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 요정의 숲 (3)
“으으으..”
아이고 머리야.. 눈을 뜬 나는 어지럼증을 느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온 몸이 미친 듯이 쑤시지.. 않네? 엥? 난 순간 놀라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뒷골이 좀 땡기긴 했지만 그보다는 눈앞의 광경에 놀랐다.
요정들한테 당했으니 일어나면 내 성품을 고려할 때(?) 천국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요정들에게 포박된 채 감금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건 더없이 평온한 분위기의 집안 풍경에, 나는 무려 나무가 이상하게 자라서 자연히 만들어진 듯한 침대에 편안하게 누워있었다
게다가, 기절할 때 입은 타격은 물론 얼마 전 사부와 치고받으면서 입은 상처까지 ㅡ사실 난 빨리 여행하고 싶어서 완치되기 전에 길에 나섰다ㅡ 확실하게 치료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아아. 흠.”
목을 한번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살펴보니 내가 놓아두었던 짐도 바닥에 잘 놓여 있다. 그리고 내가 낸 소리를 들었는지 문 밖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진다. 음.. 아무래도 요정들의 거주지인 모양이다. 내가 일어난걸 알리러 갔으니 곧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오겠군.
순간 도망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곧 에라 모르겠단 심정으로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죽일 거였으면 벌써 죽였겠지. 설마 다친 놈 잘 치료해주고 잘 재워주고 난 다음에 죽이는 풍습이 있는 건 아닐 것 아냐.
뭐, 요정 두 명 쥐어 패고 목에 칼 들이대고 종족을 싸잡아 욕하긴 했지만 무슨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음? 아니겠지?
“마법이라..”
어쨌든 난 드러누운 채로 일단 생전 처음으로 겪어본 마법이란 것의 강력함을 곱씹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야기론 많이 들었지만 직접 당해보니 정말 대단하군. 너무 허무하게 당해버려서 좀 분하기도 하다. 쳇, 하지만 애초에 그런 식이면 저항자체가 불가능하잖아? 대체 그럼 옛날 마도시대엔 사람들이 얼마나 강했다는 거야.
“일어났는가?”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문이 열리며 두 명의 요정이 들어왔다.
한명은 나이가 굉장히 많은 듯 인상이 쭈글쭈글하고 등도 좀 굽고 무려 턱수염까지 제법 기르고 있는 노인이었는데 추정되는 나이에 비해 짙은 녹색인 눈동자는 매우 깊고 맑았고 전체적으로 상당히 정정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잘 늙지도 않는다는 요정이 저 정도 노화도리어면 거의 수백 년은 족히 살았다는 이야기인데.. 짐작컨대 그 마법사인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한명은 마법에 당하기전에 대치했던 그 무리의 리더인 청년 요정이었는데 장검을 빼들고 노인 요정을 호위하듯 서서 날 쏘아보고 있었다.
나에 대한 적의도 적의지만 그보단 내가 노인을 공격이라도 하지 않을지 극도로 경계하는 것 같다. 아무튼 내가 받은 느낌은 자식 검 하난 때깔 나는 것 들고 있네. 라는 것이었다.
“예. 절 치료해 주신 겁니까?”
난 일단 정중하게 나가기로 마음먹고 예의를 갖춰 질문했다. 그러자 그 노인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준다. 노인다운 달관과 깊이 있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인상적이다.
“놀랐는가? 우리 부족에 대대로 전해지는 특별한 치유술이라네. 내가 보니 자네 몸이 꽤 상해있어서 일단 최선을 다해보았지.”
혹 마법인가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일반적인 마법이라도 이런 치유는 불가능하다. 드루이드의 자연력이나 신관의 신성력이라면 모를까. 어쨌든 몸 좋아져서 기분이 나쁠 리가 없는만큼 난 깊은 고마움을 느끼며 꾸벅 고개를 숙이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서 덧붙였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유우라 말인가? 잘 있으니 걱정 말게. 그런데 내 일단 그 일에 대해 자네에게 확인할 것이 있네.”
이제 본론인가. 난 복잡한 질문이 나오기 전에 선수를 쳐서 내 사정을 청산유수로 설명했다. 난 여행 중인데 우연히 용병들로부터 요정이 쫓기고 있단 소리를 들었고, 그래서 그녀를 도와주려고 따로 그 뒤를 추적했다. 그러다가 위기에 빠진걸 보고 나서려고 하던 차에 요정들과 마주친 것이다. 라고.
내 설명 중에 그 청년 요정 녀석은 몇 번이나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 노인의 앞이라서 차마 나서지 못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음, 이 사람 상당히 인망이 있는 모양이다.
“잘 들었네. 그런데 몇 가지 빠진 사항이 있군.”
내 말이 끝날 때까지 주의 깊게 경청해주던 노인은 손가락을 들어 올려 하나씩 꼽아 보이며 지적했다.
“첫째로, 자네가 용병들과 마찬가지로 그 귀족에게 고용된 자가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가? 그리고 둘째로, 자네가 선의로써 유우라를 구하려고 나선 것이라고 우리가 믿을 수 있는가? 또한 셋째로, 그렇다면 왜 그 과정에서 다른 이들과 싸움을 벌이고 인질을 잡았는가? 이정도일세.”
나이 헛먹는 법 없다고.. 쩝, 대충 얘기해서 넘어갈만한 상대가 아니다. 게다가 온화하고 지혜로워 보이지만 그만큼 완고한 기색도 엿보인다.
