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 탈출 동료 (4)
입구부분에서 볼일을 모두 마친 우리는 다시 처음에 우리가 자리 잡았던 곳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아이린과 던컨은 조용히 기절하듯 잠들어 있었고, 슈도 부적술이란 것을 쓰느라 지쳤는지 아이린 옆에 누워 금세 잠들었다.
비록 불은 피워 놓았다지만 동굴 바닥이 여간 찬게 아닌데.. 난 입고 있던 겉옷을 좀 털어낸 뒤 슈에게 덮어주고는 쉴 준비를 시작했다.
솔직히 나 역시 격한 전투를 거치고 쫓겨 온 마당이고 부상까지 당했었던만큼 휴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일단 급한 문제들을 확인하고 나자 피로감이 확 밀려오는 느낌이고.
난 오는 길에 최대한 긁어모아온 나무뿌리들을 내려놓고는 한쪽 구석에 편히 기대어 앉았다.
“정말 다행이에요. 라샤크씨 같은 분이 도와주고 계셔서.”
불 옆의 좋은 자리는 동료들에게 넘겨준 채 작은 불씨만 타오르고 있는 휴대용 등불 옆에 쭈그려 앉은 루치가 말을 걸어왔다.
흠, 이 라샤크씨 같은 분이라는 건 역시 칭찬이겠지? 난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꼼짝없이 갇힌 처지에 뭐가 다행일게 있나 싶은데.. 나는 같이 황천길을 갈 동료는 원하지 않아요.”
이제 어린 슈도 잠들었겠다, 상황은 암울하겠다. 꺼릴 것이 없는 내 솔직한 대꾸에도 루치는 그저 헤죽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답니다. 걱정 마세요. 우린 다 살아나갈 수 있을 거예요. 최고신 ‘아후라마즈다’ 와 빛과 평온의 신인 ‘이드’ 가 우릴 보살필 겁니다. 반드시요.”
“......”
해맑으면서도 확고한 신앙가인가, 이 사람은. ..참 좋은 사람 같지만 내 속이 배배꼬인 탓인지 그에 대한 불만과 의문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사람한테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어떤 면으로 보면, 오히려 악과 부패에 찌든 신앙가보단 철저한 믿음을 가진 신앙가가 더 위험할 수도 있는 법.
나는 별다른 내색 없이 아예 바닥에 드러누웠다.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려는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겠지.
“아, 그러고 보니 라샤크씨는 교황청에 대해 좀 아는 것 같던데요. 혹시 교황청에 관련되신 적이 있나요?”
..그다지 양식이 없는 모양이지? 짜증스레 머리를 긁적인 난 실실거리며 웃고 있는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저런 질문을 하면서도 전혀 의심하는 어투도 태도도 아니다. 뭐랄까.. 저렇게 나와 버리면 거리를 두고 대하기가 어렵단 말이지.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교황청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들리던데요.”
그래, 많이 들리지. 쳇.. 아무래도 난 센더 녀석의 영향을 너무 받아버린 모양이다. 조심한다고 해놓고도 말이 이렇게 시니컬하게 나오니..
“아아, 그렇군요. 왠지 많이 비판적으로 말씀하신다 싶었는데.. 무리도 아닙니다. 교황청이 많은 부분 잘못하고 있는게 분명하니 세간의 부정적인 평가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죠.”
루치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했다. 하? 교황청의 신관이란 사람이 저렇게 쉽게 인정해버려도 되나? 내 의아한 시선을 받은 루치는 빙글거리며 웃고는 말을 이었다.
“물론 이런 말은 신관으로서 해선 안 되는 말이죠. 아하하, 하지만 전 이미 내쳐진 것이나 다름없어서 말입니다. 그런 사소한 규칙보단 제 생각대로 행동하는 쪽이 편하더군요.”
“..루치, 내가 듣기로는 말입니다. 신성력을 소유한 이들은 매우 어려서부터나, 신성력을 갖게 된 순간부터 교황청의 철저한 감시.. 아니, 교육과 관리를 받게 된다고 알고 있거든요. 신성력을 가진 신관이 당신처럼 이렇게 떠돌아다니며 모험가를 자청하거나, 또 치유마법을 남발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나요?”
내 물음에 루치는 이채로운 눈빛을 띄우며 나를 바라보았다. 호기심으로 빛나는 청백색 눈동자. 나는 그 눈을 똑바로 마주하는 순간 왠지 기분이 불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굉장히 자세히 알고 계시는군요. 확실히 라샤크씨 말씀대로 신성력을 가진 이들은 대개 반강제적으로 이단심판회의 회원으로써의 교육을 받게 되지요. 모험가라..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아니, 저 말곤 아예 없을 거라는 말이 맞겠군요.”
“그럼 당신은 거의 유일한 예외인 셈이군요?”
내가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확인하듯 되묻자, 루치는 잠시 낄낄거리고 웃고는 나를 향해 말했다.
“아하하하, 라샤크씨는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는군요.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저와는 처음 만난분이고.. 저는 솔직히 라샤크씨가 무척 호감이 가거든요. 직접 보진 못했지만 강하실테고, 또 그 잉겔이란 사람의 건을 생각해보면 매우 좋으신 분이라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왜 저는 라샤크씨에게 밉보인 걸까요?”
“글쎄요.”
아마 내가 센더의 영향과 또 직접 겪은 일들 때문에 교황청이란 작자들을 싫어하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이 루치라는 사람은 그 이상으로 어딘가 모르게 거북한 것도 사실이다.
“음.. 라샤크씨는 종교에 회의적이시지요? 그것 때문이라고 보아도 될까요?”
“..뭐, 그럴 수도 있겠죠.”
