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 가짜 의적과 진짜 맹수 (2)
“저어..”
“아, 신경 쓰지 말아요. 곧 나갈 거니까. 옷이나 입고 계시죠? 곧 병사들이 들이닥칠 텐데.”
“네, 그런데..”
무슨 할 말이 있나? 내가 고개를 갸웃하고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이불을 더 끌어당겨 몸을 가리며 말했다.
으음, 내가 진짜 그렇게 티 나게 쳐다봤나? 억, 억울하다! 몸매가 너무 좋은걸 어쩌란 말이냐(?).
“저쪽, 거울 뒤에 비밀 금고가 있어요. 열쇠는 백작님한테 있고요.”
응? 난 급히 그녀가 가리킨 쪽으로 가서 거울을 치워보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하지만 거울을 다시 제자리에 놓고 강하게 누르자 거울이 벽과 함께 빙글 돌아가더니 숨겨진 금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와, 진짜 정교하게 숨겨져 있었군.
나는 소년이 한쪽에 정리되어 있는 백작의 옷가지 속에서 집어다준 열쇠를 받아들면서 물었다.
“왜 이런 걸 알려주는 거죠?”
“..백작님한테 몸을 파는 년이지만.. 저도 좋아서 이러고 있는 건 아니에요. 차라리.. 아까 백작님의 제안을 당신이 받아들였다면 좋았을지도 모르죠.”
“......”
난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여인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모르긴 해도 그녀 역시 나름의 기구한 사연이 있었을 테지.
저런 미인의, 저런 말에 내가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이 상황에 그녀까지 데리고 탈출하긴 불가능하다.
게다가 할 수 있다 해도 나는 그녀를 계속 책임져 줄 수가 없다. 난 천상 떠돌이이고, 저런 가여운 여인을 보살필 능력이 없다.
..아, 결국 나도 정말 비겁자구나. 정의로운 척 해봤자 결국 눈앞의 딱한 여인 한명 책임질 수 없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나는 결국 정의의 사도 따윈 가당치않고 맘에 안 드는 놈 쥐어 패주는 역할이나 어울린 만한 녀석이다.
나는 떠날 테고 저 여인은 다시 백작의 첩으로 살겠지. 나로선 그걸 함부로 바꿀 수 없다. 게다가 그녀는 최소한 먹고살고 하는 데는 지장이 없지 않겠는가.
“......”
나는 말없이 금고를 열어서 안을 살폈다.
진열되어있는 휘황찬란한 보석들과 아리센토 주화가 담긴 작은 주머니, 금화가 담긴 주머니, 그리고 몇몇 복잡한 서류 꾸러미들이 눈에 들어온다.
일단 두개의 돈주머니들을 집어 들어 양 허리에 차자 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제야 비로소 범법자, 무법자, 도둑놈이 뭔가 훔쳐낼 때 이런 기분이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고 해야 할지. 솔직히 그다지 좋은 기분만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 돼지 백작 놈이 일어나서 텅 빈 금고를 보고 지을 표정을 생각하면 그리 나쁘지만도 않다.
이어서 나는 보석들을 죄다 쓸어서 창문으로 내던져 버렸다. 어차피 감정서는 따로 보관되어 있는 것 같고 처분하기 어려운 나한텐 위험한 물건이다. 기를 쓰고 찾으려고 수고들 해보라고 하는게 낫지.
어디 한번 서류들도 불태워볼까? 난 서류들을 집어다가 대충 읽어보았다.
부동산 권리니 뭐니 하는 내용들이 가득한 고급 종이들을 난 망설임 없이 등잔불에 하나씩 집어넣었다.
“형, 잠시만요. 특이한게 끼어있어요”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내가 태우던 서류더미 사이에서 유독 낡은 종이 쪼가리를 끄집어냈다.
뭐지? 그것은 자세히 보니 종이가 아니라 알아보기 힘든 약간의 그림과, 언어인 것 같은데 읽어지진 않는 글자가 가득 쓰여 있는 얇은 가죽이었다.
“이야.. 이건 굉장한데요?”
“이 글자를 읽을 수 있어?”
난 그것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감탄을 하는 소년에게 물었다. 소년은 싱글거리고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고대어인 모양인데요. 음, 저는 못 읽죠. 그런데 이건 대단히 값진 거예요. 아무리 봐도 고대의 무슨 유물 같은게 숨겨진 곳을 기록한 물건 같거든요. 트래져헌터들이나 모험가들이 보면 눈이 돌아갈걸요? 자체만으로도 값이 굉장히 나가고요. 백작이 어떻게 우연히 얻은 모양인데.. 가져가죠?”
그래? 난 새삼스런 눈으로 그 가죽조각을 바라보곤 소년으로부터 전해 받아서 품안에 잘 집어넣었다. 일단 가져가서 나쁠 건 없겠지.
..그럼 이만 탈출해 보실까. 아, 그전에.
