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 신경쓰이는 동행 (6)
“라샤크. 들어가도 될까?”
“예에, 들어오세요.”
방으로 들어서는 공주의 손에는 맥주 두 잔과 푸짐하게 먹을 만한 요리가 담긴 쟁반이 들려있었다. 허, 일국의 공주가 서빙을 하는 걸 받아보다니 내가 그렇게 출세했나?
좀 황당해서 그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그걸 익숙하지 못한 태도로 조심스레 탁자에 내려놓으며 공주가 설명했다.
“볼프강이란 분이 조금 전에 내게 갖다 줬어. 친절하더군. 의외로.”
사실 막 긴 밀항을 마친 차인데다가 또 밀항 중엔 요리도 할 수 없으니 거진 보존 식품들이나 배안에서 훔친 음식들로 끼니를 때웠기에 사실 우리 둘 다 매우 영양이 부실해진 상태다.
그래서 무엇보다 일단 짐만 풀면 식사부터 할 생각이었는데, 좀 전 일도 있고 또 공주가 워낙 튀다보니 불편할까봐 직접 식사를 가져다 준 모양이다. ..의외로 챙겨주는군. 친구인건 맞나봐.
“음, 잘됐네요. 그럼 먹죠.”
일단 목부터 축이고. 내가 거침없는 태도로 잔을 들고 먼저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키자 공주는 어째 좀 망설이는가 싶더니 나를 따라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이야, 이거 상당히 맛있는데?”
난 솔직히 감탄했다. 내가 술맛을 잘 알정도로 애주가는 아니지만 이건 정말 시원하고, 기본적으로 매우 잘 만들어진 맥주다. 가게 분위기나 주인의 행동거지로 봐서 맛 같은건 개판이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하긴, 오히려 주인이 이런 식인데도 술집이 손님으로 가득한걸 보면 다른 장점이 있단 소리겠지.
“그래?”
공주는 왠지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난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식사로 관심을 돌렸다. 맛있다! 그가 직접 요리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요리사가 실력이 대단한가보군! 난 허겁지겁 식사를 하며 연신 맥주를 들이키다가, 마침내는 1층에 내려가 맥주를 두 잔 더 받아오기까지 했다.
“아, 배부르네. 잘 먹었죠?”
“..아, 으응..”
어라? 정신없이 식사를 마친 나는 기분 좋게 물었다가 공주의 기운 없는 대답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공주는 식사 내내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어디 아파요?”
“아, 아니이.. 저언혀.”
...아픈게 아니라 취한 거였군. 아니 대체 뭘 먹었다고? 맥주 두잔 마셨다고 취해? 난 어이가 없어서 이 사람이 장난치나~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공주는 정말로 취한 것 같다.
사실 처음에 좀 망설이는걸 보곤 공주다보니 서민적이기 짝이 없는 맥주가 입맛에 안 맞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공주는 술을 전혀 못해서 망설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따로 마실 것도 없고 또 내가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며 연신 칭찬을 하자 그냥 따라서 마신 것 같은데.. 허, 아무리 그래도 맥주 두 잔에 취하는 건 너무 하잖아.
“라샤아크.”
목소리가 축축 늘어진다. 본인은 취했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꽤 노력하는 티가 나는데.. 이미 목소리부터 맛이 갔어. 공주. 그래도 난 차마 공주의 체면을 생각해 뭐라 하지 않고 그냥 모른 척 하기로 마음먹었다.
“네?”
“아아까저언 일, 말인데에..”
나도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던 일이라, 곧장 사과를 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공주가 나한테로 바싹 얼굴을 들이밀며 말을 잇는다.
“고오마웠어. 사아실, 그 남자가아.. 여길 건드려서어..너무 화아가 났거드은.”