여기서 어물거렸다간 꼼짝없이 나쁜 놈으로 몰릴 가능성도 있었기에 난 곧바로 정색을 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전 그 귀족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전 지금껏 캬르한 산맥 근처를 벗어나본 적이 없고 또 직접 제 짐을 보시면 제가 어떤 보수나 대가도 받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으시겠죠.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제가 착해빠진 놈이라서 지나가다 쫓기는 요정을 무조건 돕자고 온건 아닙니다. 산골에서 자라서 요정이라는 말에 호기심도 일었고요. 사실 저도 나쁜 놈이라서 구해내고 나서 흑심을 가졌을지도 모르죠, 뭐. 음, 그러니까 그 대목은 일단 넘어가고. 그러고 나서 요정들이랑 싸운 건, 내가 구하려던 그 유우라란 여인을 죽이려고 들기에 막다보니 그렇게 된 겁니다. 인질을 잡은 거야 당연히 제가 극히 불리한 입장이니 살아남으려고 선택한거고 말입니다. 안 그랬으면 화살꽂이가 됐을 테니까.”
일단 진지하게 말하고 나니 할 수 있는 한 나름대로 조리 있게 설명했다 싶어서 당당하게 노인을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그 노인이 껄껄껄 하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엥? 내 대답이 그렇게 웃겼나? 어디가? 나는 물론 그 청년 요정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그렇게 한참동안 실컷 웃어버린 후에야 노인이 입을 열었다.
“허허, 참 현답이로고. 영리하진 않으나 더욱 지혜롭군 그래. 껄껄.”
뭔 소리야? 영리하지 않은데 지혜로운 대답이라니. 그 말이 그 말이잖아. 노인은 뭐가 그리 유쾌한지 어리둥절해하는 날 보고 한 번 더 크게 웃어서 웃음기를 마저 털어내고는 이내 중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네가 답을 했으니 나도 답을 해주겠네. 우리가 하려한 행동에 대해서 말이지.”
“......”
“자네가 보기엔 이해가 안 되겠으나, 우리 요정들에겐 영성(靈性)이란 것이 있네. 다른 종족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자연과 조화롭고 평화롭게 지내는 것처럼 보이겠으나 사실 우리는 그 조화와 평온함이란 틀에 묶여있다고도 할 수 있는 종족이지.”
무슨 소리지? 조화와 평온함에 묶여있다고? 그게 말이 되나? 난 쉬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노인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는 진지하면서도 깊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설명을 계속했다.
“우리는 지극히 조화롭고 평온한 영성을 가져서, 그에 반하는 행위를 하면 아주 쉽게 그 영성에 상처를 입게 되네. 그리고 그건 평생 회복되지 않아. 불행하게도. 그리고 영성이 무너진 요정은 이미 ‘요정’ 이 아니게 되어버리네. ..이건 이해시키기 힘들겠군. 물론 생물학적으론 여전히 요정이지만 영성에 상처를 입은 이상 요정으로써의 정신은 파괴된단 의미네. 이는 우리에겐 결코 과거의 악몽이나 정신적 트라우마 정도의 문제가 아니야. 삶과 생존이 달린 문제지. 영성이 상처 입은 요정은, 죽을 때까지 끔찍한 정신적 고통과 장애를 겪으며 추후에는 결국 육체마저 일그러지고 무너져 내리네. 요정이 살아서 겪을 수 있는 가장 지옥 같은 고통이지.”
아.. 난 나도 모르게 자그마한 탄식을 내뱉었다. 이 연륜 있는 요정조차도 자신들의 선택과 입장에 대해 끝없이 고뇌하고 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끔찍한 전통을 가지게 되었다네. 우리가 지키지 못한 가여운 요정을 찾아내어 구출해내고는.. 죽이는 것이지. 보통 그들 자신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네만.. 하지만 특히 어린 요정들의 경우엔.. 그래서 더더욱 우리가 고통스럽고 죄스러운 것이네.”
눈물이라도 쏟을 듯한 요정 청년의 표정과는 달리 노인은 슬픔을 마음 속 깊이에 묻는 것처럼 부드러운 인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더 슬픈 건 왜일까. 난 내가 요정들에게 너무 심한 말을 해버렸단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그럼 그 여인은?”
“아, 기쁘게도 유우라 그 아이는 천신만고를 겪었으나 기적적으로 영성에 타격을 입지 않은 모양이더군. 내 7백년 인생을 통틀어서도 처음 있는 일이네만.. 결국 우린 자네 덕분에 섣부른 판단을 막고 소중한 생명을 지킬 수 있었네. 정말 고맙게 생각하는 바이네.”
난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해는 한다. 그들의 고통을. 그래도 난 그녀가 죽었다면 또한 그것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생각이 어찌 이 칠백 살 먹은 요정의 발뒤꿈치나 따라갈 수 있겠느냐 만은.. 그래도 내 생각은 다르다.
“..저는 말이죠.”
“....?”
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아무리 고통스럽고 불행해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살아야지 고통스러운지 불행한지, 아니면 행복한지 극복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잖아요.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요정 노인. 침묵의 숲 푸른 날개 요정 부족들 중에서도 가장 큰 부족의 대장로이자 현존하는 요정 중 최고령이며 강력한 위저드이기도 한 ‘하루얀 워터메인’ 은 한참동안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침묵하다가 마침내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라고 답변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