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스승과 제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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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과 암초가 없는 항해, 이 얼마나 단조로운가? 고난과 역경이 있기에 인생이 있다. 만약 누군가 내게 영원한 평온과 행복만을 주기로 약속한다면, 나는 그를 피할 것이고 피할 수 없다면 죽일 것이며 죽일 수 없다면 죽을 것이다.
-라이엔바흐 C 루드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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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할 수 있다고요!”
나는 두 팔을 앞으로 내밀며 당당한 태도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대답은 내 뒤쪽에서, 그것도 매우 어이없어 하는 목소리로 돌아왔다.
잠깐. 뒤쪽? 딱. 곧장 뒤통수를 내려치는 호쾌한 충격에 나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고 폴짝폴짝 뛰었다.
“상대가 어디있는지도 모르면서 뭘 할 수 있다는 거냐.”
으.. 할 말은 없군. 하지만 세상에, 얼마나 사정없이 쥐어 팼으면 내가 상대의 위치까지 놓칠 수 있는 걸까.
이래 뵈도 산에서 곰에게 정통으로 얻어맞았을 때조차 이 악물고 버텨냈던 나다. 내 맷집은 내가 보기에도 기가 찰 정도인데.. 와, 정말 쫀쫀하게 그걸 가르쳐주기가 그렇게 싫었나?
“정말 이러실 겁니까? 훈련을 다 마치면 가르쳐준다고 했잖아요!”
..솔직히 말하면 내가 일방적으로 정한 약속이었지만 이럴 땐 무조건 강력히 밀고나가야 한다.
이 뻔뻔하고 고집도 세고 자기 멋대로인 성질머리까지 더러운 사부를 상대할 때 물러서면 그걸로 얘기가 두루뭉수리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난 그런 말 한적 없다.”
“사부님!”
단칼에 잘라 말해버리는군. 오랜 경험상 이런 경우 아무리 계속 말해봤자 허사다. 예전 약속을 들먹여도 소용없자 난 이번엔 최대한 가련하고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사부를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바라보았다.
아, 이 얼마나 새로운 가르침에 목말라하는 우수한 제자의 표본이란 말인가.
“뭐냐 그 낯짝은. 난 남자는 관심 없다.”
“......”
이런 제기랄. 아무래도 틀린 건가? 나는 솔직히 매우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살 눈치를 살펴보았지만 사부는 어떤 흔들림도 없는 무관심한 태도로 산안개가 피어오르는 캬르한 산맥의 산줄기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 역시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의 절경이지만, 아무리 절경이더라도 이제 진저리가 나는 건 사실.
작디작은 산골마을에서 고아로 자라나다가 우연히 마을을 지나던 이 사람을 만나 이 깊고 깊은 산중까지 따라온 지도 어연 10년이 넘었다. 아니 정확히 12년째다. 내가 벌써 스물두 살이니까.
이 사부란 작자가 워낙 방랑벽이 심해서 그 시기의 절반 가량은 혼자였지만 그래도 한솥밥 먹은 시간만 쳐도 무려 6년이다, 6년!
그렇게 부려먹고 결국 제자로 받아 훈련을 빙자한 끝없는 혹사를 시켜놓고선 끝끝내 마지막 훈련과정은 가르쳐주지 않겠다니!
“혹시 최강의 기술이니 뭐니 그건 다 허풍이었던 거 아닙니까?”
따악! 최후의 방법으로 팔짱을 끼며 불량스레 도발을 해보았지만 당장에 응징이 돌아왔다.
악! 이건 진짜 아프다. 또다시 머리를 감싸 쥐고 방방 뛰는 날 더없이 한심하단 눈으로 바라보던 사부는 이내 한숨을 쉬고는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누누이 말했듯이 최강의 기술 같은 것은 없다. 멍청한 제자야. 실력이라는 것은 매일같이 쌓아올린 수련과 본인 스스로의 업으로 생기는 것이고, 기술이라는 것도 결국은 스스로 갈고닦은 단순한 동작이 좀 더 나아간 형태일 따름이다. 네가 지금 새로운 검술이든 창술이든 배운다고 해서 강해질 거라고 생각하느냐? 어리석은 소리다. 강하고 약한 것은 그 사람의 역량일 뿐이다. 네가 아무리 대단한 창술을 쓴다 해도 내 단순한 주먹 한 대를 이길 수 없듯이 ‘기술’ 같은 것에 얽매이는 짓은 바보들이나 하는 거야.”
“......”
