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 계집애같은 소년 (5)
“..형, 당연히 귀족가에선 재산을 분산해 놓지요. 여타 상단이나 항만 혹은 특수한 물품의 생산지 등에 투자해두거나, 아니면 선박이나 다른 건물 혹은 토지 등으로 가지고 있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그런 외적인 재산을 제외하고 단순히 저택 내에 있는 재산만 노린다고 해도 사실상 힘들어요.”
“왜?”
“나 참, 저도 정말 이런 쪽으론 잘 모르는 편인데 형은 너무 심하군요. 당연히 저택 내에도 카페트, 고급직물, 항아리, 그림, 술잔 혹은 고대의 마법도구 등등. 고가의 골동품이나 예술품, 장식품 그리고 마법물품들로 재산이 나뉘어져 있겠죠. 귀족들이 심심해서 그런 걸 사 모으는게 아니에요. 그게 재산의 좋은 보관방법이기 때문이니까 사 모으는 거죠.”
그, 그렇군. 솔직히 거기까진 생각 못했다. 어느 정도는 당연한 것이 난 저런 재산 어쩌구 하는 문제와는 영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으니까. 하지만 듣고 있자니 몇 가지 의문점이 든다.
“그럼 그 물건들을 들고 나오면 되잖아. 그리고 아리센토 화(貨)는? 그런 재화는 내 생각대로 작은 자루 같은데 넣어서 보관할거 아니야.”
“어떻게 들고 나와요. 항아리나 그림 같은 걸 바리바리 싸들고 경비병들을 피할 수 있나요?”
“아.. 그렇군.”
“그리고 아리센토 주화라면 분명 값어치가 있지만, 사실상 시중에 그리 많이 유통되지 않잖아요. 형도 아시겠지만 이곳 그라이암 대륙의 모든 주화는 난쟁이들이 제작해서 각국에 제공하거든요.”
듣자니 하나하나 다 맞는 말이다. 특히 이곳 그라이암 대륙의 현재 통화인 아리센토, 아리멜, 아리크, 아린으로 구분되는 동전은 모두 대륙북서부지역의 난쟁이들이 제작하여 시중에 공급한다.
그들의 특수기술로 제작되기에 인간은 제작할 수 없고, 설령 기술이 있다하더라도 난쟁이들의 광산에서만 구할 수 있는 특수 광물을 사용하기에 그들 외에는 아무도 제작할 수가 없다.
이는 암흑기를 종식시킨 대영웅 ‘하이델’ 이 통합국가를 세우며 그를 도운 난쟁이들의 대장인 ‘루드모프 위레드’ 와의 협약에 의해 공식적으로 지정한 사안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하이델 황금왕이 후대의 학자들에게 칭송받는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이런 화폐를 비롯한 각종 도량형들에 대한 대륙통합을 실시했다는 점이다.
그가 범인을 뛰어넘는 혜안(慧眼)을 가지고 대륙국가의 만년대계를 닦았다고까지 평가되는 일인데..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메르장, 메르, 메릴 등의 길이단위. 그리고 타룬, 자룬, 가룬 등의 시간단위 등도 그때 정립되었다.
어쨌든 이 화폐통합은 그 이후로 오랜 대륙할거의 혼란기를 거치면서도 통화 공급 자체는 한 번도 크게 흔들린 적이 없었다. 즉 대륙의 암묵적이면서도 절대적인 규칙과도 같은 것으로 유지되어 왔다는 소리다.
물론 이는 난쟁이들이 대륙의 재화를 쥐고 있으면서도 결코 그것을 사익으로 이용하지 않는 긍지를 가진 종족이며, 또한 천 년 전의 약속조차 대를 이어 지키는 신의 있는 종족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아리센토화는 그 중에서도 극도로 정밀한 제작과정과 또 다른 희귀 금속을 쓴다고 해서, 사실 다른 주화들에 비해 매우 적은 량만 공급되어 있어요. 아무리 대귀족이라해도 아리센토화를 다량 보유해서 모아두는 사람은 없을 걸요? 차라리 그 전시대의 화폐인 금, 은, 동화를 모아두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그건 무게가 엄청나잖아요. 아무리 형이라고 해도 금덩어리 몇 개 혹은 몇 십 개 무게를 몸에 품고 제대로 이 도시를 탈출할 수 있어요?”
