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 뜻밖의 재회 (1)
대륙최강. 황금왕 하이델과 모험가 라이엔바흐 이후 역사상 최고의 검사로까지 일컬어지는 카를 블레이크.
수많은 전설을 뿌리고 다니는 사나이. 바드(Bard)들의 찬양의 노래에 끝없이 오르내리며, 크로아탄 제국에선 모든 군인들의 경외의 대상임과 동시에 야그투들과 제국에 반하는 적들에겐 공포 그 자체인 이름. 또한 전투에 임하면 물러섬이 없는 백전불패의 맹장.
..분명 내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알기로는 그랬는데 말이지.
“그러니까! 왜 안 된다는 거예요, 형. 너무해요.”
“......”
나는 나와 나란히 말을 걷게 하면서 계속해서 칭얼거리는 소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남자애라기엔 너무 귀여운 용모에 애교 섞인 태도. 게다가 무엇보다도 너무 어리잖아! 저런걸 보고 누가 그 '카를 블레이크' 를 떠올릴 수 있겠나.
물론 내가 카를 블레이크의 나이라거나 하는 것까지는 몰랐던 건 사실이지만.. 최소한 그런 어마어마한 위명과 용맹을 떨친 장수라면 누구나가 좀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기 마련인 것이다.
그래, 굳이 말하자면 그때 보았던 그 츠바이벤!
그런 척 봐도 용맹스러움과 호기로움이 줄줄 흘러넘치는 외모와 우락부락한 체구의 전사를 떠올리게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런 꼬맹이라니!
“너 몇 살이냐? 징집병으로 첫 출전해서 야그투들의 우두머리를 죽였을 때 대체 몇 살이었다는 거야?”
“그땐 열네 살이었어요. 지금은 열아홉이고요.”
..기가 막히는군. 저게 어딜 봐서 열아홉 살짜리의 용모냐?
물론 열아홉 살이란 나이가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정도 되면 어지간하면 성인 티가 나는 법이다. 게다가 전쟁터를 소문의 십분의 일만이라도 거쳤다면 더더욱.
전쟁터를 구른 열아홉 살짜리 전사가 저런 어리고 곱상한 외모를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용모뿐만 아니라 육체 또한 성장이 이상스러울만큼 더디어 보인다.
그런데 그보다도 더 기가 막힌 건 그 대전투를 열네 살 때 겪었다는 것이다.
열넷이라.. 허, 열네 살에 헤타메단이란 당대의 명장조차 무너뜨린 야그투들의 우두머리를 잡았다고? 그리고 순식간에 제국 북부가 무너질 상황이던 전세를 뒤집고?
“검술은 누구한테 배웠는데? 열넷까지 평범한 거지였다는 건 소문이 잘못된 거겠지?”
난 나도 모르게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야만 한다. 암, 그래야만 하고말고! 나도 열 살쯤부터 캬르한 산맥에서 혹독한 수련을 했지만 열너덧 살 때는 결코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솔직히 별 볼일 없었다는게 맞겠지.
원래 무술이란, 기본기를 닦는데 가장 긴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물론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정체기가 찾아오고 그것을 뛰어넘는 데는 평생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지극히 일반론적이며 너무 조악한 설명이긴 하겠지만 실력이라는 걸 1에서 100까지의 숫자로 나타낸다면, 70~80 정도부터는 1, 2 라는 숫자를 올리는 것도 결코 만만치 않으며 그 작은 차이로 강자와 약자가 나뉘게 된다.
그러나 적어도 30~50 정도 사이는 실력이 그에 비해 상당히 빠르게 향상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빠르게 올라간다는 것도 0~30 까지의 뼈를 깎는 고통과 오랜 수련기간이 필요한 기본기 수련과정이 밑받침 될 때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 누구라도 이러한 기본기 과정을 건너 뛸 수는 없다. 게다가 열네 살이라면 인간의 육체가 갓 단단히 자리매김하기 위한 성장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제아무리 천골(天骨)을 타고났다 해도 아무런 준비 없이 열네다섯에 갑작스레 뛰어난 무용을 발휘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내 추측이지만 아마도 카를은 과장된 소문과는 달리 극히 어렸을 때부터 철저한 수련과정을 거쳤음이 분명하다.
그렇고말고.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내 질문에 카를은 눈을 말똥하게 뜨며 오히려 이상하단 투로 대답했다.
“그전엔 검이란 걸 만져본 적도 없어요. 징집되고 잠깐 엉터리 군사훈련을 받았을까요? 으음.. 잘 기억이 안 나네요.”
“......”
