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요정의 숲 (1)
그것은 전부해서 여덟 명의 사내였는데 하나같이 건장한 체격에 상당한 무장들을 갖추고 있었다. 제각각이긴 했지만 갑옷들도 적당히 입고 있고, 무장 상태도 좋아보인다.
용병들인가? 이틀 동안 사람 여럿을 길에서 지나치긴 했지만 개중에선 가장 개성 있는 그룹이라 눈길이 간다. 무슨 개성이냐고? 좀 흉악해 보이는 그룹이라고 해야겠다. 솔직히 이런 산길에서 마주치긴 영 싫은 타입이다
그들도 곧 나를 발견했는지 잠시 날 흥미롭게 바라보며 수근수근 거렸지만 별다른 무기도 없이 등짐만 짊어지고 터벅터벅 걷고 있는 내게서 금세 신경을 끊는 모습이었다. 나도 별반 신경 쓸 이유는 없었기에 그저 걷기만 했고 곧 그들과 난 길 양 옆을 자연스레 스쳐지나가게 되었다.
“이건 끝내주는 돈벌이라니까.”
“돈벌이뿐이냐? 요정이라면 끝내주게 예쁠 것 아니냐. 잡아서 먼저.. 흐흐흐.”
“야, 적당히 해라. 귀족가 의뢴데 후환을 어쩌려고?”
“어차피 도망친 년이라는데 무슨 상관이야.”
자기들끼리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지나가는 무리들. 지금껏 생각하고 있던 ‘돈벌이’ 라는 단어와, 무엇보다도 ‘요정’ 이라는 단어에 귀가 번쩍 뜨이는 느낌이군. 난 괜한 시비가 붙고 싶지는 않았기에 못들은 척 그들로부터 좀 떨어지고 나서 슬쩍 길가에서 멈춰 섰다.
내가 청각이 좀 괜찮은 편이라서 집중만하면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저렇게 크게 떠드는 소리 정도는 충분히 들을 수 있다.
짧은, 그것도 주로 음담패설로 얼룩진 대화들이 이어졌지만 그들이 더 멀어지기 전에 상황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동부 영지의 어느 정신 나간 귀족이 요정 하나를 노예상으로부터 사들였는데 그 요정이 어찌어찌 도망을 쳤다. 그 도망친 요정은 운 좋게 어떤 선량한 모험가들을 만나 그들의 도움으로 함께 이곳 근처의 도시까지 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모험가들과 작별을 했다.
거기까진 참 좋은데, 너무 일찍 헤어진 것이 실수였던 모양이다. 요정노예 같은 귀한(?)것을 잃어버린 귀족이 이미 모든 수를 동원해 그녀를 쫓고 있다가 그 행적을 발견해낸 것이다.
그 요정은 분명히 서부 지역 산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는 자기들의 거주지로 갈 테고ㅡ 여기서 거기라면 사실 캬르한 산맥 때문에 여행 초짜인 내가 봐도 동선이 너무 뻔했다.
게다가 귀족이 건 엄청난 액수의 현상금 때문에 그들 말고도 상당한 수의 용병들이 이곳 근방을 샅샅이 뒤지고 있다고 한다.
“음..”
요정이라. 그야말로 남성들의 영원한 로망. 미와 예술과 자연의 종족. 하지만 사실 그런 요정에도 꽤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그야말로 악 그 자체에, 흔히 생각하는 요정이라는 선입관과는 정반대인 검은 뿔 요정과 극히 폐쇄적이며 자기중심적인 긍지의 종족인 흰 초롱 요정, 자연 속에 묻혀 평생을 살아가는 드루이드들의 종족인 초록 뿌리 요정, 그리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요정인ㅡ 사실 요정 중엔 가장 흔한 푸른 날개 요정 종족.
이 푸른 날개 요정은 예로부터 인간들과 상당한 교류가 있었던 이들이다. 고대에 이름을 널리 알린 영웅들 중에 요정이거나 요정혼혈들도 상당히 많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 그들은 인간보다 월등히 긴 세월을 살며 거의 평생토록 뛰어난 미를 간직한다. 놀랍게도 이미 거의 실전되어버린 마법도 요정들 사이에서는 미약하나마 어느 정도 유지가 되고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언제부턴가 요정은 인간들에겐 욕망과 정복의 대상이 되었다. 힘은 예전보다 약해지고 교류도 뜸해졌으나 미모만은 간직하고 있는 평화로운 종족.
