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 조우 그리고 이별 (6)
센더와 나는 다크문의 본거지 근처에서 구한 말을 밤새도록 달려 챠펠린으로 향했다.
사실, 처음 이곳까지 오는 마차 안에서도 방향감각을 유지해 이동경로를 파악하고 있던 센더가 없었다면 그마저도 시간이 상당히 지체되었겠지만, 놀랍게도 그는 완벽하게 챠펠린까지의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허, 정말 왜 이렇게 같이 다니게 된 사람들이 하나같이 괴물들 뿐이지? 이건 마치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지.. 아냐! 이 사람들이 특이한거라고!
“..음? 왜 그러나? 하하하.”
센더는 내가 무섭게 말을 달리는 와중에 자신을 노려보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하하 웃었다.
속 편한 놈.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뒤처지지 않기 위해 말배를 더욱 강하게 박찼다.
제반느에게 먼저 출항하라고 일러놓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려서 운만 따라준다면 이대로 달려서 공주와 함께 이동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공주가 우리보다 엄청 일찍 출발한 것도 아니고, 또 배편을 구하는 일에 시간이 좀 소요될 테니까.
그런데.. 나야 늦지 않았다면 공주와 함께 배를 타고 로세하이안으로 가버리면 되겠지만 센더 이 녀석은 어쩔 생각인지 모르겠다.
나나 공주야 일단은 얼굴을 가려서 정체를 숨겼는데, 녀석은 이단심판회 측에 완전히 정체를 들켜버린 것이다.
물론 내가 아다치와, 그와 함께 움직인 3명의 성기사를 모두 쓰러뜨리긴 했지만 워낙 혼란통 이었던지라 그 이후의 모습을 본 자들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음, 솔직히 말하면 나도 약간 걱정이긴 하다. 무리를 하면서까지 끝까지 철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렇게 싸워댔으니.. 어느 정도 내 특징이 알려졌을 터.
하지만 나는 뭐, 교황청에 반대하거나 무슨 금지된 신을 믿거나, 상징물을 차용했거나 하지 않았기에 ‘이단’ 으로 공식지정하기엔 무리가 있겠지.
음? 그렇게 싸운게 반대한거 아니냐고? 훗,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지들이 무슨 수로 이단심판을 하겠는가. 신장 백팔십오 메릴 정도, 창을 쓰는, 철가면 쓴 남자를 잡으라고? 터무니없다.
그런 걸로 추적하는 건 제아무리 이단심판회라 해도 불가능하다. 게다가 그런 특징을 기억할만한 자도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아다치라면 나를 정통으로 마주칠 경우, 알아볼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그 말은 즉, 그놈만 안 마주치면 그걸로 만사해결이라는 소리다. 게다가 그놈. 어째 찝찝하긴 하지만 어쨌든 죽었지 않은가.
공주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아다치는 나와 센더 외엔 거의 관심도 없었던 데다가, 그 건물을 날려버릴 때 그 곳에 있던 자들이 대부분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혹여나 이단심판회가 살아남은 어쌔신을 잡아 고문을 하거나 해서 정보를 얻어낸다면, 그 살아남은 어쌔신이 모든 거래의 진행사실을 알고 있는 고위급의 어쌔신이라는 전제하에 공주의 제안이 누설될 확률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크문의 어쌔신들이 그리 쉽게 입을 열리도 없고ㅡ 무엇보다도 이단심판회는 이단심판을 하는데 있어서 ‘생존자’ 나 ‘포로’ 는 다루지 않는 자들이다.
왜? 그들의 교리에 따르면 ‘이단자’ 는 인간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도 아닌 자들을 잡아다가 무슨 사실을 캐내기 위한 고문을 하는 법은 없다. 뭐, 꼭 필요하다면 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이 과연 ‘누군가가 다크문에 들려서 마침 뭔가 협상 중이었다.’ 라고 생각하고는 그 협상사실을 밝혀내려 고문을 하겠는가? 절대 아니지.
