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 조우 그리고 이별 (7)
“하하하, 청춘이로군. 음, 멋진 로망이야. 하하하핫.”
즐거움 가득한 음색으로 울리는 센더의 웃음소리에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는지 공주가 화들짝 놀라며 내게서 훽 떨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마찬가지였다. 잠깐 착각했는데, 여긴 얼마 전처럼 둘만 있는 장소가 아닌 것이다.
쩝.. 이게 무슨 꼴이야. 난 뒷머리를 긁적이며 물러섰고 공주는 붉어진 얼굴을 어렵사리 감추며 물었다.
“다친 곳은..?”
“물론 멀쩡하죠.”
아무렇지 않은 척 상처가 있던 부분을 살짝 건드려 보인다.
음, 역시 치유마법이 원상회복의 기적 같은 건 아니라는 센더의 말처럼 미세하게 통증이 남아있다. 격하게 움직이면 다른 어느 곳보다도 우선해서 쑤시기도 하고.
하지만 그 전의 죽을동 말동했던 상태에 비한다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감사하게 여기며 참아줄 수 있지.
“제반느, 출항할 준비는 다 되어있어?”
“..그렇다. 본거지는 어떻게 되었지?”
내가 확인삼아 물어보자 제반느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되묻는다.
흠, 내가 거길 나 몰라라 내버려두고 도망치기라도 했을까봐? 뭐.. 책임감 있게 어쌔신들의 탈출까지도 일일이 도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 아니, 다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흑살검이든 뭐든 간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이판심판회의 부회주 아다치가 멀쩡히 버티고 있었다면ㅡ 그곳에서 살아나왔을 사람은 없었으리라는 점이니까.
손짓하나로 건물을 가루를 내버리는 놈이다. 그 강력함은 이루 말 할 필요도 없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던 나는 문득 아다치의 그 마지막 청백색 눈동자가 다시 떠올라 살짝 몸서리를 쳤다.
“작살났지. 그래도 그리엔이 적당히 잘 수습해서 탈출했어. 지금쯤이면 추격을 받고 있을 테지만 그래도 그곳에서 전멸당하는 것보단 나을거야.”
“..그런가.”
하지만 제반느는 별달리 따질 생각은 아니었는지, 그저 어두운 표정으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도 꽤 심란하겠군.
다크문 헬리오스에 대한 자긍심이 각별해 보이던 그녀였던데다가, 하루 아침에 자신이 속하고 자란 그 조직이 산산이 박살이 난 셈이니.
난 좀 안쓰러운 시선으로 제반느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그 외에는 별다른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볼 수록 알기 힘든 여자다. 감정의 많은 부분이 배제되어 있는 것 같지만 또 어떻게보면 아닌면도 있고.
“으윽.. 뭐하는거에요, 공주님?”
나는 갑자기 상처부위를 쿡 찌르는 르미엘르 공주 때문에 신음을 토했다. 많이 아물긴 했다지만 그렇게 갑자기 찌르면 아프단 말이다. 내가 투덜거리며 뒤로 물러서자 그녀는 왠지 게슴츠레 가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쯤해둬. 너무 뻔히 쳐다보면 실례인 걸 모르는 거야?”
“아니. 내가 뭘..”
조금 전만해도 죽고 못살것처럼 안겨(?) 놓고서는 갑자기 뭐가 불만인지 냉랭하게 말하는 공주. 억울했던 나는 한마디 대들어 보려다가 왠지 더 따졌다간 후환이 좋지 않을 듯한 그녀의 눈빛을 보곤 꼬리를 말았다.
그 다크문 헬리오스 본거지에서 어쌔신들에게 둘러 쌓이고도 꼼짝도 않던 그 위압적인 눈빛은 여전했다.
“어쨌든 그럼 빨리 출발을..”
일단 화제를 돌리려던 나는 하던 문득 말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이곳 선착장으로 향하는 길 쪽 방향에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동이 일어난 것이다.
마치 파도가 밀려오듯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뭐지? 난 본능적으로 창을 잡으려 했지만 센더가 그런 나를 제지하고는, 손가락을 입에 대 보이며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단심판회의 명령이오! 지금 이 시간부로 조사가 끝날 때까지 모든 배의 출입을 통제하겠소!”
그 웅성거림을 뚫고 전령인 듯한 자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짧은 외침소리의 효과는 즉각 들끓는 선원들의 반응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척 보아하니 이단심판회가 이곳 챠펠린 전부를 들쑤실 참인지 도시 쪽에서도 심상찮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히익..! 이, 이단심판회라고!?”
“배를 멈춰! 이 멍청이들! 배를 멈춰! 배 안에 조각상이든 뭐든 전부 치워라! 빨리!”
“으아아악! 이단심판회가 온다!”
..괴물 같은 놈들. 대체 평상시에 어떤 식으로 했길래 겨우 전령의 말 한마디 들었다고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이 난리법석을 피우는 거냐?
난 어이없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무언가에 생각이 미처 아차 하며 센더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네. 내가 있는 한 우리 일행은 확실히 다 잡히겠지.”