당연히 인간들의 탐욕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북방의 강국 크로아탄 제국을 필두로 몇몇 국가에선 이 요정들에 대한 노예제도를 금지하고 있으나 이곳 로세하이안은 그런 법이 없다.
물론 요정들은 여전히 현명하고 강한 종족이므로 결코 인간들에게 쉽게 잡히거나 하지 않고, 잡히더라도 자존심이 극도로 강해서 차라리 죽을지언정 굴복하지 않아 그들을 노예로 삼거나 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아니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거의 없단 것은 있긴 있단 소리인데 보통 세력 있는 귀족 가에서 암암리에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요정 여자를 괴롭히다니 용서할 수 없다. 암.”
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전의를 불살랐다. ‘여자’ 인 것이 중요하다. ‘여자’ 라면 일단 뭐가 됐든 구해내고 봤을 텐데 무려 요정이라니.
이런 천인공노할 놈들. 하늘이 용서해도 이 라샤크가 용서 못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요정 여인을 멋지게 구해내면.. 으헤, 으헤헤헷! 아니 이게 아니고.
음. 일단 따라가 보자. 난 계속해서 그 용병들을 뒤쫓아서 최대한 정보를 캐낸 후에 지도를 펼쳐놓고는 계산하기 시작했다.
미치지 않은 이상 캬르한 산맥으로 들어갈 리는 없다. 거기서 살던 놈이 할 말은 아니다만.. 어쨌든 결국 여기서 북쪽으론 어림없다. 동쪽과 남쪽도 그녀가 도망친 로세하이안의 도시들이 산재하므로 제외. 결국 서쪽인데.
서부 어딘가에 있다는 요정들이 산다는 ‘침묵의 숲’ 은 인간들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니 ㅡ정확히 말하면 살아서 나올 수 없단 표현이 맞겠지만ㅡ 아마 무조건 그쪽으로 최단코스를 잡겠지. 문제는 그 침묵의 숲이 어디 있는가 하는 건데.
굳이 다른 곳이 아닌 근처 베질이란 도시에서 일행들과 헤어지고 또 거기서 여기까지 이동한 루트를 짐작해보면 사실 가려는 방향정도는 좁힐 수 있다.
큰일이군. 너무 알기 쉽게 움직이고 있어. 이래서야 돈과 욕망으로 눈이 돌아간 전문 용병들의 추적을 뿌리칠 수 없을 텐데.
“빨리 가야겠군.”
당당하게 걸음을 재촉하긴 하지만 사실 나한테도 문제는 좀 있다.
난 산악 이동의 전문가니 용병들보다 빠르게 움직일 자신도 있고 또 추적술과 탐색도 누구에게든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하지만 내가 금방 찾아낸다는 건 용병들도 그럴 수 있다는 의미.
내가 그 요정을 먼저 찾든 늦게 찾든 근방에 널린 용병들과의 충돌은 피할 수가 없다. 그들은 다수고 난 혼자. 먼저 찾고 나서 내가 우선이라고 우겨본들 그들이 ‘아 그래? 먼저 잡은 놈이 임자지’ 이러면서 양보할 가능성이 높을까 아니면 ‘저놈 죽이고 우리가 임자 되자’ 이럴 가능성이 높을까?
또 내가 늦게 찾는다면 내가 ‘그러지 말고 그 친구 놓아 주죠’ 라고 선의에 호소한다고 그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해줄까? 기대하기 어렵지.
결국 한바탕 싸움이 벌어질 텐데 난 무기도 없고 그들은 완전 무장한 상태다. 뭐.. 죽자고 싸우면 지지 않을 자신이야 있지만 요정을 보호해가며 싸우긴 불리하고, 무엇보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멋대로 용병들을 죽일 수 있겠는가. 그들 중에서도 가족들 먹여 살리려고 여기까지 쫓아온 자도 있을 수 있는데.
여러모로 내가 가봤자 상황이 명쾌해 질것 같지 않다는 찝찝한 예상 밖에는 되지 않지만.. 뭐 어쩌겠어? 미모의 요정 여인이 내 도움을 바라고 있는데. 후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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