“아가씨, 백작이 깨기 전에 알아서 잘 처신해 봐요. 우린 이만 갈 테니까.”
난 그렇게 말하곤 침대위에 금화를 한주먹만큼 쏟아놓았다.
어차피 고도의 세공기술과 특수금속으로 만들어진 아리센토화와는 달리, 이렇게 귀족가에서 따로 보관을 하고 있을만한 금화라면 순도가 매우 높아 거의 통짜 금덩어리에 가깝다.
보통 고대시대의 화폐인 금화는 그 순도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략 금화 1개에 20 에서 60아리멜 정도로 취급되는데, 이건 거의 대부분 50아리멜 이상은 쳐줄만한 것들뿐이다.
그 말은 반대로 해석하면 즉, 지금의 내게는 너무 무거워서 탈출에 방해가 된다는 소리다. 그리고 내가 도울 수 없다면 최소한 그녀에게 기회라도 주는게 옳지 않을까 싶다.
이만한 돈이라면 그녀가 잘만 처신한다면 어느 정도 삶을 개선할 수도 있을 테지. 적어도 나 같은 지나가는 건달에게 매달리고 싶다는 소리를 할 정도보다는.
금화를 보곤 당황해하는 여인에게서 돌아선 나는 근처 책상에서 종이 한 장을 뽑아 짧게 글 한 줄을 휘갈겨 쓰고 백작의 배위에 척 올려놔주었다.
그것으로 이곳에서 할 일을 모두 마친 나는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고 밖을 살펴보았다.
횃불이 이곳저곳에서 활활 타오르는 것으로 보아 역시 정원에도 이미 백작가의 병사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꽤 힘들겠군. 하지만 적어도 기사에 경호원들이 득시글한 저 문밖보단 낫다.
“어쩌실 거죠? 꽤 늦게 발각되긴 했지만 아마 지금쯤은 신고를 받고 도시경비대도 출동했을 텐데.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아마 저택 밖 근처도 포위될 거예요. 밤중이니 당연히 성문도 잠겼을 테고.”
“흥, 어차피 도시 구석 어디에라도 숨어 있다가 잠잠해지면 나가면 그만이지. 그보다 너 여기 뛰어내릴 수 있겠냐?”
어째 이 마당까지 온 사람들치곤 둘 다 너무 태평스럽군. 나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피식 웃고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고작 4층이긴 하지만 높다. 이런 귀족가 건물은 대개 고대의 뭐냐, 포블로냐 양식이던가? 아무튼 그런 고풍스런 방식으로 건축되어 한층한층이 천장이 상당히 높은 편이니까. 게다가 아래엔 우릴 기다리는 병력들도 있고.
뭐, 이정도 높이라고 해도 나라면 미리 단단히 준비하고 뛰어내린다는 전제하에 낙법으로 굴러 어찌어찌 착지할 수는 있다.
약간의 부상은 감수해야 하겠지만.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재수가 없으면 바로 경비병력 코앞에 목을 들이밀게 될지도 모른단 말씀이야.
“이 정도요? 문제없어요. 전 가벼우니까. 뭣하시면 먼저 내려가서 근처를 정리해둘까요?”
“..너 대체 뭐하는 꼬마냐?”
아무리 의심쩍어도 일이 끝날 때까진 참으려고 했는데, 아래를 슥 내려다보곤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소년을 보곤 난 무심코 묻고 말았다.
그러자 소년은 달빛을 받아 약하게 빛나는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비록 여장을 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그 모습은 놀랄만큼 매력적으로 보인다. 아, 물론 여자로서가 아니라 남자로서다. 내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건 아니라고.
하지만 그런것 보다도 나는 그 미소를 본 순간 순간적으로 기이할 정도로 강렬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순간 얇디 얇지만 더없이 예리한 살기(殺氣) 한줄기가 내 척추를 관통하고 지나가는 듯한 섬찟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뭐지? 이 느낌은? 설마 내가 지금 이 꼬마한테 위압감이라도 느끼는 것인가? ..아니, 아니야. 이건 위압감이 아니다.
문득 뜬금없이 어린 시절 캬르한 산맥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한 범과 마주쳐 꼼짝 않고 서로를 노려보며 버티고 섰던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공포? 그렇다. 이것은 공포였다. 엄청난 맹수가 이를 드러내는 것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 설명해요? 무사히 나가고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그리고 대체 뭐하는 분인지 알 수 없는 건 형도 마찬가지에요.”
“..그렇겠군. 자, 시간 없으니 어서 내려가자.”
복잡한 기분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만큼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생각해서 뭐하겠냐. 어차피 이 꼬마가 나한테 해를 끼친 것도 아니고, 무슨 음모를 꾸미는 것 같지도 않다.
혹여 정체를 숨기고 내게 다가온 것이라고 해도, 나 같은 여행자한테 뭐 얻을게 있다고 접근을 하겠냐?
