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 구출의 로망 (5)
역시.. 오늘인가? 기척들이 뚜렷해지자 난 몸을 일으키며 조심스레 상황을 살폈다. 어느 샌가 내 눈에 보이는 내성으로의 큰길가에 굉장한 숫자의 무리들이 모여 있다. 손에는 내 예상 그대로 온갖 조악한 무기들을 집어든 채로. 가관이다.
딴엔 큰 전투를 준비한다고 나무로 대충 얼기설기 만든 갑옷이나 흉측하게 만들어진 도끼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애초에 저런 무장도로는 정규 군인들의 상대가 못된다.
음, 하지만 그래도 내성을 한쪽에서만 들이치려는 건 아닐 테니 실제 숫자는 정말 상당하겠군. 그들의 이동경로를 확인한 난 지붕에서 지붕으로 건너 띄며 내달려 그들을 앞질러서 큰길가에 내려섰다. 그들을 막을 마지막 기회다.
“누, 누가 있습니다!”
잠시 뒤 어둠 속에서 길가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날 발견했는지, 자기들 딴에는 조용하게ㅡ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너무 시끄럽게 내성을 향해 전진하고 있던 무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난 살짝 손을 들어 올려 보여 적의가 없음을 나타내고는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지휘자가 누구요?”
“모두 조용. 그대는 누구요? 왜 지휘자를 찾소?”
지금 자신들이 기습을 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잊었는지 소란스러워지려하는 좌중을 진정시키며 한 평범한 중년 사내가 앞으로 나선다. 그야말로 어느 시골 마을에나 몇 명은 있을법한 촌부다.
갑자기 나타나서 길을 막은 날 겁내고 있고, 또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 공포와 긴장으로 가득 찬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두 눈길만큼은 뜨겁게 빛나고 있음이 느껴진다.
“이번 일을 지금이라도 그만 두시죠. 이래봤자 당신들만 모두 도륙이 날 뿐이니까.”
다시 시끄러워 지려는 듯 웅성거리는 사람들. 허, 다들 제정신들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이 시점에서 이들이 이용당하고 있다는게 확실히 증명되었다.
무슨 대단히 은밀하게 내성까지 내달려 집결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끼리 공터에서 모여서 큰길을 따라 전진해오며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데도 아무도 저지하거나 눈치 채는 자가 없다니.
경비대가 이런 번잡한 축제기간 중에 편히 쉬고 있을 리가 없으며 또 내성을 지키는 병력이 모두 눈뜬 장님일리도 없으니 결국 배후세력이 의도적으로 이들의 어설픈 공격준비를 용인해주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쨌든 그 중년 사내는 나를 향한 욕설까지도 새어나오고 있는 무리들을 다시 진정시키려 노력하면서 말했다.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수는 없소. 다른 곳에서 형제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만 길에서 비켜나시구려.”
“..왜 자진해서 죽는걸 택하는 거죠?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요? 여길 점령할 수 있으리라 봐요? 에잇, 젠장. 누군가 내부에서 돕겠다고 했지? 당신들은 지금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난 화가 나서 그렇게 말을 한꺼번에 쏘아냈지만 그 중년사내는 그 정보를 듣고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침착하게 군중들을 이끌어서 길 한가운데 서있는 나를 무시하고 지나쳐서 내성문을 향해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어서 그들이 우르르 곁을 지나가는 꼴을 지켜보던 난 퍼뜩 정신을 차리고 군중들을 헤치고 뒤를 쫓아가 그 사내를 거칠게 잡아 세웠다.
“미쳤어요? 아저씨, 이용 당한다는게 무슨 의민지 몰라?”
그는 군중들을 계속해서 전진하게 지시하고는 나를 똑바로 돌아보았다. 그저 평범하고 소심하게 보이던 얼굴 위로, 뭔가 뜨거운 불길이 치솟고 있는 것 같다. 이제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두 눈은 무서우리만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잘 아네. 애초부터 알고 있었으니.”
“뭐...?”
“하지만 이용당하는걸 알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할 수 밖에 없어. 젊은이.”
