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 구출의 로망 (1)
눈 돌아가는군. 스스로에게 늘 산골촌놈, 산골촌놈 하기는 했지만 정말 난 완전한 촌놈이었다는 걸 피아이란에 들어와 보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로세하이안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서부 최대의 도시 피아이란은 지금껏 내가 봐온 시골 마을이나 작은 도시들과는 그 수준 자체가 달랐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규모의 외성벽으로 둘러싸인 피아이란에 들어서는 순간 내 눈앞에는 그야말로 별천지가 펼쳐진 것이다. 물론 3~5년에 한번 열린다는 초대규모의 축제가 있는 탓이 크겠지만 도시 안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활력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수도 없이 눈앞을 지나가는 세련된 복장의 사람들, 길가에 잔뜩 열린 각종 화려한 상점이나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큰 길들 등등.
정말 대단하다. 이런게 바로 ‘대도시’ 란 거구나. 숙소 잡는 것도 잊고 우선 발이가는대로 돌아다녀 봤지만, 보이자니 몽땅 사보고 싶을 정도로 새롭고 세련된 물건들이요, 눈에 보이느리 수더분한 시골 마을 여인내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화사한 여인내들이다.
음, 뭐 그건 내 눈이 좀 편중 되서 그쪽에 간 덕분이지만. 아무튼 정말 좋다. 아직 축제가 정식으로 개막되기 하루 전인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라니.
“이거 또 숙소 잡는 것부터 골치 아프겠는데?”
난 약간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일단 술집을 찾기로 했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픈데다 여관을 잡는 문제서부터 축제에 대한 일까지 정보를 얻기에 술집만큼 좋은 곳도 없으니까. 나는 약간 더 걸은 끝에 '저녁놀 술집' 이란 간판을 발견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 예상대로 사람이 상당히 많아서 구석가 조그마한 자리에야 앉을 수 있었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자그마한 체구의 여급이 바로 달려와 주문을 받는다.
“어서 오세요. 뭘로 드릴까요?”
“에일 한잔이랑 간단히 요기할 것 아무거나 좀 주세요. 그런데 근처에 여관 구할만한 데가 있을까요?”
“아~ 막 도착하셨군요? 그런데 아마 지금이라면 여관 구하시기가 힘드실 텐데요? 여관은 무리고, 축제 특수를 노리고 자기 집에 방을 임시 숙소로 제공하는 사람들도 있긴 한데 가격이 좀 세고 그것도 지금이라면 아마 많지 않을 거예요.”
사람이 많아서 매우 바쁜지 여급은 친절하지만 일방적으로 빠르게 말해버리고는 서둘러 다른 테이블로 옮겨갔다. 하긴, 이런 영업도 축제라서 한창 성수기겠군.
에라, 좀 찾아보고 정 못 구하면 할 수 없지. 사람 숫자나 축제 규모를 보니 분명 숙소가 없어서 노숙하는 사람도 미어터질 것 같은데.
난 그렇게 속편하게 포기해버리고는 한층 여유롭게 활기찬 술집 안 풍경을 둘러보며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다. 흠,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보니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꽤 색다른 재미가 있군.
저 우락부락한 남자들은 사냥꾼들이거나 용병들이거나 할테고, 벌써 거하게 취해계신 아저씬 딱 보니 근처 사는 사람이네.
오, 저 아가씬 꽤 미인인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음식을 먹던 그 여자가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쳤다. 내가 거의 반사적으로 씨익 웃으며 윙크를 하자 여자는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시선을 훽 돌렸다. 아, 큰일이야. 왜 여자만 보면 이러지 난?
좀 멋쩍어서 다시 사람들 관찰로 넘어갔는데 막 거의 정원 초과 상태인 술집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이 보였다. ..굉장하군. 난 좀 놀라서 그들에게로 주의를 집중했다.
한 명은 낡은 회색의 망토를 두른 짧은 흑발의 사내였는데, 망토 아래로 입은 가벼운 가죽옷 사이사이로 드러나는 근육이 보통이 아니다. 저건, 노동이나 무식하게 만들어낸 근육이 아니라 굉장히 체계적으로 단련된 것이 분명하다.
키도 나하고 비슷할 정도로 크고, 아무튼 척 보기에도 괜한 호승심이 일어날 만큼 내가 지금껏 본 인간들 중엔 가장 잘 단련된 전사로 보였다.