딱히 입을 열지 않았는데도 센더는 한숨을 쉬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소리 없이 샴시르를 빼내들고는 우리들로부터 몇 걸음 물러섰다. 무슨 의도인지 뻔히 보인다. 아마 자기가 책임지고 시선을 끌겠다는 얘기겠지. 하지만..
“나도 마찬가지야. 아다치까지 베고, 계속 같이 움직였는데 너만 보고 잘도 그냥 넘어가겠다.”
나 역시 지긋지긋한 철가면을 다시 뒤집어쓰며 창을 빼들었다. 센더는 그런 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난 그저 피식 웃고는 그의 옆에 섰다.
쳇.. 어지간하면 같이 갈 생각이었지만 역시 쉽지가 않군. 나는 우리들의 행동에 대해 놀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공주에게 말했다.
“아쉽게도 여기서 작별이네요. 공주님.”
“라샤크! 그럴 필요 없어. 함께 피하면..”
“공주님도 잘 알잖아요. 지금 이 방법뿐이라는 거. 게다가 어제처럼 제가 목숨 걸고 싸우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도망만 칠뿐이에요. 그리고.. 공주님도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나요?”
“......”
르미엘르 공주는 입술만 깨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섭도록 영민한 만큼 이미 그녀가 어찌해야하는지는 누구보다도 더 잘 깨닫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나와는 엄연히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다, 결국은 이 방법뿐이다. 어차피 이단심판회가 전부 이곳으로 오지는 않았겠지. 당연히 이리저리 흩어져서 탈출한 그리엔 이하의 어쌔신들과, 특히 아다치를 죽인 정체불명의 창술가와 표적인 라이센더 왕자를 찾고 있을 터.
그러나 이곳, 차펠린은 쫓기는 자들이 숨어들거나 국외로 탈출을 시도하기 좋은 곳이니리만큼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전력이 투입되었을 것이다.
당연히 배는 띄울 수 없고,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작정하고 철저한 수색을 하는 건 필연적인 일. 그래서 괜스레 숨었다가 발각되면 공주까지 휘말려들게 될 수 있고, 또 그때가 되면 막상 탈출하려해도 불가능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쯤에서 센더와 내가 작은 소란을 피우고 다른 쪽으로 도망친다면? 저들이 라이센더 왕자에 대해 익히 잘 아는데다가, 또 우리 둘이야말로 현재 저들의 가장 주된 표적이다.
당연히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면 이곳에 온 이단심판회의 모든 성기사들이 전력으로 우리를 추적해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출항에 대해 직접적으로 제지를 할 자들은 없을 터. 공주의 수완이라면 능히 그 틈에 출항할 수 있다.
“돌아가서 반드시 이겨요. 그래서 자신과 동생을 구하라고요. 내가 도와준 사람이 여왕 됐다~ 라고 자랑하고 다닐 수 있게. 좀 이른 작별이긴 하지만 어차피 같이 로세하이안까지 갔어도 나는 곧 떠났을 떠돌이니까 그게 좀 일찍 찾아왔을 뿐이기도 하고요.”
“..라샤크. 나는, 난 너에게 너무나 많은 빚을 지는구나.”
르미엘르 공주는 고개를 숙인채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슬퍼하는 것인가? 그녀는 분명히 나와의 작별을 슬퍼해주고 있었다. 일국의 공주에게 이런 대접이라니.. 나도 정말 많이 컸구나.
그러나 공주는 이내 고개를 꼿꼿하게 치켜들며 내게 말했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언제든, 그리고 가급적 빠르게 로세하이안으로 찾아와. 왕녀 르미엘르 드 로제페 로세하인의 이름으로 라샤크 너를 환영할거야. 그리고.. 물론 너와 함께하던 르미엘르 아가씨로서도.”
한편으론 늠름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정감이 넘치는 모습. 르미엘르 공주는 그녀에게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그 당당하고 멋진 태도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후, 정말 멋진 여자야. 나 역시 기분 좋게 웃으며 그 손을 잡았다.
“그렇게 하지요. 언젠가 또 볼테니 작별은 짧게 해도 되겠죠? 이만 가볼게요. 아, 제반느도 공주님 잘 모시라고. 싸우지들 말고.”
“......”
두 사람의 대답 같은 건 기다리지 않고 나는 돌아섰다. 아직까지 이곳에는 성기사들이 들이닥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유롭지는 않은 상황이다.
이단심판회는 끔찍하게 강한 놈들뿐이니 도망도 그리 쉽지만은 않을테지. 하지만 이상스러울 정도로 그다지 불안하지가 않다. 공주의 마지막 인사는 심지어 나를 즐겁게 해주기까지 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센더와 함께 도시를 향해 달려가던 가는 문득 뒤를 향해 외쳤다.
“아, 공주님. 되도록 술은 먹지 말아요! 너무 무방비해지더라!”
뒤에서 공주가 당황했는지 갈라진 목소리로 뭐라고 따져 묻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난 쿨하게 킬킬거리며 웃고는 계속해서 달렸다.
아마도 항해 중에 영 이상한(?) 생각 때문에 적지않게 고민스러울걸? 하하하! 즐거운 귀환길 되시라고. 멋진 공주님. 언제가 또 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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