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 기이한 저택 (3)
난 저 멀리 작은 호수가 옆에 자리 잡은 고풍스러운 건물을 바라보며 손안에 든 의뢰서를 펼쳐보았다. 대충 맞는 것 같다. 이곳이 바로 의뢰인인 자베르 남작의 별장이다.
“으리으리하군.”
쳇.. 남작주제(?)에 거 별장까지 이렇게 폼 나게 짓고 산단 말이지. 짧게 혀를 찬 나는 발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의뢰서를 계속해서 팔랑팔랑 넘겼다.
의뢰서에 따르면 자베르 남작가는 근처에서 힘 꽤나 있는 백작가와 사돈지간이어서 나름대로 떵떵거리는 가문인 모양이었다.
남작이 상재에 밝아서 일찍부터 돈을 꽤 번 전형적인 졸부 귀족이라는데.. 그 가족사항이 어쩌구, 남작의 성격이 저쩌구. 허, 의뢰서라는게 보통 이렇게까지 정보가 담겨있나? 용병길드도 대단하군. ..하지만 대단한건 대단한거고 나한텐 영 쓸모가 없는 정보다.
“..난 5아리크짜리 심부름꾼이라고.”
고로 난 5아리짜리인 나한테 딱 필요한 정보만 얻으면 그만이란 말씀! 흥. 별 쓸데없어 보이는 부분은 죄다 넘겨버린 나는 이윽고 필요한 사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의뢰 내용은 별장의 지하가 무너지면서 나타난 이상한 동굴을 조사할 인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의뢰를 네 명으로 이루어진 어떤 모험가집단이 용병길드로부터 주선을 받았다. 그들은 대략 열흘 전쯤 출발했다고 한다.
워낙 거리도 멀지 않은데다가 갑자기 나타난 동굴의 탐색인만큼 주기적으로 사람을 시켜 길드 측에 경과를 알리기로 했다는데, 이 모험가 집단은 물론 호기심으로 별장을 직접 찾아온 자베르 남작의 연락도 없어서 용병길드가 직접 나선 모양이었다.
흠, 이제야 대충 알겠군. 고작 열흘전의 일을 가지고 길드에서 왜 따로 사람까지 보내나 했더니만.. 던전이 발견되었을 가능성 때문이었어.
원래 이 그라이암 대륙은 현 인류의 문명 전, 마도 문명시대가 이루어졌었고 소수의 학자들은 그 시대 이전에도 또 다른 문명이 있었으리라고 까지 추정하고 있다.
즉, 현재가 단지 인류의 첫 문명의 시대가 아니라 이미 여러 번의 문명의 종말을 거친 후 다시 시작된 문명이라는 흥미로운 이론이다. 아직까지 확증은 되지 않은 그저 ‘그렇다고 하더라.’ 나 ‘그럴지도 모르겠다.’ 정도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실 마도시대나 그 후 오랜 암흑기가 있었던 것은 명확한만큼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이론이라 하겠다.
어쨌든 이런 이론을 피상적으로 보게 되면, 우연찮게 발견되는 던전 등에서 어마어마한 값어치의 재화나 물건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럴 확률은 엄청나게 낮겠지만.
그리고 만약 던전이 발견된 것이라면 당연히 길드 측에선 그에 대한 지분 혹은 권한을 주장할 자격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혹여나 이 의뢰를 받은 모험가 집단이 이익을 독식하고 도망치거나 귀족가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지 않았는지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는 셈이다.
..굳이 아주 엄밀하게 따져 말하자면 이런 던전이 발견되었을 시 그 권리는 자연히 교황청에 귀속되고 발견자는 교황청에게 보고할 의무를 가진다고 교황령으로 선포되어 있다.
그러나 교황청에서 전 대륙을 일일이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또 일단 탐색을 해본다는 명목으로 빼돌리는 것이 암묵적으로 가능한만큼 용병길드로서도 일단은 발을 얹어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내가 맡은 일이 생각보단 소소한 일이 아니게 되는 셈이지만.. 뭐, 사실 그런 던전이 뜬금없이 귀족가 지하에서 발견될 리가 없는데다가 애초에 아직 의뢰를 받은 시일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러니 길드도 아직은 의심이라기보다는,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형식적으로 확인해 보겠다는 의도를 가진 정도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니 5아리크 짜리지..”
아, 계속해서 말하니 비참하구나.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별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눈부신 한낮의 햇살을 받아 휴양지 분위기를 한껏 내고 있는 그 별장은 더없이 조용하고 평온해보였다. 난 그대로 터벅터벅 별장을 향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이 별장은 귀족가들이 보통 그러하듯이 널찍한 정원을 사이에 두고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내가 그 외벽의 입구 부근으로 다가서자 한쪽에 서있던 거구의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자베르 남작가의 경비병인가? 그런데.. 어째 눈초리가 좀 사나운데.
“예, 용병길드에서 확인 차 들렀습니다. 의뢰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아보려 합니다.”
“..그렇습니까? 확인을 해볼 테니 기다리십시오.”