그리고 다른 한 명도 여자치고는 상당히 키가 큰 편이었는데 정리 안 된 부스스한 갈색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자연스레 늘어뜨린 채로 불량스럽게 팔짱을 끼곤 남자에게 뭐라고 따지고 있었다.
제법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이지만 눈매가 가늘고 뾰족해서 기가 매우 세 보이는 인상이다. 그리고.. 옷차림이 좀 야하군. 허벅지가 상당히 드러날 정도로 짧은 반바지에 위도 꽤 파인 옷이라서 몸매가 한눈에 들여다보인다.
그래서 매우 보기 좋다! 흠. 늘씬하면서도 풍만해야할 곳(?)은 상당히 풍만한 몸매에 무엇보다 이 여자도 잘 드러나 보이진 않지만 꽤 전신의 잔근육이 발달되어 있는 걸로 보아 평범한 길손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정말 이래도! 내가 봤단 말이야.”
여자는 좀 시끄러운 목소리로 따지듯이 말하며 남자의 동의를 구하려 하는 듯 했지만 남자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자리를 찾아 술집을 둘러보다가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음.. 남자의 시선이 나와 언제나처럼 내 등에 비스듬하게 매여 있는 창을 슥 훑어본다 싶더니 곧 여자에겐 뭐라 말도 없이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와, 걷는 것뿐인데도 상당히 박력이 있는 아저씨로군.
“미안하지만 자리가 없어 그러니 합석을 해도 괜찮겠소?”
“그러시죠.”
무뚝뚝한 생김새와 잘 어울리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난 가볍게 웃으며 자리를 좁혀 앉아주었고 사내는 망설임 없이 내 옆쪽 자리에 턱 하고 앉았다. 그러자 자기 말을 무시해서인지 좀 열이 받은 듯한 여인도 쿵쿵거리며 따라오더니 빈자리에 앉았다.
“너 자꾸 이럴래? 분명히..”
“조용히. 배고프니 주문부터 하고 얘기하지.”
남자는 단칼에 여자의 말을 끊고는 여급을 불러 나와 비슷하게 간결한 주문을 했다.
그러자 여인은 뭐라고 욕지거리를 하며 짜증을 좀 부리고는 그제야 내 쪽을 한번 흘긋 바라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난 와인 두 잔이랑 이 식당에서 제일 맛있는 식사로. 물론 계산은 이쪽 신사분이.”
“에, 나?”
“나 같은 미인이랑 같이 식사하는 대가죠.”
그렇게 자기 멋대로 결정을 내리고는 냉큼 방만하게 의자에 기댄다.
너무 당당하게 뻔뻔해서 어이가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내 시선이 그 좀 많이 파인 옷 사이로 굴러 가는걸 느끼며 헛기침을 했다.
“뭐, 그렇다면야. 헤헷.”
으으.. 결국 난 실없이 웃으며 승낙을 해버렸고 그 모습에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진 않았다.
꽤나 과묵한 성격인 모양이다. 아무튼 이 여자는 내가 같이 있는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고 다시 하던 이야기로 넘어갔다.
“어젯밤에 분명히 뭔가 지붕 위를 스리슬쩍 지나다니는 걸 봤다니까. 란돌. 수상한 냄새가 풀풀 풍기는 꼴이.. 사실 살짝 뒤를 쫓아가 봤는데 귀신같이 사라졌어.”
“..넌 왜 자꾸 우리랑 상관도 없는 일에 쓸데없이 끼어들려는 건가?”
란돌이라 불린 사내는 성가시다는 어조로 한숨 섞어 말했지만 여인은 도리어 언성을 높인다.
“우리랑 상관이 없는지 있는지 어떻게 알아? 쳇, 됐다 됐어. 너 같은 돌탱이한테 말하는 내가 바보지.”
“너처럼 사사건건 끼어들고 다니다간 공연히 일만 복잡해 진다.”
“......”
음.. 난 란돌이란 사내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깊은 자기반성을 했다. 나한테도 해당하는 말이었으니까.
괜한 호기심과 마음 씀씀이로 끼어들었다가 바로 몇 일전에도 큰일날뻔 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유우라를 구하거나 르미엘르 공주를 도와준 걸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음? 잠깐. 르미엘르 공주?
“저기, 그래서 그게 뭐였는데요?”
좀 신경쓰이는게 있어서 둘의 대화에 끼어들자 란돌은 날 흘긋 보더니 마침 잘됐다는 듯한 태도로 묵묵히 식사에 집중했다. 그리고 여인은 적어도 반응을 보이는 대화 상대가 생겨서인지 대번에 화색을 띄며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확히는 못 봤어. 어찌나 조용히 움직이던지 사실 알아챈 것도 우연이었거든. 하지만 뭔가 거무스름한게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더라고.”
