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 여걸의 일면 (3)
똑똑. 문을 노크하자 안에서 르미엘르 공주의 무거운 대답이 들려왔다.
다크문의 조직원이 뒤늦게 가져다 준 식사의 일부를 양손 가득이 들고 있던 나는 조심스레 발로 문을 밀어 열었다. 공주는 그새 갑옷을 엄심갑 부분만 제외하고는 분리하여 벗어둔 상태로 일어서 있었다.
내게서 등을 돌린 채로. 음, 침대가 흐트러져 있는 모양새를 보니 조금 전까지 눕거나 엎드려 있었음이 분명하다. 자는 걸 깨운 건가?
“저기, 자더라도 일단 식사라도 하고 자는 편이.. 씻을 곳도 근처에 물이 흐르는 개울이 있다고 하네요.”
“......”
“피곤하겠지만 먹고 자는 거랑 굶고 자는 거랑 차이가 크니까. 입맛이 없어도 조금이라도 먹고 자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요. 식사는 뭐, 훌륭하진 않아도 그냥 먹을 만은 해요.”
역시 여전히 저기압인가? 난 여전히 묵묵히 등을 돌리고 서있는 그녀의 기색을 살피며 식사를 허름한 탁자위에 내려놓았다.
사과하려고 들어온 건데..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지? 아, 이것도 센더한테 물어보고 오는 건데! 내가 혼자 그런 후회를 하며 공연히 식기들을 달그락거리며 시간을 끌고 있으니 공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라샤크.”
“..네?”
“..미안해.”
공주는 내게 그렇게 사과하며 천천히 돌아섰는데, 나는 공주의 얼굴을 마주보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눈가에는 작은 물방울들이 선명히 맺혀 있었다. 르미엘르 공주가? 그 선머슴 같고, 저 다크문의 어쌔신들 앞에서조차 그토록 당당하던 그녀가 울고 있는 것인가? 이만한 일로?
“미안해.. 아무 설명도 없이, 아니 설령 했다고 하더라도 널 내 멋대로 이용했다는 건 변하지 않겠지. 할 말이 없어. 네가 나를 비난해도 당연해. 그래놓고는 너한테 괜한 짜증이나 내고..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왜 그렇게 화가 난건지. 그냥.. 미안해. 모두 내 잘못이야.”
“어, 저기..”
“우쭐해졌던게 분명해. 라샤크가 날 너무 도와주니까.. 위해주니까, 어느새 내 멋대로 내 편할 대로 생각한게 틀림없어. 우쭐해서는 마음껏 이용하면서도 정작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그런 당연한 일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미안해.. 너무.. 미안해. 내 잘못이야.”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동안 뺨을 타고 조금씩 흘러내린 물방울들이 결국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선에서 미끄러져 떨어져, 바닥위에 하나씩 하나씩 작은 원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난 몇 번이나 입을 열려고 했다가 다시 다물기를 반복하며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러는 도중에도 공주의 말을 계속해서 이어졌다.
“공주라는 직책, 여왕이 되려는 나.. 언제나 남들을 이용하고 짓밟아야만 하는 나. 그게, 그게 너무나도 싫은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조금씩 그것에 익숙해지는 내가 보여. 나도 모르게 자연히 누군가를, 랴샤크까지도 이용하게 됐어. 괴로워, 나도 모르게 내가 그렇게 되는게 괴로워..”
몸을 떠는 가운데서도 그동안, 어쩌면 평생 동안 숨겨왔을 지도 모르는 격정을 드러내는 그녀.. 내게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게 보였다. 소름이 끼치도록.
내가 아는 당당하고 멋진 르미엘르 공주와는 너무나도 다른, 가련하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르미엘르 공주가 그곳에 있었다. 자신만의 아픔을 모두 드러내놓고 슬퍼하고 있는 그녀가.
동생을 위해서, 그리고 국민을 위해 여왕이 되겠다던 공주. 그런데 어쩌면 정작 그 본인은 여왕이 되는 것 따위, 그런 수많은 이들의 목숨과 삶을 짊어져야 하는 직책 따위 맡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닐까? 적어도 마음 한편으론 그런 것 아닐까?
난 왠지 모르게 귀가 울렁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그녀에게 한걸음 다가선다. 그리고 울음을 참으며 떨고 있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서 끌어당겼다.
그녀는 앞으로 쓰러지듯이 반걸음 다가와, 내게 반쯤 안긴 상태로 얼굴을 내 가슴팍에 기대었다.
“라샤크..?”
그 상태에서 물기 젖은 눈으로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는 공주. 내 두 손은 어느새 그녀의 허리를 감싸 쥐려고 다가들고 있었지만, 바로 그 순간 난 제정신을 찾았다.