말도 안 돼! 지, 진짜 천재다 이건가?
사실 오만일지는 몰라도 나도 내 자신이 정말 치고 박고 싸우는 데는 재능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만, 이건 완전히 차원이 다르잖아!
“그런 것보다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네?”
왠지 모를 패배감? 혹은 자괴감 비슷한 감정에 휩싸여 있는 내 속도 모르는지, 카를은 태평하게 싱글거리며 다시금 칭얼거렸다. 이걸로 대체 몇 번짼 인지 모르겠다.
북부의 전장으로 향하는 카를과 동행하게 된지 사흘째이고 지금까지 녀석은 틈만 나면 저 ‘부탁’ 을 했으니까. 숫자로 따지면 한 수십 번은 족히 넘었을 테지.
그건 그렇고.. 수많은 전사들이 목을 매는 재능이란 부분을 단순히 ‘그런 것보다’ 라는 한 문장으로 태평히 일축해버리다니!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는 건지, 아니면 재능이라는 점에 대해 너무 당연히 여겨서 아무런 감흥이 없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아예 그런 쪽으론 관심자체가 없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이런 애를 두고 혼자 고민하는 것도 바보짓이다 싶어서 난 피식 웃어버렸다.
“야, 그런 부탁을 어떻게 들어 주냐? 겨우 대련에 목숨을 거는 멍청이가 어디 있어!”
카를이 애초에 내게 흥미를 느끼고 접근한 이유, 그리고 나와 행동을 함께한 이유.
그것들이 바로 이 ‘부탁’ 이란 걸 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는데.. 그 내용이 참 골치 아프다.
자기와 대련을 해달라는 간단하다면 간단한 부탁이지만, 거기에 이상한 단서가 붙어 있는 것이다.
‘대련을 하되, 죽을 수도 있다.’ 라는. 참 사람 미치게 하는 단서다. 아니 대체 나같이 앞길 창창한(?) 미청년이 왜 대련에 목숨까지 걸어야 하냔 말이야.
“그러니까 제가 형 같은 분을 찾은 거잖아요. 아마도 형이라면 쉽게 죽지는 않을 거예요.”
“임마, 말하는게 이상하잖아! 그럼 어렵게는 죽어도 되냐? 그리고 아마도 라니. 목숨을 거는데 아마도가 어디 있어?”
내가 퉁명스레 한마디 쏘아붙이자 카를은 금세 울상이 되더니 ‘그래도..’ 라며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하아.. 뭐, 몇 일전 그의 설명을 들어보면 대충 앞뒤 사정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믿기는 힘들지만 카를은 저 외모나 태도와는 반대로 전투에 있어서는 매우 호전적인 성격이라고 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성격 때문에 도통 적합한 대련상대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도 대련을 할 때 한번 흥이 오르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지만, 적어도 그건 상대를 죽이거나 하지는 않는 선에서의 이야기다.
저 녀석이 대체 어떻게 싸우길래 그렇다는 건지 직접 보질 못했으니 온전히 납득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설명하기로는 대련이라고 해도 일단 불이 붙으면 검을 멈출 수가 없고, 그 때문에 상대를 죽일까봐 대련조차 쉽게 할 수 없는 처지라고 했다.
그리고 흔히 뼛속까지 무인인 자들이 그러하듯이, 카를 역시 언제나 검술을 극한까지 발휘하여 겨룰 상대를 찾는 일에 목말라 있었다.
그리고 그 갈증 때문에 나라는 상대를 만났을 때 그토록 큰 흥미를 보이며 무리해서 날 쫓아 행동한 것이다. 즉, 나와 제대로 싸워보고 싶어서 그랬다는 소리.
내가 정확히 짐작할 수 있는 바는 아니지만.. 소문이 반의 반의 반만 맞는다고 해도 심하게 어린 나이에 이미 비정상적인 강함을 이루게 되었을 카를이다.
그로인한 지루함과 권태로움에 빠져 언제나 새로운 상대방을 찾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솔직히 나도.. 그 사부 같은 괴물단지의 곁에서 자라지 않았더라면 비슷해졌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이해를 하는 것은 하는 것이고 내가 그 ‘죽을지도 모르는’ 대련 상대가 되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다.
“크로아탄 제국의 군부에도 강한 자들이 많을 것 아니야? 왜 꼭 나야? 그래 맞아. 네 수하들인 레드 스페츠나츠만 해도 괴물들 투성이 아니야? 츠바이벤이란 소대장은 어때?”
“응? 츠바이벤을 알아요? 흐음~ 하지만 그는 너무 약한걸요. 잠깐 재미있자고 츠바이벤 같은 휘하의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야 없잖아요.”