“어느 쪽으로요?”
“글쎄, 일단 방향은 도시 중심부인 내성 쪽이었는데.”
다크문인가? 쳇.. 난 짜증이 나서 남은 맥주를 한 번에 벌컥벌컥 들이켜 버렸다. 예상대로 축제기간 동안 뭔 짓을 하긴 할 모양이군.
에이.. 뭐, 난 나름 경고도 해줬겠다, 알아서 잘 하겠지? 공주도 보통은 아니던데 말이야. 그런데 그런 날 흥미어린 눈초리로 바라보던 여인이 말했다.
“뭔가 알고 있구나?”
눈치가 빠르군. 난 실없이 웃어 보이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그 둘에게 양해를 구한 뒤 먼저 계산을 치르고 술집을 빠져나왔다.
아, 쓸데없는 짓 하지말자. 라샤크. 지금 넌 다크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몸 사려야 할 때라고. 난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며 숙소를 구하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호되게 값을 치르긴 했지만 일단 운이 좋게도 숙소를 구할 수 있었기에 간만에 편안한 휴식을 취한 나는 어제의 찜찜한 기분을 털어버리고 아침 일찍 시내로 나왔다.
오늘은 축제가 시작되는 날로, 아침 일찍 내성 부근의 거대한 규모의 공터에서 축제의 개회식이 대대적인 규모로 열린다.
이 축제는 왕자와 공주가 총 관리자를 맡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도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 개회식을 시작으로 해서 사흘 동안 낮에는 시내에서 각종 퍼레이드와 공연이 일어나고 밤에는 흥겨운 무도회와 파티, 그리고 야시장이 열려 도시를 대낮처럼 밝히게 된다고 할 정도다.
원래는 로세하이안 건국의 시조인 피아이란을 기리고 그 뜻을 잇기 위한 행사지만 근래에는 약간은 사람들의 유흥과 오락적인 측면으로 변질된 감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어쨌든 이 축제기간 만큼은 일반 평민들도 마음껏 흥취에 빠질 수 있고 농노들마저 국가에서 휴식 일을 인정하고 있기에 누구나 곧 열릴 개회식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이 화려한 축제의 뒷면에 도사리고 있는 모종의 음모를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쩝, 제발 내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나도 이런 축제는 꼭 마음편하게 즐기고 싶으니까 말이지.
“우와, 공주님이야!”
“정말이네! 저 황금 같은 머리카락 좀 봐.”
개회식장이 갑자기 소란스럽게 들끓기 시작해서 고개를 돌려 단상을 바라보니 그곳에 내가 만나본 일이 있는 르미엘르 공주와 왕자가 나란히 올라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공주는 역시나, 이런 날조차 예의 그 갑주를 입고 있었지만 투구는 벗어들고 사람들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일국의 공주라면 모름지기 화사한 드레스를 입는게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직접 보니 저 모습도 저 모습대로 무척 멋지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대신에 왕자는 기대대로 화려한 예복을 입고 있었는데 체격도 마르고 키도 공주보다도 작아서 갑주를 입은 공주에 비해 너무 외소해보였다.
대충 열다섯 쯤 되어 보이는 소년인데 전체적으로 귀여운 느낌을 주는 잘생긴 외모이긴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병약해 보이는 느낌이다.
물론 그 역시도 로세하이안 왕실의 상징인 금발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금빛이 아니었고, 또 바로 옆의 공주의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에 비하면 마치 색이 바랜 것처럼 보일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뭐랄까.. 상당히 대조적인데? 게다가 이곳에 모여든 백성들의 반응만 척 봐도 공주 쪽이 훨씬 대중들에게 인지도가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계승권은 전통적으로 왕자가 지는게 일반적이지만, 로세하이안의 역사에 여왕이 없는 것도 아니고.. 흠, 모르긴 해도 내부 문제는 좀 복잡하겠거니 싶다. 내가 다크문 건으로 너무 선입견을 가지고 봐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개회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사회를 보는 사람의 외침과 동시에 하늘 위에서 펑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갖은 색색깔이 연기 폭탄이 터졌다. 여러 화려한 색의 연기들이 하늘을 수놓는 것을 시작으로 왠지 모르게 염려스러운 피아이란 대축제가 시작되었다.
흐음, 불안하군. 불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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