사내는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곧장 돌아서서 별장 쪽을 향했다. ..음, 이상하군. 뭐라고 해야 할까? 태도가 어쩐지 어색하다.
마치 해야 할 말을 잘 몰라서 누가 옆에서 몰래 일러주는 걸 그대로 따라하는 것 같은 느낌. 게다가 정문에 경비병이 한 명뿐이고, 바로 날 혼자 내버려두고 직접 소식을 전하러 간다는 것도 이상하다. 보통 두 명이어야지.
또 슬쩍 확인한 것이지만, 입고 있는 가죽갑옷에는 마치 금세 전투라도 치른 듯한 상처의 흔적이 미세하게 남아있었다.
귀족가의 별장, 그것도 이런 고풍스런 느낌의 건물을 지을만한 취향의 졸부 귀족가의 정문을 지키는 경비병이 왜 굳이 저런 복장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좀 깔끔하게 입고 있어야하는 것 아닌가?
“이상한걸.”
난 고개를 갸웃하고는 평온하게만 보이는 별장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주인인 남작이 직접 와있는데도 돌아다니는 하인도 없고 꽤나 고요하다. 남작이 조용한 휴양을 즐기는 편인건가. 그렇게 별장의 이곳저곳을 살피던 내 시선은 어떤 한 창문에서 멈췄다.
그곳에서는 웬 깡마른 사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훽 돌아서더니 창가에서 사라졌다.
보통사람이었다면 결코 사내의 세세한 표정 같은 것은 보지 못했을 거리와 짧을 순간이었지만, 난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한순간 마주친 사내의 얼굴에는 매우 신경질적으로 느껴지는 묘한 감정이 짙게 드러나 있었다.
“남작님께서 만나시겠답니다. 들어오십시오.”
내가 그렇게 건물을 둘러보는 사이에 다시 나타난 경비병이 말했다. 그는 건물을 꼼꼼히 둘러보고 있던 나를 빤히 바라보았는데, 이건 인상을 찌푸리는 건지 아니면 노려보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화를 내는 건지 도대체 분간이 안 되는 애매모호한 표정이었다.
난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가 열어주는 문을 지나 건물로 향했다. 안내해주는 이도 없고, 경비병은 그저 문 앞에 선채로 나를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으음, 역시 좀 이상한데? 난 건물을 향해 걸으면서 온몸의 근육을 천천히 긴장시켰다. 심상치 않다. 솔직히 말해서 딱 집어 뭔가 확실히 잘못된 점은 없다지만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
캬르한 산맥에서 지내면서도 종종 이런 느낌을 전해 받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건 주로 내게 무언가 위험이 닥쳐있을 때였다.
“위험이라..”
난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작게 중얼거리며 정원을 지나, 직접 별장의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그곳에는 전형적인 귀족가 집사의 모습ㅡ 즉 어느 정도 기품이 있고 조용한 인상의 노인이 단정한 예복을 차려입은 채로 서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절 따라오시지요. 남작님께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표정하다. 전체적으로 상당히 선한 인상의 노인인데도, 그 선량한 표정이 어쩐지 부자연스럽다. 역시나 딱 집어 뭔가를 지적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난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고 그대로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미 문안으로 들어서면서 나 역시 딱히 대답을 하거나 할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길.. 대체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날 너무 우습게 보는군. 아주 미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 집안에서 풍기는 ‘피 냄새’ 를 눈치 채지 못할 줄 알았나보지? 쳇, 대체 뭐야 이거?
아무래도 한바탕 전투라도 벌어진 것 같은데.. 혹시 그 동굴에서 정말 귀중한 물건이라도 나와서 모험가 집단과 크게 전투를 벌이고 입을 싹 씻으려는 건가?
일단 그렇다면 말이 된다. 그리고 그렇다면 지금 나도 조용히 처리해버리려 들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용병길드랑은 어쩔 셈이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을 텐데. ..아하, 나를 포섭이라도 할 생각인가?
“훗..”
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사람 잘못 봤다. 내가 지금은 비록 고작 5아리크짜리 용병이긴 하지만 돈 몇 푼에 구차하게 포섭 따위를 당해줄 마음도 없고, 죽이려 든다고 순순히 당해줄 마음도 없다.
음.. 혹시 끝내주는 미인이 포섭을 한다면야.. 한번 진지하게 고민정도는.. 아, 나 이거 병인가 봐. 쩝.
하여튼 이 작자들이 무슨 짓을 어떻게 하든 이런 곳에서 내 한 몸 빼내지 못할 내가 아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할 나는, 무표정하게 나를 돌아보는 집사에게 씨익 웃어주고는 태연하게 걸었다. 어디 한번 내게 섣불리 손가락 하나만 까닥해봐라,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이곳입니다.”
한참을 더 걸어 2층까지 이동한 후, 집사는 웬 으리으리한 장식이 되어 있는 문 앞에서 멈추며 말했다. 그리고는 옆으로 물러서서 혼자 돌아가 버렸다.