하지만 센더는 그런 나나 공주와는 입장이 다르다.
그의 정체는 교황청이 너무나 잘 알고 있을 테고, 그가 교황청에 반대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나 같은 떠돌이도 아닌 무려 한 왕국의 왕자다. 암만 봐도 뒤끝이 만만찮을 텐데. 어쩔 셈이지?
“...이럇!”
묻고는 싶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다. 이단심판회의 상식을 파괴하는 이동속도를 이미 체험한 이상 쓸데없이 시간낭비를 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게다가.. 솔직히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이걸로 말에 타는게 딱 두 번째라는 것이다!
나는 제대로 승마를 한다기보다는 그저 말 등에 매달린 채로 힘으로만 말을 몰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렇게 기를 쓰고 달리는데도 여유 넘치게 말을 몰고 있는 센더보다도 자꾸만 뒤처지고 있다. ..대체 저 녀석은 못하는게 뭐냐? 쳇. 어쨌든 지금 센더와 이야기를 나눌 여유같은 건 없다. 으윽.
그대로 고통을 참으며 달린 끝에 우리는 아침 해가 이미 한참 떠올랐을 때쯤 챠펠린에 들어설 수 있었다.
도둑길드 놈들이 엄청나게 걸리긴 한다만은.. 이 급한 마당에 그런 잔챙이(?)들까지 신경 쓸 수는 없는 법.
이제 훤한 대낮이고 하니 최대한 빨리 떠나버리면 별 문제 없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한 나와 센더는 곧장 술집 볼프강으로 향했다.
“아저씨!”
거의 문을 부수듯이 열고 들어서자, 낯익은 술집의 풍경과 함께, 역시나 낯익은 산적.. 아니 볼프강의 모습도 보였다.
그는 의자에 앉아서 그 우락부락한 팔로 술잔을 구겨버릴 기세로 닦고 있다가 나를 보자 딱하고 손을 멈추더니 몸을 일으켰다. 난 숨넘어갈 듯한 기세로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공.. 아니, 아가씨 왔었어요?”
“그 여자애가 공주라는 거 안다. 이미 와서 전부 말했으니까.”
휴우.. 난 그의 대답에 일단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여기까지 무사히 왔구나!
시종일관 나를 괴롭혀오던 불안감이 깨끗이 날아가는 기분. 그 때문인지 격렬한 전투와 긴 승마로 극도로 지쳐있던 몸에도 순간적으로 활력이 돌았다.
내가 곧장 기운차게 테이블에 놓여있던 음식들을 멋대로 덥석덥석 집어먹으며 좀 더 설명해보라고 재촉하자 볼프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을 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쳐서는 공주의 권한이니, 아인도르프 녀석의 부탁이니 하면서 날 끌고 이리저리 다니더니 순식간에 배 한척을 계약해버리더구나. 귀찮게 구는 도둑길드 놈들도 날 내세워 설득하던데, 어찌나 혀가 잘 굴러가는지. 뭐라고 했는지 잘 기억도 안 난다.”
공주에 대해 혀를 내두르는 볼프강의 태도에 난 배를 잡으며 킬킬거리고 웃었다.
남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녀는 무려, 다크문 헬리오스의 본거지로 쳐들어가 ‘내 수하가 되라’ 라는 황당무쌍한 제안까지 성사시킨 공주다. 푸하하하. 그 정도가 뭐가 문제겠어?
“그럴 테죠. 그래서 출항했어요?”
“글쎄. 네놈을 기다린다고 내게 널 보면 알려달라고 했다만. 항구로 가봐라.”
그러면서 센더와 내게 맥주 한잔씩을 내밀어 주는 볼프강.
거칠고 시큰둥한 태도지만.. 미루어 짐작하건데 아마 르미엘르 공주에 대해서도 저런 태도로 이런저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오래 본 사이는 아니지만 참 고마운 사람이군.
