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 구출의 로망 (3)
“..이제 정신이 드나 본데요? 에잇, 일어나려면 좀 빨리 일어날 것이지.”
“그렇군.”
“라, 란돌? 앗, 너는!”
그녀는 깨어나자마자 눈에 익은 동료가 보이자 좀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그 옆에 있는 날보곤 더 놀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나는 대책 없이 기절해버린 그녀를 들쳐 업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이 넓은 도시를 헤맨 끝에 어렵사리 그녀의 동료인 란돌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곤 그들이 잡은 숙소로 그녀를 데리고 왔는데 이 둘은 그저 동료 사이였는지 방도 따로 쓰고 있었고 란돌은 심지어 그녀가 어디에 갔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의아해하는 그에게 상황을 대충 설명하고 간신히 좀 쉬고 있던 차였는데 그제껏 내 등에서 축 늘어져 잘 쉬고 있던 그녀가 눈을 뜬 것이다. 아, 진짜 좀 일찍 일어나서 걷든가 아님 숙소라도 알려주든가 젠장.
“란돌! 이 녀석이 날 마구 폭행하고 심지어는 겁탈하려고도 했어! 보고만 있을 거야?!”
허.. 정말 대단한 성격이로군. 일어나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난 어이가 없어서 그저 피식 웃었고 란돌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보나마나 네가 시비를 걸었겠지. 그리고 설령 사실이래도 내가 나설 이유는 없다.”
“뭐? 너 지금 저 변태 편을 드는 거야?!”
“그는 길도 모르면서 널 들쳐 업은 채 여기까지 날 찾아왔고 자비로 의사까지 불러주었다. 굳이 안 해도 되는 수고스러움을 감수한 사내와 멀쩡히 일어나서 은인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여자. 내가 편을 든다 손 치더라도 과연 어느 쪽 편을 들리라 생각하는가?”
와, 이 사람 정말 무지 솔직하게 말하는 타입이로군. 과연 더 이상 대꾸할 말이 없는지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흠, 분위기를 보니 고맙단 말 듣긴 그른 것 같지? 그럼 내 용건이나 보고 가야겠다.
“됐으니까 나 가기 전에 아까 하려던 말이나 마저 해봐요. 그 몰래 움직이는 검은 것을 봤단 이야기, 새로운 정보가 있다면서요?”
란돌은 잠시 눈썹을 찌푸렸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뒤로 물러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 여인은 잠시 동안 날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너 대체 뭐야? 왜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글쎄, 호기심이 많아서.”
“혹시 귀족이야? 아니, 기산가? 뭔가 일이 있나보지? 아까 전 행동을 보니 누구한테 쫓기나본데.”
그녀는 내 반응을 떠보려고 연달아 물었지만 내가 무표정하게 묵묵부답 서있기만 하자, 답답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뭐, 좋아. 그럼 나부터 시작하지. 난 이곳에 뭔가를 찾으러 왔어.”
“세실리아.”
“잠시 나서지 말아봐, 란돌. 나도 생각이 있으니까.”
음.. 이름이 세실리아인가? 아무튼 보아하니 저 두 사람이 뭔가 같은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난 두 사람이 뭘 찾든 관심 없는데요.”
“알아. 하지만 난 네 정보가 필요해. 그 뭔가를 찾는데 이곳이 소란스러울수록 유리하거든. 그래서 묻는 건데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난 어젯밤에도 그 이상한 ‘검은 것’ 을 봤어. 그리고 사실 이번엔 우연히 본게 아니라 직접 조사를 한거였지.”
“......”
“난 어제 널 만나고 나자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고 그건 우리일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았어. 그래서 밤이 되기 전에 미리 내성 근처에 숨어서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지. 완전히 어둠이 깔리자 건물 지붕 위에서 ‘그 검은 것들’ 이 움직이더군.”
“들?”
“그래. 내가 본 건 둘이야. 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마치 귀신처럼 움직였는데 모두 내성 근처를 떠나지는 않았어. 그리고 좀 더 숨을 죽이고 있으니 내성문이 열리고 누군가 나왔지. 웬 남자였는데 아닌 척 하면서도 은근슬쩍 그 검은 놈들이랑 접촉 하더라. 꽤 오래 이야기를 하길래 더 접근해보려 했는데 본능적으로 위험하다 싶더라고. 하지만 대충 느끼기에는 처음엔 그 남자가 언성을 높이며 뭔가 따지는 듯 하더니 시간이 지나니까 나중에는 서로 말을 잘 맞추고 헤어졌다는 느낌이랄까? 이게 전부야.”
난 솔직히 꽤나 놀랐다. 이 여자 하는 짓과는 달리 굉장히 능력이 있구나. 다크문 헬리오스의 어쌔신들의 이목을 피해 이 정도로까지 정보를 캐내다니. 아주 확실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전후사정을 아는 나한텐 충분하다.