“휴우, 그나마 다행이로군요. 라샤크씨.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분명 이 시대는 교황청의 권한이 너무 과도해지고 있으며 종교가 광신(狂信)적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황청이라고 해서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에요. 스스로 자정하려하는 올바른 신앙인들도 있답니다.”
음, 신앙인의 입장에서의 이야기인가.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내가 교황청에 들은 얘기는 대부분 센더나 술집 등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들을 통한 것이어서 객관성은 결여 돼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그에 대한 평가는 일절 하지 않았다. 뭐가 어찌됐든 그는 교황청의 성직자. 교황청에 반하는 이야기를 함부로 흘릴 정도로 난 바보가 아니다.
“..그래요?”
결코 속을 터놓지 않는 내 태도에 루치는 좀 안타까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자신도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는 한동안 조용히 뒤척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교황청을 옹호하거나 할 생각이 없어요. 잘못은 잘못이고, 저 역시 그 잘못에 대항하기보단 결국 겉도는 방관자에 불과하니까요. 그래도 라샤크씨가 저란 사람 자체를 싫어하거나 의심한다는 건 슬픕니다. 괜찮다면 잠들기 전에 제 이야기를 좀 해도 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루치는 히죽 웃어 보이더니 차분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의 본명은 ‘아루치 카릴라드’.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교황청은 기본적으로 고위 성직자의 혼인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 신을 향한 마음을 해하게 된다던가? 어쨌든 당연히 자식도 인정되지 않는다.
그런 상황이었지만 루치는 아버지의 희생과 고집에 의해 예외적으로 교황청에 자리 잡게 되었다. 아들로서의 공식적인 지위까지는 누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로인한 충분한 배려와 특혜를 받았다.
좋은 환경 속에서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신실하게 종교에 대한 것을 순응적으로 받아들였고, 성년이 되기 전에 ‘신의 선택’ 을 받았다는 신성력까지도 부여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신관으로서, 이단심판회의 회원으로서의 교육과정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교육은 루치가 생각하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마치 세뇌와도 같은ㅡ 철저한 신에 대한 순응과 어떠한 의문도 인정되지 않는 교육.
루치는 결국 그에 적응하지 못하고 낙오했다. 극도로 실망한 아버지는 루치와의 의절을 선언했고 그때부터 그는 교황청에서 겉도는 외톨이 신세가 되었다.
신성력은 갈수록 약해졌고, 말단 신관이 되어 많은 잡일과 격무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러던 중에 사건이 벌어졌다.
이단심판회가 이단으로 지정된 작은 마을을 ‘소거’ 하는 작업에 그가 처음으로 파견을 나가게 된 것. 그는 소문으로만 듣던 학살극에 큰 충격을 받았고, 마을사람들 중 일부와 함께 도망쳤다. 그러나 그것이 발각되어 루치는 교황청에 유폐되었다.
원래대로였다면 당연히 파문과 처단이 이어졌을 테지만 그는 미약하다지만 모든 것으로부터 면책권을 갖는 ‘신성력’ 을 가진 자였고, 또한 의절 당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임무를 하고 있는 아버지를 두고 있었다.
그 때문에 어정쩡한 처벌을 받고 교황청 안에서 하릴없이 지내는 신세가 되었는데, 루치는 도저히 그 생활을 버텨낼 수가 없었다.
교황청을 향해 잘못된 점을 지적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포교’ 라는 명목으로 교황청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택했다.
“쉽게 내보내 주던가요?”
“아하하, 전 교황청에서 낙오자이자 밥만 축내는 존재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아버지께서 손을 써준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의 답변대로, 루치는 신성력을 가진 신관으로써는 거의 유일하게 포교를 위한 여행을 허락 받았다.
물론 일 년 단위로 한 번씩 교황청에 들려야 하며 그 외의 제약도 많지만, 어쨌든 교황청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던 중에 아이린과 던컨, 슈의 모험에 끼어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뿐입니다. 그래서 아주 예외적인 케이스가 되었지요. 하하, 지금 하고 있는 짓도 전부 금지사항이지만 적어도 전 제가 맞는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고 있습니다.”
저런 꿀꿀한 이야기를 잘도 이렇게 가볍게 말하는군.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빙글거리며 웃고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라샤크씨. 세상 사람들이 교황청을 욕하고 비판하는 이유를 저는 압니다. 솔직히 저 역시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저는 평가할 수 없습니다. 교황청의 행위에 대해 잘못되었다곤 생각하지만.. 한편으론 이유가 있는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예, 저를 비난하셔도 됩니다. 마을을 학살하는 등의 일을 보고도 아직까지 이런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제가 한심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저는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저 제가 믿는 종교가 진실됨을, 그리고 그걸 행하는 제 자신의 태도가 옳기를 바랄뿐입니다.”
..어렵지만 그의 말이 이해가 된다. 루치 역시 지극히 선량하고 바른 성품을 가지고 있다.
다만, 라이센더 왕자와 그는 큰 불의를 보고 그에 대응하는 태도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센더는 그에 맞서 싸우기로 마음먹었고 루치는 아직까지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센더의 행동이 지극히 영웅적으로 내게 비추어졌다면, 루치의 행동은 소극적이고 심약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루치에 대해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나 역시 교황청에 맞서 싸우자는 센더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던가.
“교황청이라..”
이야기를 마치고는 이내 잠에 빠져든 듯 코를 골기 시작한 루치를 바라보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작아져가는 불을 향해 나무뿌리를 던져 넣고는 편안한 자세로 눅눅한 동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모르겠다. 센더와 루치. 어느 쪽이 옳을지. 나는 어떤 행동을 택할지. 이내 나 역시 깊은 수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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