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 구출의 로망 (2)
“공주님! 공주님! 여기 좀 봐주세요.”
“공주님ㅡ”
하지만 내 걱정과는 무관하게 개회식이 진행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신나하고 있었다. 도중에 개회사를 하기위해 단상 중앙에 공주가 올라서자 그야말로 열광적인 환호를 하기 시작한 군중들.
뭐냐, 이거? 완전 인기인이잖아? 특히 일부 여성들은 잔뜩 얼굴을 붉히며 손수건까지 흔들어가며 공주를 연호하고 있다.
아니, 왕자도 아니고 공주한테? 이거 뭔가 좀 문제있는 거 아니야? 아니, 그보다 보통 왕족이나 귀족을 평민들이 이렇게 좋아라 하기도 하나? 내가 황당해하고 있자 내 옆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랐어? 르미엘르 공주는 왕국 평민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있거든.”
“.. 도가 좀 심한 것 같은데요?”
난 말을 건 사람이 어제 술집에서 합석했던 그 여자라는 걸 알고 좀 의아했지만 일단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근데 이 시끄럽고 사람 많은데서 날 정확히 찾아내고 조용히 다가오다니 재주가 좋군.
“애초에 공주가 어려서부터 백성들을 위한 시책들을 하려고 노력해온 건 유명한데다가 실제로도 공주는 수도나 근처 도시들에서 백성들에게 개인적으로 호의를 많이 베푼 모양이야. 게다가 근래에는 기사수행 중의 흥미로운 모험담들로 사람들의 입에 수도 없이 오르내리고 있지. 산골 촌락을 괴롭히던 도적단 30여명의 진채로 필마단기로 쳐들어가서 모두 물리쳤다거나 북부대로에서 좀비들을 일으키며 소란을 부리던 악랄한 네크로맨서의 목을 쳤다는 등.”
“하아? 그래요?”
기사 서임을 앞두고 있단 얘기야 들었지만 공주이니 그러려니 했는데 실력이 그렇게 좋단 말이야?
하기야 백성들에게 인정을 베풀며 친절하고 또 동화에나 나올 것처럼 홀로 악을 처단하며 모험을 하는 잘생긴(?) 공주님이라니, 오히려 인기가 없는게 이상하겠군.
"무시하지 마. 어려서부터 로세하이안 최고의 맹장이라 불리는 칸젤 폰 아인도르프에게 직접 검을 배운데다가, 실제로 기사들 사이에서도 실력으로 인정받는 모양이니까.”
좀 놀랐을 뿐인 내 반응을 오해했는지 그렇게 덧붙여 설명한 여자는 잠시 단상을 바라보더니 곧 내 팔을 잡아끌며 속삭였다.
“그보다 잠깐 나 좀 볼래?”
난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고 해서 소란스런 인파를 해치고 나가는 여자의 뒤를 쫓았다. 별 힘도 들이지 않고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걷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러고 보니 같이 다니던 란돌이란 남자는 보이지 않는군.
앗! 설마 첫눈에 날 보고 반해서 이렇게 찾아왔다거나~ 에헷, 그럼 곤란한데.. 농담이다. 농담.
여자는 요리조리 길을 꼬아가며 한참을 시내를 걷더니 인적 없는 골목길에 도착하고서야 나를 향해 돌아섰다. 음.. 어제와 별 다를 바 없는 눈에 띄는 옷차림도 그렇고, 왠지 자꾸 상상력이 이상한 쪽으로 뻗치는 거 같아서 내가 먼저 약간 경계심을 담아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후훗, 급하게 굴지 마. 서로한테 득이 되는 얘기가 있어서 그러니까.”
여자는 가늘고 긴 눈초리로 날 부드럽게 흘겨보며 꽤나 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지, 이거? 지금 날 유혹이라도 해보겠다 이건가? 훗, 나 사나이 라샤크. 뭔일인지는 몰라도 미인계 따위에 흔들리진 않는다.