이봐, 좀 떨어져. 공주는 어째선지 점점 더 다가와서 거의 내 코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대고 있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게다가 말하는 도중에 과도한 몸동작으로 그 남자가 어딜 건드렸는지 친절하게 알려주기까지 했다. 난 좀 당황해서 주춤거리며 물러서면서 대답했다.
“아니, 뭐.. 그 정도 가지고.”
“라샤아크가아 화아내줘서어.. 기분이이 좋더라아.. 왜애 그러얼까..”
그러면서 생긋 웃는다. 뭐야, 이 여자 왜 이렇게 귀엽지? 아 제길 안 돼 안 돼. 얜 원래 이렇지가 않다고. 지금 변장을 하고 있는 거란 말이야! 게다가 공주야! 왕자 같기까지 한.
난 스스로에게 외쳤지만 내가 물러나도 점점 더 다가오는 공주를 보며 굳어버렸다. 으.. 안 돼! 난 완전히 닿을 듯이 다가오는 공주의 얼굴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시간이 좀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살며시 눈을 떴다. 그러자..
“..이봐요? 공주님? 아니 아가씨?”
내게 상체를 내밀며 다가오던 그대로 바닥에 픽 쓰러져 있는 공주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 보았지만, 그녀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게 다가왔다기보다는 중심을 못 잡고 앞으로 쓰러진 것 같다.
허, 아예 술 취했다고 바로 기절을..? 난 기가 막혀서 깊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이 일 끝날 때까진 절대로 술은 못 먹게 해야겠군. 난 그녀를 들쳐 업고 방으로 옮겨준 후에 돌아와 처량하게 창가를 내다보며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아, 젠장 그 마당에 눈을 감은 난 뭐지? 으으..
뒤숭숭하게 밤을 보내긴 했지만 버릇대로 아침 일찍 일어나서 뒷마당에서 가볍게 근력운동을 하고 있던 나는 물론, 공주 역시 천성 기사여서 그런지 매우 이른 시간에 준비를 마치고 나왔기에 아침 해가 갓 떠올랐을 때쯤엔 우린 함께 볼프강의 가게를 나설 수 있었다.
당연히 목표는 정보 수집이다. 어디까지나 우린 지금 다크문 헬리오스를 찾아야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까.
“라사크, 혹시 어제 내가 뭔가 실수 하진 않았어?”
“예에, 그냥 픽 쓰러져서 놀랐을 뿐이니, 다음부턴 못 먹는건 못 먹는다고 말을 해요.”
다행히 숙취는 없는지 멀쩡하지만, 어젯밤 술을 마신 후부터는 기억이 없다며 그렇게 묻는 공주에게 대충 대답하자 그녀는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공주는 여전히 가발을 이용해 변장을 하고 있기는 해도, 어제까지와는 달리 매우 활동적인 차림으로 바지와 셔츠를 차려입고 있다.
거기에 위험을 대비해 허리춤엔 그녀의 롱소드도 차고 있었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웬 귀족가 아가씨가 허리춤에 귀여운 무장을 한 채로 놀러 나온 정도(?)로 봐줄만 했기에 정보 수집을 하러 돌아다니기에 딱히 나쁠 건 없었다. 언제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무장을 안 하고 다닐 수도 없는 일이니까.
“그런데 딱히 정보를 모을만한 곳이 있을까요?”
일단 우리 목적이 한시가 급한만큼 일찍부터 숙소를 박차고 나오긴 했지만 막막한 것은 변함없다.
사람들에게 ‘저기요, 다크문 헬리오스 본거지가 어딘지 아세요?’ 라고 물어보고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대충 소문이나 주워들어야 하는데 그것도 사실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난 혹시 공주는 뭔가 생각이 있나 싶었지만 돌아오는 공주의 답변도 별로 신통치가 않다.
“암살자 조직에 대한 걸 최대한 알아볼 수밖에. 먼저 길드들에 가볼 생각이야.”
확실히 전 대륙 곳곳에 지점을 가지고 굉장히 체계적으로 조직, 운영되고 있는 정식 길드들이라면 여러 가지 정보에 밝을 가능성이 높다.