그리고 한다는 짓이 뜬금없이 나랑 같이 도둑질이나 하고 있는 건데 음모는 무슨 놈의 음모. 게다가 딱히 숨기는 기색도 아니고 일만 끝나면 설명해줄 태도니.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주의를 기울이기 위해, 이제야 주섬주섬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을 안보는 척 하면서 곁눈질로 훔쳐보면서(?) 이불을 대충 창문 근처에 걸었다.
그냥 뛰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매달려 내려가다 뛰는게 낫겠지. 덕택에 눈 호강도 좀 하고. ..이제 보니 아까 전 윤곽선으로 봤을 때 생각했던 몸매를 좀 수정할 필요가 있겠어. 뭐랄까.. 좀 더 크다고 해야 할지..
“형, 안가요?”
“아, 어. 가야지.”
어째선지 킥킥거리고 웃고 있는 소년과 함께 나는 창가에 매단 이불을 타고 내려갔다.
별로 튼튼한 재질이 아니었는지 두 사람의 체중이 실리자 금세 이불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지만 그 걸로도 충분했다.
가볍게 몸을 날린 나와 소년은 자세를 낮춰 무사히 백작가의 정원에 착지했다.
“저기 있다! 잡아라!”
우리가 움직이는 걸 진작부터 보고 있었는지 당장에 정원의 병사들이 소란을 피우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물론 힘든 새벽이 되리라 생각은 했지만, 예상보다도 일이 더 커져버렸다. 백작 놈이 무슨 난리를 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아예 도시 경비대 전 병력이 출동을 한 기세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무슨 국가비상사태라도 난 것처럼 거리 곳곳을 횃불을 환히 밝힌 병사들이 뛰어다니고 하여튼 난리도 아니다.
허, 나 원 참. 좀도둑 한명 잡자고 이건 좀 심하잖아? 내가 백작에게 무슨 대단한 피해를 입힌 것도 아니고(?). 다치게 한 사람은 있어도 죽인 사람도 한명 없는데.
사실 말이지, 그 많은 경비 병력을 상대하면서 내가 얼마나 사람 안 죽이려고 노력했는지 알아? 그걸 알면 이렇게 쫓아다닐게 아니라 나한테 상패라도 줘야한다고!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투덜거려봐야 이미 늦었다.
애초에 꼬마의 말처럼 이 대도시, 그것도 제국의 수도에서 백작쯤 되는 중앙 귀족을 건드린게 무모한 일이었던게 분명하다.
“그래서 어디 가는 거예요?”
여전히 깊은 어둠이 깔린 복잡한 도시 골목을 달리는 나를 졸졸 쫓아오고 있던 소년이 물었다.
이 녀석도 참 고집스러운 것이, 저택에서 빠져나왔으니 일단 집으로 돌아가라고 해도 도통 말을 듣질 않는다.
또 그렇다고 의리라거나 그런 것 때문에 남겠다는 태도도 아니고. 대체 어쩌겠다는 건지.
“잠시 들를 곳이 있어. ..제길, 혹시 잠시라도 성문을 열 수 있는 방법 없을까. 이거 아무리 봐도 돌아가는 꼴이 도시를 빨리 벗어나는게 좋을 것 같은데.”
대충 기억을 더듬어 목적지까지의 방향을 가늠하면서 나는 푸념처럼 중얼거렸다.
원래는 도시 안에서 잠잠해지길 기다려볼 생각이었지만 이정도로 야단법석을 떨어대니 아무리 신경이 굵은 나라도 매우 불안하다.
혹여나 발각되어 잡히면 볼 것도 없이 교수대에 목이 매달릴 판국이었으니까.
성문, 성문만 잠깐 열리면 밖으로 빠져나가버려서 어떻게든 될 텐데.. 하지만 내가 말하면서도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안다.
보통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나있는 도시의 성문이란 늘 최선의 방비가 갖추어져 있는 법이다.
성벽이란 외부적인 공격으로부터 내부를 지키기 위한 강력한 방어물이고, 성문은 그런 성벽을 출입하는 유일한 통로다. 철저한 방비가 갖추어져 있지 않을 리가 없다. 더욱이 이 강대한 제국의 수도라면 말할 것도 없을 테고.
설령 그곳을 지키는 병사들이나 상주 기사를 힘으로 제압할 수 있다 해도, 이런 대도시의 성문이란 나 혼자의 힘으로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지금은 시야가 한정되는 밤. 낮과는 달리 당연히 성문들은 철통같이 봉쇄되어 있을 것이다.
적어도 몇 겹의 성문과 격자가 갖추어져 있을 테고 폭이 족히 10메르는 되는 해자를 지나다니게 해주는 도개교도 모두 올라가 닫혀있을 텐데 그걸 무슨 재주로 뚫겠는가.
에라, 일단은 지금의 일부터 다 마치고 생각하자.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