하지만 순간 그녀가 ‘좀 덥네~’ 라고 중얼거리며 그렇잖아도 시원스레 파인 웃옷을 펄럭이자, 난 내 시선이 나의 굳은 의지를 배반하고 어딘가로 고정되는 것을 느꼈다.
“에헤헷, 뭐죠, 그 얘기라는게?”
아, 입조차도 나를 배신하는구나. 내 불우한 성장기 시절이여 저주받아라.
“후후. 사실 내가 어제 말했던 일에 대해 좀 더 정보가 생겼거든.. 그런데 보아하니 우연히 만났던 잘생긴 동생이 그걸 필요로 할 것 같더라구~ 후우. 그러니 어떻게 내가 매정하게 그냥 지나칠 수 있겠어..? 안 그래?”
그녀는 중대한 비밀이야기랍시고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더니 내가 다가서서 고개를 내밀자 그런 내 귀에 대고 그렇게 느릿느릿 중얼거리며 사이사이에 은근슬쩍 입김을 불었다. 이야~ 조, 좋아. 잠깐, 이게 아닌데.
“헤헷, 지당한 말씀이시네요. 누님. 그래서요?”
“물론 말해주고는 싶은데에.. 후후, 아무리 동생이라고 해도 힘들게 알아낸 걸 그냥 말해주긴 그렇고.. 아주 작은 대가가 하나 있어. 들어줄 거지? 빨리 얘기해버리고 둘이 따로 조용히 시간을 갖자..?”
“..뭔데요? 혹시 돈?”
“에이~ 동생한테 정 없이 그런 걸 어떻게 받아. 그냥 정보 교환이지. 동생이 나한테 그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걸 말해주면 나도 새로 얻은 정보를 줄게. 빨리이~”
흐으음..? 내가 살짝 고개를 갸웃하자 그녀는 한층 더 요염하게 배시시 웃으며 내게서 반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그 순간, 어느새 나타났는지 모르게 말 그대로 내 코앞에 예리하게 빛나는 단검이 드리워졌다.
“내가 이것까지 쓰기 전에 말이야, 동생.”
“.. 아, 그러세요? 그런데 이건 어떠신데요?”
승자의 여유를 부리며 여전히 매혹적으로 웃고 있는 그녀를 향해 난 싸늘하게 빈정거렸다.
그녀는 어느 사이엔가 자신의 시선 아래쪽, 배꼽이 있는 부분에 겨누어져 있는 내 예리한 단도를 보고는 당혹스러워하며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너..!?”
“움직이지 마시지. 같이 죽고 싶지 않으면.”
아무리 한눈을 팔았다지만, 코 앞에 칼을 들이대는 걸 속수무책으로 당할 내가 아니다.
“..쳇! 그래봤자 네 쪽이 더 치명상일텐데?”
“뭐 그렇게 생각하면 해보던가. 아참, 내가 이거 휘두르면 멧돼지 목도 끊어지던데?”
본색을 드러내며 사납게 입을 놀리는 그녀에게 난 여유 있게 웃으며 겁대가리를 상실한 인간의 전형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던지 입술을 깨물며 제안했다.
“셋 세면 동시에 물러서지.”
“그럴까나? 둘, 셋!”
내가 그렇게 순식간에 숫자를 세고 칼을 거두는 척을 하자 그녀는 곧장 이를 악물며 칼을 도리어 내밀어왔다. 죽이려드는 것까진 아니어도 확실히 나를 제압하려는 것 같은데, 그럴 줄 알았지.
난 칼을 찔러오는 그녀의 손목을 기다렸다는 듯이 움켜잡고는 완력으로 팔을 통째로 등 뒤로 꺾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재빠르게 내게 등을 보이며 물러섰지만, 내가 팔을 잡고 있으니 소용없다. 게다가 난 멈추지 않고 매우 신속하게 그녀의 나머지 한 손도 잡아 마찬가지로 등 뒤로 돌려 꺽은 후 두 손목을 한데 겹치곤 왼손으로만 그것을 단단히 잡아 쥐었다.
내가 압도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혹시 그 어쌔신 녀석처럼 위험한 무기들을 잔뜩 가지고 있을 경우에 대비해 오른손을 자유롭게 두기 위해서였다.