안 돼. 치졸한 짓이다! 내가 한때의 성질을 참지 못하고 화를 낸 것 때문에 울고 있는 여자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살며시 고개를 저은 나는 두 손을 다시 들어올려, 이제는 내게 완전히 상반신을 기대고 있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안고는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사과할 것 없어요. 공주 잘못이 아니니까. 네, 미리 말해주지 않아서 조금 서운했던 건 맞아요. 하지만.. 난 공주가 날 이용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화가 나서 그저 되는대로 내뱉었을 뿐이에요. 정말 진심은 아니었어요. 내가 할 일이었고, 지금 모든게 잘 되어가고 있지요. 이용이요? 난 하나도 손해 보지 않았고 오히려 득을 봤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이용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죠.”
“하지만..”
“됐어요. 그리고 공주가 변해간다니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죠? 본인들이 원해서 공주를 따르는 건데. 그리고 아니라고 해도 이용 조금 하는 것 따위 뭐 어때요? 나중에 그 이용한 사람들에게 지금의 저처럼 ‘아, 이용당하길 잘했다! 앞으로도 종종 이용해주세요!’ 라고 생각하게끔 해주면 되지 않나요? 그러니 제발 그렇게 자책하지 말아요. 자책할 필요도 없고 자꾸 이러면 내가 오히려 더 미안하게 되니까. 날 위해서라도.”
그렇게 말하고 난 공주를 천천히 제대로 일으켜 세워 주었다. 다시 나와 한걸음쯤 떨어지게 된 그녀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빙글 뒤로 돌아서서는 아무런 말없이 눈가를 닦기 시작했다.
생각나는 대로 말한 건데.. 역시 너무 말주변이 없었나. 나는 한숨을 좀 쉬고는 몇 걸음 물러섰다.
그토록 강건하고 빈틈없어 보이던 공주의 약한 면을 갑자기 들여다보게 되어버린 셈인지라, 나로서도 상당히 놀랐고 또 여러 가지로 충격적이었다.
내가 묵묵히 생각에 잠겨있으니 공주가 등을 보인채로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진정이 된 모양이다.
“..내 의도를 숨긴 건.. 그것이 너무 불확실한 추측이었기 때문이야.. 공작 측에서 정보를 그다지 캐낼 수 없었으니까.. 실제로 다크문의 상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도박적인 제안을 한 거였어. 사실.. 보다 확실해지면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데..”
“..그랬군요. 후우, 역시 내가 괜히 서운해 한거네요.”
“아니야. 처음부터 그냥 전부 생각을 터놓고 상의했어야 했어.”
공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 공주로써도 내게 자신의 추측에 불과한 것까지 전부 말할 이유가 없다. 내가 반대 입장이었어도 아마 괜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추측을 다 말해주었던들 내가 그것에 대해서 무엇을 했겠는가? 괜히 생각만 복잡해지고 결국 지금이랑 뭔가가 달라질 일은 없었을 테지.
오히려 그 정도 추측으로부터 상황을 지금 이 정도까지 이끌어온 공주에게 감사하고 경의를 표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됐어요. 내가 오해를 했고, 공주님은 오해하게 한 것을 사과했고, 나는 오해해서 화낸 것을 사과했으니 이제 된 거잖아요? 어, 그리고 저기.. 난 이런 상황은 영 어색해서. 아하하. 이제 괜찮은 거죠?”
침착을 되찾고 나면 원래 한없이 뻘쭘하고 어색한 것이 이런 서로간의 갈등과 오해를 푸는 과정인지라, 난 뒤통수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는 공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침내 적당히 눈물을 그쳤는지 공주도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더니 내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하지만..
“푸하하, 얼굴이.. 크헤헤헤! 얼굴이이...! 푸헤헤헤.”
“......”
난 눈물을 마구 닦아내느라 엉망이 된 공주의 얼굴을 손가락질하며 폭소를 터뜨렸다.
잠시 동안 그런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공주는 곧 아무런 말없이 날 문 밖으로 걷어차기라도 하듯 밀어내버리고는 면전에서 방문을 쾅 닫았다.
씩씩거리는 폼이 꽤나 화가 난 것 같군.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난 문 밖에 덩그러니 남겨지자마자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멈췄다.
..위험했다. 그녀가 순간적으로 너무 가깝게 다가왔다. 무방비하게, 마음과 마음의 거리가 너무나 가깝도록. 그래서 서툴기 짝이 없는 나는 이런 유치한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공주다. 그것도 여왕이 되려고 하는. 나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존재다. 머리가 더없이 좋고 사리판단도 좋지만 아직 세상물정에 순진한 면이 있는, 르미엘르 공주가 나 같은 자한테 무심코 마음을 열게 되는 건.. 차라리 비극이다.
지금처럼 심신이 약해진 틈을 타 그런 감정이 생기는 건 막아야 하는 것이다.
“......”
어쩌면, 어쩌면 그저 내가 겁이 나는 걸지도..
나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그녀의 방으로부터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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