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 요정의 숲 (7)
그 후로 스무날쯤 지나고 나자 유우라의 상태도 아주 많이 호전되었다. 이건 나 뿐 아니라 에릴과 질리안, 그리고 하루얀이 크게 노력해준 덕분이었는데 유우라는 이제 동족을 만난다고 무조건 겁에 질리거나 하지 않았고 하루얀이나 에릴, 질리안과는 아무 문제없이 예전처럼 소통했다.
알고 보니 유우라는 활기찬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말썽꾸러기였는데, 상태가 괜찮아지면 질수록 날 놀리거나 괴롭히는 장난을 치는 것을 즐겼다.
으으.. 이래서 어린애는 그저 잘 때만 천사 같다더니.. 아무튼 아무리 장난을 쳐도 날 스스럼없이 오빠라고 부르는 귀여운 모습에는 화조차 나지 않는다. 으음, 에릴은 그걸 가지고 위험한 징조라고 놀렸지만.
“이제 두 달도 지났군..”
난 이제 다시 하루얀의 집으로 돌아와 있었는데 또 오늘 하루가 지는 것을 창가에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일시적인 호기심과 선의로 시작한 일이 얽히고 꼬여서 여기까지 오게 됐지만 난 원래 세상을 여행하고 모험하기 위해 길을 떠난 녀석이다. 이제 슬슬 다시 떠나야 할 때다.
물론 이곳은 너무나도 좋다. 진정한 행복이란게 이런 걸까 싶을 정도로 하루하루가 포근하고 화목했다. 정확히 표현하기 힘들지만, 매일매일이 부드러운 솜털에 둘러쌓인 듯 평온하고 나른한 기분.
이제 적어도 이곳 마을의 주민들과는 모두 굉장히 친해져서 스스럼이 없었고 다른 마을의 요정들이랑도 곧장 어울렸다. 처음엔 우려를 하던 마을의 장로들도 내가 온 후로 젊은 요정들이 활력 있어졌다고 평가하곤 했다.
질리안과는 둘도 없는 단짝이 되었고 에릴과는 여전히 미묘하지만 누구보단 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날 오빠라고 부르며 따르는 친동생 같은 유우라도 있고 나를 마치 친손주 대하듯 대해주는 하루얀도 있다. 그냥 이대로 평생 눌러앉아도 난 만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권태해선 안 되는 동물이다. 요정과는 다르다. 이곳에 있으면 나 스스로가 맑아지고 선량해지고 한없이 깨끗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행복하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대로 있으면 난 내가 아니게 될 테니까. 난 이들 요정들을 사랑하지만 지금의 나 자신도 사랑한다.
“하아..”
그래서 이미 얼마 전부터 떠나겠단 결심은 굳혔지만 어떻게 말해야할지를 모르겠다.
당장 내일만해도 키릴과 대련하기로 했고 아우손과 블렌에게 낚시도 가르쳐주기로 했잖은가.
아, 제길. 이런 식이면 평생가도 떠날 수가 없겠어. 차라리 야반도주를 할까? 하지만 저들이 날 강제로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도망은 좀 그렇다. 게다가 어떻게 염치도 없이 인사도 안하고 가냐?
“짜잔.”
“..알고 있었어. 이제 요정들 움직이는 기척도 문제없다고.”
난 갑자기 불쑥 창가 밑에서 튀어 오른 유우라에게 피식 웃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는 볼을 좀 부풀리고는 투덜거렸다. 그래봤자 토라진 것 같다하기 보단 귀엽기만 하지만.
“칫, 예전엔 놀라는 척이라도 해주더니.”
“밥은 먹었어?”
“왜 오빤 맨날 무드 없게 날 보면 밥 얘기야?”
너랑 무드 잡아서 뭐 하냐~ 라는 말이 턱밑까지 올라왔지만 유우라가 애 취급하는 걸 가장 싫어하는 걸 잘 아는만큼 꾹 눌러 참는다.
“너랑 무드 잡아서 뭐 하냐~.”
앗, 참는다고 했는데 그대로 저질러 버렸다. 에헤헷. 순간 눈앞이 번쩍하며 유우라의 멋들어진 어퍼컷이 작렬한다.
으.. 나날이 강해지는데 그래? 이런걸 보면 고작 한 달 전에 그 울고 불며 공포에 질려 나한테만 매달려있던 모습은 거짓말 같다. 유우라는 화가 나서 나랑 반대쪽으로 쪼르르 달려가면서 소리쳤다.
“오빤 바보! 내일 아침에 짐 싸서 나갈 준비나 해둬! 아침 일찍 에릴 언니랑 질리안 오라버니랑 나랑 같이 캠핑을 갈 거니까.”
“앗, 잠깐 기다려봐..!”
하지만 내 외침을 무시하고 유우라는 사라졌다. 캠핑이라니 처음 듣는 소린데. 내일 선약도 있는데 너무 일방적인 거 아니야?
난 투덜거리면서도 일단 짐을 싸두기로 했다. 뭐 어차피 짐이라고 해봤자 난 떠날 결정을 했을 때부터 딱 정리해둔 상태니 그걸 들고 가면 땡이군.
“일어나 오빠!”
으윽.. 난 아예 내 위에 올라타서 날 짓누르고 있는 유우라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이놈의 계집애. 시집은 어찌 갈라고 이러나. 아니 그런데 사부 덕분에 매우 이른 아침이면 자동반사로 눈이 떠지는 내가 이렇게 졸릴 정도면 엄청 이른 시간인데..?