추측컨대 그 남자는 제르만.. 아니면 그쪽 세력의 일당. 처음에 의견이 불일치 된 건 분명히 예전에 제르만이 전달한 편지나 혹은 기타 무엇인가가 나 때문에 증발해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겠지.
그렇다면 내 추측대로 공주를 축제에 도착하기전 처리하려고 했던 계획이 무산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군. 그러나 결국 축제기간 중을 노리고 뭔가 합의점을 보았다는 것인데.. 역시 축제가 조용히 끝나지는 않을 모양이다.
게다가 그녀의 말에 따르면 어쌔신은 최소 둘 이상, 공주가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해 습격할 틈만 있다면 절대로 무사하지 못한다.
그러니 문제는 과연 상당한 강대국인 로세하이안 왕국의 제1왕녀라는 거물을 암살하고도 어떤 식으로 그 일을 덮느냐 하는 것. 무슨 수가 있을까? 난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하면서 그들을 향해 물었다.
“..당신들이 찾는 물건이란게, 이곳 피아이란의 성안에 있나보군요?”
그러니 소란이 일어나길 바라는 거겠지. 그리고 애초에 번잡한 축제기간에 이곳에 들른 것일 테고. 란돌은 자신들의 일이 밝혀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으나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렇게 되면 이들은 적어도 이번 일에선 전적으로 믿을 수 있다. 직접적으론 사건과 아무런 관계도 없이 그저 우연히 시기가 맞게 피아이안의 성으로 숨어들려고 하는 것 뿐이니까.
이런 상황에선 이렇게 아예 무관하게 움직이는 쪽이 오히려 아군 같은 쪽보다 더 믿을만한 것이다.
“소란이 일어날 것 같긴 하지만, 다음 기회를 노려보시죠?”
“뭐? 어째서?”
“당신이 본 ‘검은 것’ 이 다크문 헬리오스라면 납득이 되나요?”
“다, 다크문 헬리오스!?”
세실리아의 뻔뻔하리만큼 당당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렸다. 그도 그럴 것이다. 다크문 헬리오스가 관련된 일에 공연히 어떤 식으로든 관여됐다간 좋을 꼴을 볼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이미 엄청난 위험 속에 발을 담궜다 뺀 마당이다. 심지어는 그 무뚝뚝하던 란돌마저도 약간 당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너 죽으려고 작정했구나? 다크문 헬리오스한테 쫓기고 있었던 거야?”
“아니, 쫓기고 있는 건 내가 아니고 공주죠.”
“..공주를 노린단 말이야? 이거, 단순히 소란정도의 문제가 아니잖아! 잠깐, 그럼 너.. 혹시 로얄가드? 아니면 혹시 왕실의 직속 친위대?”
순식간에 엄청 출세했군 나도. 훗, 하지만 애초에 저 정도쯤 되지 않는 한 이곳에서 내가 뭐하고 있는 놈인가 설명이 되려나? 그냥 공주랑 한번 만났는데 맘에 걸려서 도와주려 한다고? 차마 그렇게 말할 순 없어서 난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글쎄 그건 아닌데, 뭐 일단 비밀이라고 해둘게요.”
아직까지 내 목숨 걸어가며 도와주려고 마음을 정한 것도 아니고. 쳇. 대체 근데 진짜 이도저도 아니면서 난 뭐 이리 신경을 쓰고 있는 건가 싶다.
어쨌든 자기네 목적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수상쩍은 나를 좀 캐내보려던 것이 공주암살이라는 사태로 커져버리자 세실리아는 굉장히 당황해 하고 있었다.
하기야 공주 암살건 같은 얘기를 듣고도 태평하게 축제나 즐기거나 자기 할 일이나 계속하는 바보가 어디.. 흠.. 이건 취소.
“로세하이안의 왕녀를 암살한다는 것은 아무리 다크문이라도 뒷감당하기 힘들 텐데.”
급속도로 전개되는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고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확실히 내용은 파악하고 있었는지 란돌이 내가 생각한 핵심을 짚었다. 이 남잔 뭐든 각설하고 핵심을 짚는데 재주가 있군.
“그러니 분명 뭔가 큰 소란을 일으키고, 그 틈에 공주를 암살자로 슥삭 하고는 입을 씻으려 하겠죠. 뭐든지 간에 그 소란 중에 공주가 사고로 죽을만한 상황이어야 하는데 대체 그게 뭘 지는 모르겠네요.”
난 그렇게 상황을 정리해 주고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쳇, 대체 뭔 일이 벌어져야 그런 상황이 될 수 있는 거냐? 드래곤이라도 도시를 습격해야하나?
“음.. 몬스터가 떼를 지어 내성에 들이닥친다면?”
“쳇, 외성도 있고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몬스터가 무슨 재주로 내성까지 기어들어 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세실리아에게 그렇게 핀잔을 주자 그녀는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어찌됐던 내성을 습격하는 것 말고 뭐가 있어! 몬스터가 아니면 사람이라도.. 어라?”
“어라?”
나와 그녀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동시에 눈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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