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 조우 그리고 이별 (1)
“그러니까 라이센더 왕자의 말은 일주일이란 시간이 불안하다는 것이오?”
“불안해할 정도는 아니지만, 길게 끌어서 좋을 건 전혀 없단 말이지.”
이곳, 다크문 헬리오스의 비밀 본거지 안에서 지낸지 사흘째 되는 날. 오늘도 우리는 어김없이 거실에 둘러앉아 앞으로의 일에 대한 상의를 하고 있었다.
다크문이 어떻게 나올 것이며 또 그에 어떤 대처를 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이며.. 뭐 그런 등등 온갖 가능성에 대해 토의를 하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대개 딴생각을 하며 듣는 입장이었고 다른 두 사람이 열 띈 토론을 벌이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조금 전에는 센더가, 공주가 다크문 측에 제기했었던 일주일이라는 시간에 대해 염려하는 듯한 발언을 하여 이야기가 그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음, 이건 나도 좀 끼어들어야겠다. 너무 아무 말도 안하면 내 존재가치가 없어지잖아.
“에이, 설마 그 사이에 이단심판회가 쳐들어오기라도 할까봐? 네 말대로라면 그들의 표적이 이곳만인 것도 아니고, 또 이런 비밀장소를 찾는게 그렇게 쉽겠어? 게다가 백 명이 함께라면 기본적인 이동에서조차 시간이 꽤 걸릴 텐데.”
당연하다. 일단 집단이동을 하려면 필연적으로 숙식문제의 해결부터 시작해 여러 부수적인 절차가 생기기 마련이다. 특히 집단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절차가 복잡해지고 또 귀찮아지는 법이고 그런만큼 시간이 오래 걸리게 된다.
예를 들어 설령 같은 말을 타더라도 혼자 어느 장소까지 향하는 것과, 수십기의 기병대가 이동하는 것과는 그 이동속도가 확연하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뭐, 어느 정도 손실을 감수하며 강행군을 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잊었나본데 그들은 마법을 사용한다네. 일반적인 병력의 이동속도를 그들에게 적용할 수는 없어. 원한다면 언제든 엄청난 거리를 주파할 수 있는 자들이니까.”
음.. 하긴 마법이 있다면 또 다른 얘기가 되겠군. 잘은 몰라도 전부가 강화마법이라도 걸고 뛰어다닌다면? 일단 이론상으론 엄청난 기동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실제로 가능할지, 또 다른 방법이 있는지 여부는 나로선 모르겠다만.
“그렇다면 왕자의 말은..”
“지금이라도 다크문 측에 재촉을 해보자는 거지. 솔직히 나도 이단심판회가 이렇게 일찍 들이닥치거나 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어쨌든 시간을 오래 끌어서 우리에게 좋을 것은 없지 않은가? 게다가 다크문 측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판국이니 재촉을 한다 해서 딱히 결정에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 같더군.”
센더가 하는 말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번에도 역시 일리가 있다. 나는 공주가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다시 말했다.
“그럼 사람을 불러달라고 해야겠네?”
난 그렇게 말하고 곧장 건물 밖으로 나왔다. 역시나 주변에 깔린 감시자들 중의 하나가 조용히 다가왔고 나는 그에게 공주가 할 말이 있으니 책임자를 불러달라고 전하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대략 반 타룬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제반느가 나타났다. 역시나 이 비상시국 앞에서 그녀 역시 매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는지 예전에 보았을 때보다 태도에 여유가 없었다.
“할 말이 있다고 했다던데.”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본론을 꺼내는 제반느. 공주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의 제안에 대해선 어떻게 되었소?”
“..검토 중이다.”
“미안하오만 마스터 그리엔에게 최대한 빨리 결정을 내려달라고 전해주어야겠소. 설령 당장 결정은 내리지 못하더라도 가능하다면 일단 오늘 저녁때 이야기를 나눠봤으면 하오.”
제반느는 뭔가 물어보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이내 고개를 젓더니 그렇게 전달하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더는 용건이 없다는 듯이 곧장 몸을 돌렸다.
쩝.. 만약 공주의 제안이 받아들여지면, 제반느도 어쨌든 공주의 수하가 되는 셈일 텐데도 태도가 변함이 없다.
확정되기 전까지는 아무 상관없다는 건가?..제안이 받아들여 진다고해도 공주가 참 고생이 많겠군. 저 뻣뻣한 다크문 헬리오스들의 어쌔신들을 부리자면 말이야.
정보국이라고 했지? 제대로만 운영된다면 확실히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단한 조직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바로 그 제대로 된 운영이 가능할지 어떨지 잘 모르겠다.
“잠시 너만 밖으로 나와라.”