긴장해서 그런가? 입구의 경비병도 그렇고 집사도 그렇고 귀족가치곤 예법이 엉망진창이었다. 아인도르프 후작가에선 하인들이 너무들 정중해서 불편할 지경이었는데. 좀 의아스럽게 속으로 중얼거린 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오, 어서 오시게. 내가 바로 자베르 남작이오.”
문을 열자마자 본인을 자베르 남작이라 밝힌 중년의 사내가 나를 반갑게 환영해주었다. 나는 호화스럽기 짝이 없는 응접실 가운데에 서서 밝게 웃고 있는 남작과, 그 남작의 옆에 서서 우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듯 꾹 다물고 있는 깡마른 사내를 재빠르게 둘러보고는 곧장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용병길드에서 나온 라샤크라고 합니다.”
“내가 길드에 연락한다는 걸 깜빡해서 이렇게 직접 사람을 보냈나보군. 허허, 이걸 어쩐다. 괜한 수고를 하게했으니.”
꽤나 둔중해 보이는 덩치에, 얼굴엔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고 있는 자베르 남작은 인심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콧수염과 한껏 멋을 냈지만 불룩 튀어나온 육중한 뱃살 때문에 전혀 멋이 나지 않는 고급스런 옷차림을 한 남작은 친절하긴 하지만 왠지 약삭빨라 보이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을 이었다.
“미안하게도 나는 그저 호기심으로 길드에 사람을 요청한 것이라서 자세한 상황은 잘 모르고 있네. 아직 동굴에 들어간 모험가들이 나오지 않았으니 말이야.”
“그들이 열흘간이나 연락이 없었습니까?”
“아아, 그랬다면 길드에 연락을 했겠지. 그들은 삼, 사일 꼴로 동굴에 들어갔다 나왔다 반복하고 있네. 어디보자.. 잉겔, 그들이 마지막으로 언제 들어갔지?”
남작은 계속해서 사람 좋게 웃는 표정으로 설명하다가 옆에 서있던 사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잉겔이라 불린 깡마른 사내.. 내가 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창가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 사내는 한순간 흠칫하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흘 전입니다. 조, 조만간에 나오겠지요. 내일이라도..”
대답을 하는 잉겔의 얼굴은 금방 죽을 사람처럼 핼쑥해져 있었고 목소리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뭔가 있군? 내가 유심히 자신을 바라보는 듯하자 그는 눈에 띄게 창백해지더니 재빨리 내 시선을 피했다.
“허허, 이 사람이 원래 낯을 매우 가려서 그러니 이해하게. 그보다 나는 상황을 잘 모르니 아무래도 자넨 그 모험가들을 만나봐야 할걸세. 내 지낼 방을 내줄테니 그곳에서 그들이 나오길 기다리겠나?”
남작이 다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그 사람 좋게 웃고 있는 표정이 처음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아무리 일관되게 웃고 있더라도, 적어도 입 꼬리나 눈모양 등 사람의 표정이란 어느 정도 변화를 하기 마련이다. 저렇게 똑같은 표정으로 웃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랬다. 이제 확실히 깨달았다. 내가 경비병이나 집사로부터 받은 이질감도 이것 때문이었다. 일단 지은 표정이 조금도 변하지를 않는다.
담력이라면 정말 어지간한 나지만, 그 사실을 눈치 채자 그야말로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뭐지, 이건? 그냥 웬 욕심머리 사나운 귀족이 용병 하나를 매수하려거나 없애려고 하는 상황이라기엔 무언가 이상하잖아.
“..예, 그럼 내일까지 그곳에서 기다리지요. 남작님.”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너희들이 원하는게 그거지? 난 차분하게 그렇게 대답했고, 남작은 여전히 처음과 똑같은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잉겔이란 남자는 초조하게 자기 입술을 물어뜯으며 나와는 절대로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남작이 그런 그에게 나를 방으로 안내해줄 것을 지시하자, 그는 그야말로 사색이 다되었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날씨가 참 좋네요?”
“..그렇군요.”
응접실에서 나온 후, 나는 앞장서서 저택을 안내하는 잉겔의 뒤를 따르며 그런 식으로 여러 차례 말을 걸어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저 더없이 조용한 목소리로 대충 대꾸만할 뿐 내게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발걸음으로 내가 지낼 방까지 안내를 하고는 곧장 웅얼거리듯 몇 마디 인사를 하고는 쏜살같이 발걸음을 돌렸다.
난 그를 잡아서 캐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분명 뭔가 알고 있는 기색이었지만 현재 아무런 정보도 없는 내가 그렇게 무턱대고 행동하기엔 이 귀족가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성격상 막나가는 것도 좋아한다만은, 이럴 땐 신중하게 행동해서 나쁠게 없겠지. 정 안되겠다 싶으면 그때 정면 돌파를 해보면 될 테고. 흠, 한동안 공주랑 함께 다니다보니 나도 뭔가 ‘계획적인 고려’ 라는 걸 하게 된 건가?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