴 것 없는 말투에 여기사의 뒤에 서있던 사내의 표정이 일그러지는게 똑똑히 보였지만 난 신경 쓰지 않고 새를 구울 준비를 시작했다.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아 새의 목을 잘라낸 후에 가볍게 몸을 반으로 가르고 내장을 제거한다. 역시나 요정 야장이 만들어준 것 답게 굉장히 잘 든다. 이런데 쓰기 아까울 정도로.
“아니오. 어두워서 새의 모습도 잘 보이지 않을 텐데 그리 쉽게 맞추다니. 나도 궁술을 배워본 일은 있어서 그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님을 아오.”
“..뭐, 밤눈이 좀 밝아서.”
참 고색창연한 말투로군. 난 머쓱해서 대충 대답했다.
사실 산 속에서의 어둠이란 쉬이 생각하는 어둠과는 전혀 그 질이 다르다. 달빛조차 가려지는 곳에선 마치 먹물통에 빠져 있는 것 같다고 할까?
내 손도 제대로 안 보이는 그야말로 칠흑 그 자체다. 그 상태로 무기력하게 오래 방치되면 시각을 넘어서 오감 모두가 이상하게 뒤틀릴 정도로 위협적인 것이 산 속의 어둠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야간에 캬르한 산맥이 길을 안전하고 편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니 난 자연히 밤눈이 밝아질 수밖에 없었다.
아, 물론 한계가 있어서 좀 전엔 나무가 높고 무성해서 이 작은 불길만으로는 나도 새를 보지 못했다. 소리로 듣고 기척을 느껴서 어림짐작으로 쏜 거지.
“네 이놈! 이분이 누군 줄 알고 그리 불경하게 말을 하느냐!”
거의 반 반말조에 새를 분해하면서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대꾸하는 내 모습에, 사내가 언성을 높이며 더 이상 참을 수 없단 듯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어쩔 건데? 내가 불량스럽게 그를 흘겨보자, 그는 당장 내 멱살이라도 잡아 챌 기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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