“아악! 이 나쁜 자식! 놔!”
“하? 누가 누구더러 나쁜 놈이래?”
난 좀 화가 나서 그녀를 그대로 골목 벽으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애초에 두 팔이 통째로 뒤로 돌려져 단단히 꺽여 잡혀있는데다가 완력차이가 현저하게 나니 어쩌겠는가?
그녀는 힘없이 밀려나 그대로 벽에 얼굴부터 거세게 부딪혔다. 비명을 지르는 그녀를 무시한 채로 난 몸 전체로 그녀를 한층 더 강하게 벽으로 밀어붙이며 귀에 대고 싸늘하게 물었다.
“나에 대해 뭘 알지?”
“이 변태자식! 놔! 놓으란 말야!”
그녀는 몸부림을 치며 앙칼지게 발악을 했지만 어림도 없다. ..하지만 아무래도 다크문 헬리오스의 어쌔신이거나 한건 아닌 모양이다.
어쌔신이었다면 이렇게 완전히 잡히기 전에 무슨 짓이든 했든가 할 수 없게 됐다면 자결이라도 했겠지. 일단 다행이군. 혹시나 그쪽에서 날 눈치 챈 건 아닌가 했는데.
“놔..! 제발.. 싫어! 제발 하지 마..!”
“..앗!”
그 절규와도 같은 비명소리에 난 퍼뜩 놀라며 그녀의 팔을 풀어주곤 후다닥 물러섰다. 일단 어쌔신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한 짓이라지만 이래서야 마치 ‘후후, 잡은 김에 재미 좀 보자~’ 이런 놈 같아 보이지 않았겠는가?
음.. 말하고 나니 좀 아쉬운데, 풀어주지 말걸 그랬나? 난 입맛(?)을 좀 다시고는 놀람과 공포, 그리고 경계가 적당히 뒤섞인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고통스레 양팔을 움켜잡고 있는 여인을 향해 물었다.
“괜찮아요?”
“......”
겁에 질린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보니 마치 내가 죽일 놈이 된 것 같다.
뭐, 애초에 공격을 한 것도, 서로 검을 거두자는 걸 무시한 것도 그쪽이지만 그래도 좀 미안하긴 하군.
“쩝, 미안합니다. 근데 그쪽이 먼저 잘못한 거니까 그냥 서로 없었던 일로 하죠?”
난 그렇게 말하며 눈치를 봤지만 여인은 그다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언제든 내가 다시 달려들 거라고 생각하는지 불안해하는 티가 난다. 난 잘못한 거 없으니 이대로 그냥 갈까? 그런데 단순히 제압됐던 것 치곤 너무 아파하는 것 같은데.. 혹시.
내가 슬쩍 다가서자 여인은 움찔했지만 그 외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아니, 반응 안 하려고 기를 쓰고 참고 있군. 난 자세히 살펴보고서야 그녀의 한쪽 어깨가 빠졌다는 걸 눈치 챘다. 그녀는 내게 약점을 보이지 않으려고 이를 악 다문채로 고통을 참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쯧. 말을 하지.”
내가 좀 투덜거린 다음에 축 늘어진 팔을 잡아 올리자 그녀가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고통 섞인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런 건 오래 놔두면 큰일 난다. 재수 없으면 팔을 못 쓰게 되고 오래 방치할수록 습관적으로 탈골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차라리 잠깐 좀 아픈게 낫지.
팔을 쭉 펴고 몇 번 부드럽게 주물러서 굳은 부분을 대충 풀어준 후에 한손으론 그녀의 반대쪽 어깨를 단단히 잡고 고정한다. 그리고는 팔을 최대한 자연스레 늘어뜨리고 겨드랑이 사이쯤에 다른 손을 집어넣고 그대로 살짝 밀었다가 순간적으로 강하게 당겨 어깨를 맞췄다. 뚜드득.
“아아악!”
그리고 그녀는 우렁찬 비명소리와 함께 기절해버렸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