음.. 결국 부피와 무게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따른다 이거로군. 제길, 그걸 생각 못했다. 그냥 들어가서 가져나올 생각만 했지.. 나도 너무 소설책을 많이 읽었나봐.
“으윽.. 보석류는 어때? 작고 가볍잖아.”
난 그래도 지지 않고 다시 한 번 물었지만, 이번에도 소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결국 그림이나 골동품을 들고 나오는 것과 같아요. 그런 보석류도 감정서가 있어야 하죠. 물론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고 블랙마켓에 장물로 내놓거나 한다면 모르겠지만, 블드얀 백작가 같은 중앙귀족이 도둑질을 당해 털린 물품이라면 운이 없으면 루트를 추적당해 전 대륙에 수배령이 내릴걸요. 혹시 백프로 신뢰할만한 장물 처분 루트라도 있으세요? 잡혀서 고문당해도 형의 인상착의나 정체를 밝히지 않을만한?”
“......”
그런게 있을 리가 없지. 난 할 말이 없어서 입을 꾹 다물었지만 그 걸로도 끝이 아니었다.
“또 설사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한다고 해도 어디 그런 걸 가지고 나오는 건 쉽나요. 차라리 장식품들이라면 몰라도.. 블드얀 가문쯤 되면 그런 보석류처럼 재화가 압축된 물품은 난쟁이나 도깨비의 기술력이 동원된 금고 같은데 보관하고 있을게 뻔한데. 그런 금고 딸 줄 아세요? 혹은 금고를 예리하게 잘라낼 만한 강력한 마법무기라도 있나요?”
“......”
그, 그런게 있을 리 없지. 난 깊은 한숨을 쉬며 언제나처럼 등에 매여져있는 창을 슬쩍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게 보통 무기는 아닌 것 같지만, 적어도 예리함이나 강도 등 무기자체로써의 성능은 별 대단한 것이 없다.
물론, 요정의 야장이 만든 이정도 수준의 명창(名槍)을 대단하지 않다고 하는 건 너무 호강에 겨운 소리가 될 테지만, 그건 적어도 일반적인 무기 수준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사히 숨어들고 무사히 빠져나온단 전제하에라도, 도둑이 혼자 들어가서 가지고 나올만한 뒤끝 없는 물건은 기껏해야 아리센토화와 아리멜화 같은 주화들 정도라는 거군. 게다가 아리센토화는 많지도 않을듯하고 말이야.”
난 종합된 정보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해보곤 맥없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소년은 잘 정리했다는 듯이 싱글거리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화라.. 그것만으로도 큰돈이라면 큰돈이겠지만, 그 정도에 목숨과 인생을 걸 도둑은 없을 테지.
사실 애초에 일단 중앙귀족의 저택에 무사히 들어갔다 나올만한 실력이 있는 도둑도 거의 없을 테고, 또 그런 실력이 있다면 차라리 좀 더 안전한 곳을 터는 편이 나을 테니까.
제길, 이거 도둑질도 말처럼 간단한게 아니구나! 난 저택에 숨어들고 빠져나오는 거나 고민했는데, 설마 이런 중요한 문제점들이 있을 줄이야.
“그럼 포기하실 거죠? 저기, 형. 그런 것 보다는..”
“포기는 무슨. 난 그대로 할 건데.”
“......”
무언가 말하려고 하던 소년이 입을 꾹 다물며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벙찐 표정은 마치 ‘아니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라고 외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저기, 제 말을 이해는 하신 거 맞아요?”
“응. 덕분에 잘 모르던 부분들을 알았다. 고마워. 근데 넌 꼬마가 참 아는 것도 많고 똑똑하구나. 참 잘했어요.”
난 피식거리고 웃으며 소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어려운건 어려운거고, 힘든 건 힘든 거고, 뒷일이 걱정 되는 건 걱정 되는 거고. 그리고 그래도 하는 건 하는 거지.
“우.. 꼬마가 아니라니까요.”
