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스승과 제자 (3)
뭔가가 자꾸 몸에 와 닿는다. 축축하고 차가운.. 앗! 나는 벌떡 몸을 일으키다가 현기증이 나서 다시 모로 드러누웠다.
어렵사리 시야를 회복하고 나자 주변상황이 좀 들어오기 시작한다. 난 쓰러진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있었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상태였다. 이미 꽤 오래전부터 비가 내렸는지 주변은 흠뻑 젖어있다.
으.. 세상에 이 꼴로 계속 산중에 누워있었단 말이야? 비까지 맞으면서? 운이 좋아도 얼어 죽거나 재수 없었으면 배고픈 짐승의 한 끼 식사가 될 수도 있었다. 정말 죽지않은게 다행이로군.
온몸에 체온이 심각할 정도로 떨어져 있단 것을 깨달은 난 급히 비척거리며 일어나 내가 생활하던 오두막으로 향했다. 허름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오랜 세월을 보낸 집이다.
난 비틀거리며 집안으로 들어가서 급히 모아둔 장작에 불을 붙였다. 불에 몸을 태우기라도 할 듯이 한참을 달라붙어있자 부들부들 떨리던 몸이 간신히 가라앉고 곧이어 극심한 피로가 몰려온다.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 보자, 쓰러지는 결에 사부가 작별인사를 하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나 간다.’ 라는 짧은 말.
“이런 미친 늙은이.”
아니, 헤어진단 건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 훈련이 끝나자 마자냐! 게다가 인사가 고작 ‘나 간다.’ 라니.
아악! 열 받네 정말. 게다가 상태가 엉망인걸 알면 집안으로 좀 옮겨 주던가. 이제 막 하산하려는 제자를 허무하게 객사시킬 일 있나? 으으.. 난 한참동안 열 받아서 혼자 방방 뛰었지만 곧 힘도 없고 허무해져서 그만뒀다.
그렇게 헛 힘까지 빼고 나니 배가 너무 고파서 일단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충 구석에 처박혀 있어서 그런지 의심스런 초록색 빛이 도는 육포를 거침없이 씹어 먹으면서 좀 더 면밀히 내 몸 상태를 체크한다
허 참. 정말 기가 막히다. 허기와 피로는 일단 그렇다 치고, 하도 목검으로 얻어터져서 온몸이 멍투성이에 무리하면서 움직인 탓에 관절과 근육이 상한 곳도 있다. 윽.. 이거 갈비뼈에 금도 간 것 같은데? 왼팔도 그렇고.
“정말 안 죽은게 기적이로군.”
아니 그보단 이 상태로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움직였다니 인체란 참 신기할 따름이다. 난 대충 몸을 씻고 나서 고약을 골고루 바르고 부러진 팔과 가슴엔 붕대를 단단히 감았다. 그다음엔 지극히 처량하게 다시 불을 피운 근처 바닥에 드러누웠다. 욱신거리는게 더럽게 아프긴 하지만 솔직히 아픔보단 피곤함이 더 극심하다.
온몸의 힘을 무리한 두 타룬 간의 활동으로 바닥까지 다 소진해버린 것이다. 내가 의사는 아니지만, 이게 하루 이틀 쉰다고 회복될 상태가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쉬자 일단 쉬어야 산다.. 난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으려다가 오두막 안에서 못 보던 무언가를 우연히 발견하고는 살짝 몸을 일으켰다.
자세히 보니 웬 천으로 싸여진 꾸러미 하나와 그 위에 놓은 종이.. 편지다! 역시! 아무리 사부라도 내게 작별 메시지 정도는 남긴 것이다. 난 망설임 없이 꾸러미보다 먼저 편지를 펼쳤다. 그리고 잠시 숨을 멈췄다.
“으아아아! 젠장,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난 열이 받아서 고함을 지른 다음에 편지를 사정없이 구겨서 불속으로 집어던졌다. 거기엔 ‘제자에게’ 로 시작되는 그럴듯한 편지나 슬픈 작별인사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저 ‘아 그놈의 작별선물 준다는 얘긴 왜 해서. 네 놈 주긴 아깝지만 일단 약속이니 먹고 떨어져라.’ 라고 딱 한줄 무성의하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정말 10년간 사제지간이었던 사이로서는 최고의 이별이리라.
..아, 성질내니까 더 피곤한거 같다. 난 벽을 짚으며 잠시 숨을 몰아쉬고는 이번엔 꾸러미로 시선을 돌렸다.
사부는 성격이야 완벽한 파탄자의 표본과도 같은 사람이지만 신기하리만큼 물욕 같은 것을 보인 적이 없다. 하긴 그 실력을 가지고도 이렇게 은둔하며 사는걸 보면 정상적인 욕심을 가진 인간은 아니겠지.
아무튼 그런 사부가 ‘네 놈 주긴 아깝다’ 는 표현을 쓴 물건이니 아마도 그 성격을 감안할 때 본래는 자신이 쓰려던 물건쯤은 된다는 의미다. 난 왠지 긴장이 되어 조심스레 꾸러미를 풀어냈다.
“엥?”
꾸러미 안에는 내 내 머리통보다도 큰 금속의 괴(塊)가 놓여 있었다. 이건 또 뭐야? 난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들어보려고 했다가 허리가 빠질 뻔했다. 엄청 무거운 걸로 봐서 적어도 그냥 철 덩어리는 아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암만 봐도 단순히 철이나 구리 같은 평범한 금속은 아니다.