“나? 어.. 뭐 그러지.”
제반느는 밖으로 나가기 직전에 따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예상치 못했던 말을 꺼냈다.
너무 의외라서 난 약간 놀란 채로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왜 부르지? 설마 따로 떼어놓고 공격이라도 하려는 건가?
살짝 긴장을 하며 역시나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다른 두 사람과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래도 저 두 사람 모두 자기 몸 정도는 충분히 지켜낼 사람들이니, 바로 앞까지 나가는 정도야 문제는 없을 테지. 그리 길지 않은 고민을 마치고 나는 제반느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뭔데? 사랑고백이라면 곤란해.”
“..그런게 아니다.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 다크문 헬리오스가 너희를, 특히 저 르미엘르 공주를 믿을 수 있겠나?”
제반느는 건물 밖으로 내가 순순히 따라 나오자 곧장 문을 닫더니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물어온다.
장난을 걸었는데도 언제나처럼 화를 내지 않고 그저 묵묵히 받아넘기는 것이, 정말 진지하게 묻고 있는게 분명했다.
나는 일단 다른 속셈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아서 잠시 안도를 한 후에, 태연자약하게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저번엔 나더러 황당한 질문을 한다더니 너도 딱 그 꼴이잖아?”
“난 너희 일행의 신뢰에 대해 물은 것이 아니다. 네 생각을 묻는 거다.”
으음, 몇 일전 내가 한말을 그대로 돌려주는군. 하지만 이런 질문을 해올 정도라니.. 다크문도 어지간히 급하긴 했나보다. 아니, 제반느가 개인적으로 질문해 온 걸까? 어느 쪽이든 공주의 제안이 꽤 긍정적으로 검토되고 있다는 증거다.
“다방면으로 정보를 모은 결과, 이단심판회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제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다. 일이 여기까지 온 이상 보험을 들기 위해서라도 왕자파든 공주파든 한쪽 손을 잡아야 하겠지. 너는.. 조사해보니 기사 직위도 거절했더군? 그러니 실제 로세하이안 왕국과 관련성이 없는 것이 확실해. 그래서 네게 묻는 거다.”
“..이단심판회는 언제쯤?”
“이미 아르칸 8국에 들어서있다. 우리를 첫 표적으로 잡는다면.. 그리 여유는 없다.”
역시 다크문 헬리오스라고 칭찬해야하나. 다크문은 이미 나에 대한 뒷조사나 이단심판회의 근황에 대해서까지 조사를 마친듯하다.
명불허전이라더니 정말 대단하군. 고작 삼일 사이에 말이야.
아무튼 그런데 이단심판회가 아르칸 8국내에 있다고? 그렇다면 문제는 그들이 이 비밀장소를 과연 얼마만에 찾아내느냐. 그리고 과연 다크문 헬리오스부터 노리느냐. 라는 건데.
“..르미엘르 공주는 믿을만하다고 밖에는 할 말 없어. 난 벨쥬드 공작이나 그쪽 사람들은 몰라. 그래서 비교가 불가능 하지만 르미엘르 공주가 쉬이 자기가 한말을 저버릴 사람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있지. 적어도 벨쥬드 공작 보다는.”
사실 내 입장에서는 당연한 대답이었지만 동시에 진심이기도 했다.
벨쥬드 공작이 얼마나 잘난 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머릿속의 이미지로는 아주 노회하고 교활한 작자거든.
아니, 그런데 이 여자도 참 이상하군. 이 제안이 거절되면 나도 목이 날아갈 판인데, 내가 무슨 대답을 할지 뻔한 것 아닌가?
“그런가.”
하지만 제반느는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잘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내 착각일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좀 많이 누그러진 것 같은데? 게다가 이런 질문을 내게 한다는 건 날 공정하게 신뢰하고 있다는 소리 아닌가
내가 좀 의아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제반느가 용건이 끝났다는 듯이 돌아서며 지나가는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나도, 공주와의 이야기가 잘 되었으면 싶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후에 너와 제대로 겨뤄볼 수 있었으면 하는군. 괜찮다면 그때 한수 가르쳐주길 바란다.”
“어?”
난 자기할 말만 툭 하고는 성큼성큼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이게, 그녀가 말하던 강자에의 예우인가? 날 마음에 영 안 들어 하던 것 치고는 상당히 친절하군.
솔직히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여전히 정말 냉랭하고 무감정한 태도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껏 보아온 제반느라는 여인의 성격을 감안하면 조금 놀랄 정도다.
음.. 뭐, 나쁜 일은 아니지. 이런 태도도 어쩌면 공주의 제안에 대해 다크문이 동의하는 데에 상당히 근접해 있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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