뭐라고? 이 녀석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난 완전히 당황해버렸다.
그 츠바이벤이.. 너무 약하다고? 내가 멍하니 지켜보는 가운데 카를은 이마를 짚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눈빛이 너무나 순진무구해서 오히려 어떤 광증(狂症)으로까지 느껴질 정도다.
“아하하하! 너무 약하다고요. 어딜 찾아봐도 제가 전력을 다해 싸울 상대가 없어요. 재미가 없다고요! 나는 죽자 살자 싸워볼 상대가 필요해요! 형이 처음에 ‘카를 블레이크와 싸워도 자신 있다’ 고 했잖아요. 그리고 제가보기에 형이라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해요. 그러니 한번만 대련해 봐요. 네?”
카를이 새하얀 어금니가 드러날만큼 시원스레 웃자 나는 블드얀 백작의 저택에서 미세하게 느낀 적이 있었던 기분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보다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칼날처럼 예리한 기운.. 그런데 황당하게도 그것은 나를 적대하여 죽이겠다는 기운조차 아니었다.
그저 나와 싸우고 싶어 하는 투지를 드러냈을 뿐. 단지 그것만으로도 온몸이 무섭도록 서늘해진다.
“너..”
나는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늘 사탕을 입에 달고 사는데다가 태평하고 애교도 많은 예의바른 소년. 지금의 이 미묘하게 광증을 드러내는 소년.
어느 쪽이 진짜 모습일까.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소문이 완전히 거짓은 아니라는 것.
그러나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천상 무인이다.
눈앞에 미지의 상대, 그것도 대륙최강이란 소리를 듣는 상대를 두자 ‘싸워볼까?’ 라는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
잘 생각해보면 실제론 열아홉 살이라고 해도 육체는 겉보기엔 고작 해봐야 열댓 살 꼬마 정도에 불과하다.
저런 육체적 상태로는 아무리 강하다 해도 한계가 있지 않을까? 게다가.. 나 역시 무기를 제대로 들고난 이후 이제껏 스스로의 전투능력이 누구에게 뒤진다고 생각해본바가 없다.
물론, 아예 상대라는 수준으로도 칠 수 없었던 사부라는 존재는 예외지만.
하지만 그런 욕망과 함께, 마음 한구석에선 ‘싸우면 안 된다.’ 라는 강한 제지가 들어온다.
표현하기 마땅치는 않지만 굳이 말하자면 직감이라고 해야겠지. 이 눈앞의 자그마한 체구의 소년과 겨루면 좋은 꼴이 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것이다.
“..그래도 안 돼. 대련에 목숨을 걸다니 너무 비효율적이잖아. 난 아직 창창하다고.”
..설마 지금 내가 이 계집애 같은 녀석한테 위압감을 느끼는 건 아니겠지?
잠시 그런 고민을 해본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한 번 확실히 거절했다. 그러자 카를은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거절하신다면 할 수 없죠. 에헤헷. 하지만 어차피 북쪽으로 가신다면 당분간 동행할 테니 마음이 바뀌면 말해주세요.”
으음, 정말 의외인데? 그렇게 칭얼거리더니. 내가 의아해하며 바라보자 카를은 그저 상냥하게 웃으며 말을 모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내가 너무 과민하게 봤나? 이렇게 보니 방금 전에 얼핏 엿보였던 광증이 마치 거짓말 같다.
“날씨가 참 좋네요. 늦여름이라 따뜻한 것이.”
카를은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 널리 펼쳐진 초원을 바라보았다.
이곳 황량한 북방지역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넓은 초지인 프로페릴 초원이다.
제국의 수도이자 중앙심장부인 메르델키예프. 그리고 야그투들과 인접하여 지극히 불안정한 제국 북부에서도 유별나리만큼 발달하여 ‘북방의 보석’ 이라고까지 불리는 세르휀델 시티를 잇는 지역에 위치한 프로페릴 초원은 아주 특별한 유례가 있는 곳이다.
고대 마도시대의 최후, 최고의 대마법사인 ‘에우로디아 프레페릴’ 이 이곳 초원의 중앙부에서 생을 마감하였고, 그가 죽으며 척박한 땅에 자신의 생명을 쏟아 부어 이런 광활한 초지가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나야 물론 이야기로만 듣던 곳이지만 와서 직접 보니 확실히 신비로운 지역으로 불릴만하다.
이곳 초지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대부분 이곳 북방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종류이고 기후까지도 오늘 아침 이곳 초지에 들어서면서 확연하게 포근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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