설마? 난 혹시나 사부가 좋은 무기 하나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날 위해 어디서 이오니움 같은 최고급의 금속이라도 구해다준 건가 싶어서 쾌재를 불렀지만 주먹으로 툭툭 두들겨보고 빛감을 관찰해보는 등 아무리 살펴봐도 이야기로만 듣던 이오니움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볍고 튼튼한 금속으로 유명한 이오니움은 아무리 주괴 형태더라도 이렇게까지 무식하게 무거울 리가 없다.
“대체 뭐지 이건..?”
사부의 장난인가? 사실 그쪽이 가장 의심스러웠지만 난 일단 꾸러미를 다시 묶어놓았다. 일단은 피곤하니 한 몇 주간 요양을 하고나서 생각해야겠다.
“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난 어렸을 적에 읽은 소설의 대사를 변형해 읊조리며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쉬었다. 정말 만약 이게 사부의 장난이라면 매우 성공적인 장난이었다. 여행 떠나는데 엄청난 짐짝 하나를 짊어지게 해준 셈이니.
내가 열흘간 요양을 하고 드디어! 감격스럽게도! 캬르한 산맥을 떠나 세상에 첫발을 내딛게 된지 이제 사흘째.
물론 난 열 살 때까지 평범한 시골마을에서 천덕꾸러기로 자란데다가, 캬르한 산맥에서 사는 중에도 제법 마을이나 도시에 들른 적이 있으니 첫 발이라기엔 좀 그렇지만.. 그래도 나와 봤자 생필품이나 훈련도구 좀 사러, 혹은 은밀한 레드북.. 흠흠, 아니면 술집 같은 데나 좀 가보려 나온 정도고 사실 그것도 캬르한 산맥 근처를 크게 벗어난 적은 없으니 나름 벅차고 감동적인 일이었다. 나에게는.
그런데 문제는 이 망할 사부가 작별 선물이랍시고 준 금속덩어리. 정말 욕 나오게 무겁다. 내 자랑 같지만 나쯤 되는 건강한 장정이니 이렇게 등짐에 넣고 돌아다닐 수 있는 거지 어지간해선 운신하기도 힘들 정도다.
물론 훈련하는 셈치고 어느 정도 무게를 짊어지고 다니는 정도는 할 수 있다. 실제로 훈련하면서 그런 적도 제법 있고. 그러나.. 이제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마당에 내 짐이 어디 이것뿐인가?
일단 기본적으로 갈아입을 의복에 무게가 꽤 나가는 야영에 필수적인 물품들, 그리고 급할 때 쓸 약재들과 특히 내 전용 도구들ㅡ 정작 난 검과 창도 없지만 내가 직접 만든 컴포짓 보우와 화살, 험한 산을 탈 때 쓰는 하켄이나 와이어 같은 소비물품 등도 많고 휴머노이드 몬스터들을 상대할 때 쓰던 함정용 도구도 제법 된다.
거기에 이 무식하게 무거운 덩어리를 합치니 아무리 나라해도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는 것이다. 솔직히 이대로도 하루에 산악지형 60 메르장 정도는 너끈히 행군이 가능하지만 난 지금 어디까지나 훈련이 아니라 ‘여행’ 중이다.
“일단은 이걸 처분하는 걸 최우선으로 해야겠군.”
그래도 사부의 작별 선물인데다가 혹여나 쓸 만한 무기를 만들 재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차마 내버리진 못하겠다. 무기값이란게 워낙 보통이 아닌데다가 난 애초에 돈도 얼마 없으니까.
그래서 일단 첫 번째 목적지를 캬르한 산맥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나뉘어 있는 두 개의 국가, 헨델 왕국와 로세하이안 왕국 중 남쪽인 ‘로세하이안 왕국’ 의 서부 최대 도시인 ‘피아이란’ 으로 잡았다. 그 정도 규모의 도시라면 이런 금속을 다뤄줄만한 대장간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난 사부를 만나기전엔 헨델 왕국에서 살았지만 국적은 로세하이안 왕국이라고 알고 있다. 두 나라는 워낙에 험준한 캬르한 산맥으로 가로막혀있어 거의 왕래가 없는데 우리 부모님은 로세하이안에 살다가 어찌어찌 헨델 왕국 쪽으로 옮겨온 모양이었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고아로 자라난 헨델 왕국 쪽 깡촌 마을에서 마을사람들에게 그렇게 들었다. 뭐, 정확히 아는게 아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현재로썬 국적불명이긴 하지만.
어쨌든 내 조국이리라 짐작되는 로세하이안은 고대 마도시대의 멸망 후에 천 년간을 이어진 암흑기를 종식시킨 전설적인 영웅인 황금왕 ‘하이델 드 로제페 로세하인’ 이 출생한 지역이다.
그리고 그의 5백년 후의 직계 후손인 ‘피아이란 드 로제페 로세하인’ 이 하이델 사후 수도 없이 많은 중소집단들이 활개를 치던 대륙할거의 혼란기를 돌파하며 최초로 강력한 국가의 기틀을 갖춰 건국해낸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였다. 아무튼 이 나라는 나라이름도 그렇고 도시이름도 대부분 유명인들을 따서 짓는 모양이다.
“어쨌건 말 한 마리 있으면 좋겠는데.. 쩝.”
슬퍼지니 돈이 없구나. 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 말아야지. 산에서 지내는 동안 사부 몰래 꾸준히 사냥감에서 빼돌린 물건들을 틈틈이 근처 마을에 처분해서 모은 돈이 좀 있기 때문에 당장 여행이 곤란할 지경은 아니지만 난 순수한 산골청년, 즉 가난뱅이인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원하는 자유로운 세상 여행을 하려면 돈을 좀 벌긴 해야겠는데, 여행하는 처지에 돈을 벌 거리가 그리 쉽게 있을까? 난 한참 그런 궁리를 하면서 걷다가 일단의 무리가 맞은편에서 빠르게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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