지친 음성이었지만 일말의 흔들림 없이 대답하는 중년 사내를, 난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용당하는걸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짓을 했다고?
“..왜, 대체 왜? 당신들 다 죽을 거라고요! 아무것도 못해본 채. 모르겠어요? 복수인가요? 아끼던 가족이나 친구를 귀족들에게 억울하게 잃었나요? 재산을 뺏겼나요? 무시당했나요? 그래서 열 받아서 그냥 맨몸으로 달리는 전차라도 들이박고 자살하겠단 거예요? 하?!”
“분명히 난 귀족에게 내 아내와, 아들, 며느리, 그리고.. 손녀딸을 잃었네. 자네는 아는가? 작은 생쥐 같던 손녀딸이 귀족이란 작자의 아래에 깔려 절규하는 것을 지켜보는 기분을?”
사내의 말에 나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난 그들은 증오하네. 미치도록. 너무나도 증오스럽네. 너무나, 너무나도.. 그러나 그것 때문에 이런 일을 하지는 않네. 마음만은 간절하지만 말이야.”
“그럼, 대체 왜..?”
차마 말끝을 잇지 못하는 내게 중년 사내는 묵묵히, 그러나 마지막으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단호한 눈빛을 보여주고는 등을 돌려 계속해서 전진하고 있는 무리들 사이로 사라졌다.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어. 왜 다들 저렇게 죽으러 가는 거냔 말이야!
“제기랄! 다들 멈추란 말이야!”
난 멀어져가는 무리들을 향해 그렇게 고함을 지르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그들을 무력으로라도 붙잡기 위해 달려 나갔다. 아니, 달려 나가려고 했다. 누군가가 강인한 손을 내 어깨에 올리며 날 말리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최선을 다했소. 그러니 이제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 주는게 낫겠군.”
란돌. 어느 샌가 내 뒤에 선 그는 예의 무뚝뚝한 얼굴 위로 뭐라 딱 잡아 정의할 수 없는 묘한 슬픔을 머금은 채로 내게 조용히 말했다. 그 옆에선 세실리아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사람에겐 각자의 할 일이 있고 그에 대한 의지가 있네. 그들은 누군가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의지로 자신들이 할 일을 결정한 것으로 보이는군. 그렇다면 그것도 존중받아야 하겠지. 자네의 이 고결한 행위는 나같이 하찮은 사내조차 감복시키지만.. 이젠 자네는 자네가 할 일을 할 때야. 이것은 저들의 일. 그렇다면 자네가 할 일은 무엇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가?”
내가 할 일이라. 난 란돌의 얼굴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곧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래, 이것이 저들이 직접 선택한 일이고 이토록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그것을 막을 수도, 막을 필요도 없다.
난, 내가 할 일. 지금은 일단 내 마음이 가는대로, 공주를 구해낸다! 망설일 이유도,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냥 구해내고 싶으니까 구해내는 거다.
“..아무래도 나는 공주를 구하는 백마 탄 왕자가 되어야 겠군! 고맙소. 두 사람의 ‘할 일’ 도 잘 되기를.”
마침내 생각을 정리한 내가 자신만만하게 씨익 웃으며 작별인사를 하자 란돌도 피식 웃고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막 바로 돌아서서 급히 내성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는데, 세실리아가 그런 내 등에 대고 급하게 외친다.
“야, 그런데 너 이름이 뭐야? 다크문 헬리오스랑 싸우러가는 멍청이의 묘비 정도는 세워줘야지!”
이 여자가 아주 악담을 하는군. 그런데 내가 아직 자기소개도 안했나? 하긴.. 그럴 짬도 없긴 했지만.
“..난 라샤크! 누님, 다음부턴 정보 얻어낼 땐 칼로 하지 말고 그냥 하던 대로 해줘요!”
그러면 아마도 난 다 불어버릴 테니까. 등 뒤로 그녀가 경쾌하게 깔깔거리는 웃음을 터뜨리는 것을 들으며 나는 한층 더 박차를 가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별 볼일 없는 놈에 불과해 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적어도 여기서 공주가 죽게 놔두진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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