물론 아인도르프 후작과의 친분이 바탕이 되기는 했지만 이것은 그가 뭔가 대가나 보답을 받으며 하는 일도 아닌 것이다.
난 목구멍이 트이는 느낌을 받으며 맥주를 시원하게 쭉 들이키고는 그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볼프강 아저씨. 나중에 반드시 신세 갚지요.”
“허! 됐으니 더 이상 귀찮게나 하지마라!”
우리는 그의 거친 배웅을 받으며 서둘러 항구로 향했다. 애초에 이곳 지리에 능숙한 센더의 인도를 따르자 정확하게 볼프강이 알려준 배가 정박되어 있다는 곳까지 바로 도착할 수 있었다.
어느 배지? 내가 두리번거리며 정박장을 걷고 있자니 옆쪽에서 두 사람이 다투고 있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낯이 익은 목소리.
“난 이대로 갈 수 없소. 그를 기다려야하오.”
공주로군. 그녀는 타협의 여지를 두지 않는 고집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냉랭하게 말하고 있었다.
나로선 그다지 들어 본적이 없는 말투다. 그러나 그에 대응해, 한층 더 냉랭한 목소리가 언성을 높인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공연한 일에 휘말리기 전에 출항해야 합니다.”
이건 당연히 제반느다. 신경이 날카로운지 일전보다도 더욱 사나운 목소리였지만, 그리엔이 직권으로 공주의 제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인지 말투가 존댓말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경의나 존중이라기보다는 단지 경칭만 억지로 덧붙이고 있는 느낌이 드는, 얼마 전까지의 제반느 그대로의 말투이기도 했다.
공주라면 몰라도 제반느의 저 목소리에 저 내용을 듣고도 반가울 지경이라니, 내가 정말 사지를 헤쳐 나오긴 했구나~하는 실감이 든다.
“난 이대로 가지 않소. 잊었소? 나뿐만 아니라 제반느 당신도 그 덕분에 빠져나온 것이오. 그런데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바로 그가 부탁한 일입니다. 공주님. 쓸데없는 고집을 부린다면 강제로 모실 수밖에 없습니다.”
“..무례하군! 할 수 있으면 해보시오. 그러나 내 검을 꺾어야 할 터!”
“정히 원하신다면.”
우와, 살벌하다. 한명은 침착함의 극한을 보여주던 공주, 다른 한명은 냉랭함의 극한을 보여주던 제반느인데도 이건 완전히 한바탕 칼부림이라도 날 기세잖아?
난 급히 배로 올라타는 연결로 앞에서 언쟁을 벌이고 있는 두 사람에게로 다가가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자, 진정들 해요. 날 사이에 두고 두 여자가 그렇게 싸우면 슬퍼. 이래서 인기인이란..”
“라샤크!”
공주와 제반느 둘 모두 놀라움이 가득한 눈으로 실실거리며 웃고 있는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공주가 나에게 달려들었다.
뭐, 뭐야! 난 깜짝 놀라서 움찔했지만 공주는 개의치 않고 그대로 날 와락 껴안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ㅡ 반가움의 뜻으로 껴안으려고 한것 같은데 체격차가 꽤 나는 덕분에 영락없이 나에게 안겨든 꼴이 되었다.
그녀는 현재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인지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기에 부드러운 살결이 별다른 여과 없이 전해져 온다. 으, 으음. 나, 나쁘지 않은데?
“..역시, 역시 약속을 지켰어.”
공주는 그 상태에서 내가 사라지기라도 할 듯이 옷가지를 꾸욱 움켜잡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많이 불안하게 했나보구나.. 난 멋쩍음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예전이라면 꽤나 의외라고 생각했겠지만, 이미 한번 공주의 숨겨진 연약한 모습을 본 나다. 그녀가 내 약속을 믿고 따로 탈출하고 나서 얼마나 불안해하고 내게 죄책감을 가졌을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순간, 센더가 내게 했던 ‘그녀에게 평생 씻지 못할 죄책감을 주게 될 텐데’ 라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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