대표적으로 의료 길드나 장인 길드, 그리고 상인 길드가 있는데 특히 상인 길드들, 그것도 이곳 챠펠린의 상인 길드들이라면 대륙에서 가장 정보의 유통이 많다고 봐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크문 헬리오스에 대한 정보가 뚝 떨어지길 기대하는 건 불가능한 일.
“상인 길드부터 시작해서.. 도둑 길드도 생각하고 있어.”
“도둑 길드? 거긴 빼는게 좋겠는데요.”
얼핏 보면 이런 종류의 일이라면 도둑 길드가 차라리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지만 결국 도둑 길드는 어떤 의미론 다크문 헬리오스와 동류의 단체다. 도움이 될 리가 없다.
도둑 길드 역시 암살 같은 청부업을 자주 하니까. 아니, 오히려 빈도나 횟수로만 따지면 정말 의뢰를 가려서 받는다는 다크문보다는 도둑 길드 쪽이 훨씬 암살자 집단이라 할 만 하겠지. 그 외에도 수많은 불법적 일들도 워낙 많이 관여하고 있어서 순수 암살자 집단으로 볼 수 없어서 그렇지만..
잠깐, 말하고 보니 도둑 길드가 다크문보다 더 나쁜 놈들이잖아? 다크문이야 원체 암살자 집단으로 악명이 높긴 해도 사실 순수하게 암살기술과 전투를 연마하는 무력집단 쪽에 더 가깝다고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흩어져서 정보를 수집하는게 빠를 것 같아. 길드가 한둘도 아니고.”
뭐라고? 다크문에 대해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을 찰나 이어진 공주의 말을 듣고 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정신인가?
“안돼요. 같이 있어도 위험한 판국인데.”
당연히 단번에 딱 잘라 거절해버렸다. 물론, 둘로 흩어져서 정보를 수집하는게 당연히 효율적이지만 공주와 나는 모두 각각 다크문의 표적이 되어있는 상황.
나야.. 솔직히 말하면 따로 다니는 편이 낫지만 공주는 내가 보기에 다크문의 추적을 피할 능력이 안 된다.
실력 자체야 공주도 상당하다지만 애초에 기사로써의 순수한 수련을 닦아 실력을 쌓은 그녀는 어쌔신들의 무자비한 살인기술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다.
예전에도 말했듯이 그들은 적어도 암살 대상을 공격할 때엔 서로의 기량을 겨루는 전투나 대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살인’ 만을 한다.
“..알았어.”
아, 자존심이 좀 상했나? 공주가 조용하게 대답하자 좀 미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좀 상하더라도 허무하게 죽는 것보단 낫지.
내가 보기에도 당장 하루 이틀 사이에 다크문이 공격해오거나 하진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주의해서 나쁠 것은 없다. 게다가 어제 선원들의 일로 증명되었듯, 공주는 현재 외양 자체가 너무 괜스런 사고에 휘말려들기가 쉽다.
그 뒤를 상당히 체격도 좋고 무장도 하고 있는 내가 쫓아다니고 있기에 어중이떠중이들은 건드리지 못하는 거지.
“조급해 하지 말고 일단은 운이 따르길 빌어보죠.”
내가 씨익 웃어 보이며 말하고는 일부로 기운차게 발걸음을 하자 공주도 옆에서 차분하게 웃어보였다. 일단 상인 길드들인가? 까짓 것 혹시 아나? 단번에 다크문에 대해 알수 있을만한 정보가 튀어나올지?
뭐.. 다크문 본부가 여기요~ 이런 정보는 물론 아니더라도 다크문의 조직원이라든지, 혹은 다크문이라더라도 식량은 공급받는 선이 있을 테니 그런 쪽 이야기라든지 얼마든지 꼬리를 잡을만한 건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 낙천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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