소년은 투덜거리듯 말하면서도 내 손을 피하거나 떨쳐내진 않았다. 정말 특이한 애로군. 귀족인건 분명한데 이렇게 소박하고 예의가 바르다니.
사실 처음엔 그냥 아직 어려서 철이 없어서 그런가보나 했는데, 말하는걸 보니 나이에 비해 아는 것도 많고 계산도 빠른 것 같단 말이야. 즉, 귀족으로서 제대로 교육도 받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대충 아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지.
어쨌든 그 꼬맹이는 잠시 동안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뭔가 곰곰이 생각해보는 듯하더니 질문했다.
“근데 대체 왜요? 형 정도 실력이면 그냥 길드에서 의뢰를 받아도 돈은 충분히 벌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얘 아까부터 ‘나 정도 실력이니’ ‘아무리 나라도’ 이런 식으로 많이 말하던데. 쪼그만게 뭘 안다고.
음, 하지만 또 생각해보니 저 정도로 박식하게 교육을 받은 명문 귀족가 자재라면 의당 무술도 어느 정도 체계적으로 배웠을지도 모르겠다.
“글쎄다. 그냥 도둑질이 하고 싶더라고.”
내 어느 정도는 솔직한 대답에 소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기야, 털어봤자 이익은 적고 인생 종칠지도 모르는 위험은 많은 도둑질을 하려는 초보 도둑이라니. 당연히 이해가 안 되겠지.
“자, 꼬마야. 난 가볼 테니 오늘일은 못 들은 걸로 해라.”
“진짜 하시려고요? 형, 한 번 더 생각해보세요. 이건 아무리 봐도 바보짓이에요. 무모하다고요.”
당황한 기색으로 말리는 소년에게 난 씨익 웃어 보였다.
“어제 하루 종일 탐사해서 지리도 다 외웠어. 도면으로 슥삭 그려질 정도니 빠삭하지. 문제없어.”
“제가 경비대에 신고하면요?”
..그럼 좀 문제가 되겠군. 음, 솔직히 요 꼬맹이의 말을 경비대가 믿어 줄 것 같지가 않다.
웬 낯선 여행자랑 둘이서 블드얀 백작가를 터는 일에 대해서 상의했다고? 내가 경비대라도 그런 제보는 웃어넘길 거 같은데.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 꼬마가 분명히 꽤 높은 귀족의 자제일거라는 점이 문제다. 똑같은 어린 소년이라도 명문 귀족가 자제의 신고라면 경비대도 가볍게 넘길 순 없을지도.
아, 제길. 아직 어린애고 워낙 호의적으로 친근하게 굴어서 가볍게 말한 건데 말이야. 이렇게 사리분별이 밝은 꼬마인 줄은 몰랐다. 생각해보니 문제로군. 이 녀석을 어쩐다.
“신고 안 해주면 안 되냐?”
“..도둑질인데 어떻게 신고를 안 해요.”
“그럼 할 수 없지. 목격자를 없앨 수밖에.”
나는 겁을 주기위해 낮게 목소리를 깔며 말했지만, 소년은 여전히 똘망똘망한 눈으로 날 바라볼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쭈? 난 눈을 부릅뜨며 험악하게 노려보기까지 했지만, 소년은 원래 겁이 없는 건지 아니면 내 말을 이해를 못했는지 조금도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에라, 관두자. 쳇, 내가 그렇게 박력이 없나? 요런 꼬마도 겁먹지 않을만큼?
“야, 니가 이러면 안 되지. 사탕도 사줬잖아.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지금 넌 나한테 도둑질 어드바이스를 해준 거라고. 공범이야, 공범.”
“아,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요..”
전략을 바꾼 내가 설득조로 말하자 소년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훗, 역시 그래봤자 어린애. 잘 구슬려서 설득하면..
“좋아요. 대신 저도 조건이 있어요.”
넘어왔다. 난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소년을 재촉했다. 사탕이냐? 아니면 무술이라도 가르쳐 달란 거냐? 귀찮긴 해도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지.
“하하하하, 뭐든 말만해.”
“그러면 제가 입을 다무는 대신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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