사부는 거기까지 말하곤 다시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아래로 펼쳐진 산중을 바라보았다. 그 옆모습은 마치 세상사에 달관한 고고한 은둔자의 풍모를 떠오르게 할 정도로 멋있었지만 나에겐 결국 사부는 사부다.
아무리 겉보기엔 근사한 턱수염과 중후한 느낌을 주는 칠흑색의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중년이라해도, 또 이름도 ‘메이펑 후’ 라는 뭔가 있을 것 같은 근사한 걸로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웬 개폼입니까?”
“..너 진짜 뒈질래?”
좀 전까지의 은둔자적인 풍모는 온데간데없이 이마에 핏줄을 세우며 돌아서는 사부. 이런 사람이다. 겉과 속이 완전 따로 노는데다가 성격파탄에 가까울 만큼 성격이나 인격이 오락가락하는 덕분에 처음엔 얼마나 속았었던가.
그리고 이 사부가 내뿜는 요정도의 살기만으로도 이 산속의 맹수나 몬스터들도 벌벌 떨며 피해간다.
나야 하도 많이 당해서 그다지 위축되거나 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더 이상 했다간 딱 죽기 직전까지 얻어터질 것이란 사실을 잘 알기에 헤헤 웃으며 물러섰다.
“나 참. 저도 안다고요. 하지만 저도 이제 하산할 건데 마지막으로 그 동방의 고창술(古槍術)이란게 궁금해 죽겠단 말이에요. 사부한테 십팔반병기 대부분을 배우긴 했지만 제가 창술에 가장 잘 맞는 거 아시잖아요. 새로운 창술이 있다는데 어떻게 관심이 안 갈 수가 있어요?”
사실 하산할 거란 계획은 지금에서야 처음 말하는 것임만큼 내심 사부의 반응이 궁금해서 눈치를 보았지만, 사부는 그저 코웃음만 쳤다. 아, 약간 상처.
“그냥 하산해라 이놈아. 그렇잖아도 나도 곧 이곳을 다시 떠날 셈이었고, 네 놈도 그간 배워먹은게 있으니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을게다.”
“..그래도 10년간 사제지간 이었는데..”
내가 사부와 헤어지게 된다거나 하는 일로 엉엉 울고 할 만큼 센티멘탈한 놈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솔직히 너무나 냉정한 반응에 꽤 서운하긴 하다. 이대로 헤어지면 아마 평생 못 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방랑벽의 사부도 사부지만 일단 나부터가 한번 떠나고 나면 이 지독한 산 구석으로 다시 돌아올 마음은 들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당연히 서운하다는 이유로 더 이상 이런 산중에 처박혀서 살 생각도 절대 없다.
캬악! 여긴 대체 여자도 없고, 또 여자도 없고, 그리고 여자도 없고! 무엇보다 여자도 없단 말이야! ..흠, 흠. 아니 그보단 사내 된 자로써 뭐가됐든 한번 세상에 나가보고 싶다. 정말이라고. 이건 내 오래전부터의 꿈이다. 모험! 여행! 그리고 여자! 얼마나 멋지냔 말이다.
“갑자기 웬 청승이냐? 라샤크. 내가 엉엉 울면서 소매를 붙잡기라도 할 줄 알았냐?”
말은 거칠지만 이번엔 재미있단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다. 신기하게도 이럴 때의 사부는 나이와는 달리 짓궂은 악동 같아 보이기까지 한다. 그 태도에 난 발끈해서 훽 돌아섰다.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진짜 냉혈한이네. 난 그래도 사부랑 헤어진단 생각에 내심 좀 씁쓸했는데 말이야.
아아, 물론 제자긴 하지만 사부가 날 여기있으라고 잡아둔 적도 없고, 사부란 이유로 날 무언가로 강제한 적도 없다. 간혹 자기가 내켜서 지금처럼 훈련을 봐줄 땐 좀 다르지만 만약 내가 하기 싫다고 했으면 아마도 사부는 ‘그럼 하지 마.’ 라고 한마디하고 말았을 테지.
원래가 그런 사람이다. 어쩔 땐 날 열심히 가르치는 듯하다가도 또 어쩔 땐 전혀 무관심하기도 하고. 어쩔 땐 살갑게 굴기도 하다가 또 어느 땐 생전 처음 보는 사람마냥 냉정하게 굴기도 한다. 그 뿐만 아니다. 어쩔 땐 호방하고 시원시원하다가도 어쩔 땐 그냥 신경질적이고 예민하다.