나는 유우라를 번쩍 들어 올려 옆에 내려놓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척 봐도 완전 새벽인데 뭔 캠핑을 이렇게 일찍 가지? 아무튼 대충 옷을 챙겨 입고 하품을 하며 집 밖으로 나섰다. 하루얀도 자는듯하고 마을 전체가 쥐죽은 듯 조용하다.
“이 쪽, 이 쪽.”
날 잡아끄는 유우라는 잔뜩 신이 나있었다. 하긴 건강이 회복 된지 얼마 안 되서 근래엔 멀리까진 가본적이 없지.
폴짝거리며 잘도 뛰어가는 유우라. 난 고개를 끄덕이곤 그 뒤를 따라 성큼성큼 걸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걷자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에릴과 질리안이 나란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난 반갑게 손을 흔들다가 뭔가 이상한 걸 깨닫고 멈춰 섰다. 짐을 챙겨온 건 나와 유우라 뿐. 둘은 맨몸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웃고는 있지만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하다. 유우라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신나했지만.
“일단 이동하자.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
질리안이 무뚝뚝하게 말하고 앞장서 걸었고 에릴도 입을 다물고 그 뒤를 쫓았다. 이쯤 되자 유우라도 뭔가 이상하단 것을 눈치 채고는 불안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았다.
뭐지? 나도 전혀 상황을 모르니 위로해줄 수도 없어서 그저 그 손을 꼭 잡아주고 걸을 뿐이었다.
확실히 뭔가 수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질리안과 에릴이 나나 유우라에게 해가 될 만한 일을 할리가 없기 때문에 난 무슨 사정이 있으려니~ 생각하며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침묵 속에서 여러 차례 복잡한 수풀을 헤치고 이동한 끝에 드러난 광경에 난 복잡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너희들..”
그곳은 침묵의 숲을 나가는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곳이었다. 처음 내가 쓰러진 채로 이것을 통해 요정 마을로 온 것이다. 그리고 마법진 옆에는 자고 있을 줄 알았던 하루얀이 인자한 미소를 지은채로 서있었다.
난 모든 것을 눈치 챘다. 질리안과 에릴은 내가 어떻게든 몰래 떠나려고 하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넌 인간이니, 인간들 틈에서도 지내야 하겠지. 라샤크. 늘 혼자 고민하는 꼴이 보기 싫어서 내가 먼저 널 내쫓기로 했다.”
질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살짝 쳤을 뿐인데도 굉장히 아프다.
무뚝뚝하고 고지식하지만 신의가 깊고 책임감이 강하며, 너무 정직하고 곧아서 그만큼 화도 잘 내지만 옆에 있으면 누구보다도 듬직한 친구인 질리안 루디나.
“향수병 걸린 남자라니 너무 하잖아, 라샤크. 나가서 하고 싶은 일 다 해보고 제발 들여 보내달라고 사정하게 되길 기다릴게.”
에릴은 트레이드마크 같은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머리카락 끝을 꼬았다.
속을 잘 알 수 없고 가끔 이상한 장난을 잘 치지만 자애롭고 상냥하며, 무엇보다 시원시원한 성격에 종종 내게는 마치 사랑하는 연인처럼 느껴지던 친구인 에릴 루에아드.
“자네가 있어주는 동안 우리 마을이 너무나 재미있더군. 사실 말이야, 내 이 나이를 먹었지만 원래 우리들이 좀 재미는 없었어.”
하루얀 워터메인 대장로는 칠백 살이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도, 그러나 누구보다도 유쾌하게 눈을 찡긋하며 그렇게 말했다.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 침묵의 숲 근처로 오게. 다 알 수 있으니까.”
난 뭐라 할 말을 찾을 수 없어서 그저 묵묵히 그들의 작별 인사를 서서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모든 걸 눈치 챈 유우라는 지금까지의 씩씩했던 모습을 모두 잃어버리고 그 큰 눈망울에서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기 시작했다.
“가지마.. 가지마. 오빠. 나 이제 착하게 굴게. 응? 나 나쁜 장난도 안치고.. 흐..흑.. 오빠..”
에릴이 그런 유우라를 뒤에서부터 안고는 뭐라고 속삭인다. 하지만 유우라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 지켜보고 있으니 나도 자꾸만 눈앞이 뿌옇게 변해간다.
왜 이러지? 제길.. 난 뭐라 말하기 위해 입을 떼었다가 꼴사납게도 복받쳐 울 것 같아서 이내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뭐라고.. 뭐라고 해야 하는 거지? 고맙다고? 바보 같아서 떠난다는 말도 못하고 끙끙거리던 날 배려해줘서? 아니면 이렇게 좋은 곳을 제 발로 박차고 나가는 멍청함을 이해해줘서? 아니면 모든 것을..? 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마법진 위로 천천히 올라섰다. 하루얀이 주문을 읊기 시작한다.
난 빛 무리에 휩싸여가면서야 결국 마지막으로 외칠 수 있었다. 그들이 진짜 내 가족이었고 꼭 돌아오겠다고.
그리고 그렇게 막 공간이동을 하려는 찰나, 에릴이 계속 안 오면 우리가 찾으러 갈 거야~ 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서야 난 비로소 웃어 보일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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