이건 정말 말 그대로인데.. 아마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이해하지도 믿지도 못할 것이다. 지금 보이고 있는 모습조차도 이 사부의 수많은 모습들 중에 하나일 뿐이었으니까. 쳇,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이건 너무하잖아.
“쳇, 됐어요. 가든가 말든가. 각자 갈길 갑시다.”
“흐음.. 좋다 그럼. 그간의 정을 봐서 한 가지 조건을 해내면 고창술은 물론 작별 선물도 해주지.”
엣? 난 그 솔깃한 제안에 반색하면서도 깜짝 놀랐다. 이 사부란 인간이 나랑 헤어지는게 아쉽긴 한건가? 그런 의심스런 표정으로 살펴보았지만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왠지 마지막까지도 사부한테 장난질이나 당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그런 생각으로 못들은 척 하기엔 제안이 너무 좋다.
“뭡니까, 혹시 뻔하게 ‘나를 꺾어봐라’ 이딴 진부하고 치사한 소리는 아니겠죠?”
난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선수를 쳤다. 이건 비겁한 것이 아니다. 이 인간은 애초에 나랑은 격이 다르니까. 어렸을 땐 사부를 따라잡고자 마음먹은 적도 있지만 지금은 포기한 상태다.
나는 기본적으로 골격이 크고 신장도 백팔십오 메릴이 훌쩍 넘는데다가, 꾸준한 수련과 산속의 생활로 극도로 단련된 덕분에 객관적으로 보아도 굉장히 강인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 간혹 근처 작은 마을에 나가면 내 체격은 이목을 집증시킬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사부는 그런 나보다도 신장만 해도 머리 두 개 정도는 더 크고, 훨씬 더 발달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런 체격적인 것 외의 차이는 더욱 컸다.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이 인간은 맨손으로 바위도 부순다. 물론 나도 기교를 좀 쓰면 바위 격파정도야 할 수 있지만.. 사부는 그런 정도가 아니다. 기술이 아니라 단순 완력만으로 바위를 가루를 내버리는데 그렇다고 용을 쓰는 것도 아니다. 그냥 한손아귀로 장난처럼 부수어 버리니까.
게다가 아무리 거칠게 움직여도 지친 모습을 보여준 적도 없고 그 덩치로 빠르기까지 하다. 한번은 대체 어디를 그리 돌아다니는지 궁금해서 따라가 본 적이 있는데 숨넘어갈 뻔 했다.
나도 산중에서의 고속기동이라면 고양이과 짐승들도 저리가라 할 정도인데도 도저히 발끝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대련 중엔 일순간이라도 시선을 놓치면 그걸로 끝이다 싶을 정도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더욱이 무술 실력으론 아예 지금의 나로선 그 한계조차 짐작하지 못할 수준이다. 한마디로 극강. 내가 무슨 수작을 부린들 이기기는커녕 상처하나 내기 어렵다.
“미쳤냐? 그런 면봉으로 드래곤 코 후비는 조건을 걸게.”
..뭐라고 해야 할까. 내 스스로 인정하긴 했지만 저렇게 어처구니없어 하면서 당당하게 말하니 무지하게 열 받는군.
“마찬가지로 너한텐 말도 안 되게 힘들긴 하겠지만, 지금부터 열흘 동안 시간을 주마. 무슨 수를 쓰든 상관 안할 테니 나한테 일격을 가해봐라. 어떻게든 맞추기만 해도 인정해주지.”
“......”
난 잠시 동안 곰곰이 고민했다. 저 말인 즉, 무려 열흘 동안에 단 한번이라도 몸에 닿기만 하는 공격을 성공시키면 되는 것 아닌가? 연습 때 확실하게 타격을 줄만한 가격에 성공한 적은 없지만 검이나 창을 맞대며 제대로 겨뤄본 적도 제법 있고 또 연습과 죽자고 덤비는 실전은 다른 법이다.
일단 사부는 늘 하던 대로 할 테지만 나는 죽자고 기를 쓰고 덤벼들 수 있지 않은가? 열흘이라면 체력적으로도 넉넉하고. 결국 고민 끝에 난 ‘설마 한 대쯤이야..’ 라는 결론을 내렸다.
“좋아요. 나중에 무르기 없어요.”
난 차분한척 하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건 사부가 나를 너무 무시한거다.. 아니 어쩌면, 사부가 딴에는 아쉬움을 숨기려고 일부로 쉬운 조건을 단 걸지도. 어느 쪽이던 간에 일이 쉬워지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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