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요정의 숲 (2)
예상대로 내가 생각한 지점쯤에서 그 요정을 발견했지만 용병들 중에서도 제법 능력 있는 놈들이 있었던 모양인지 선수는 빼앗겨 있었다.
음.. 선수라니 마치 나도 악당 같잖아? 난 잠시 한숨을 쉬고는 요정으로부터도, 그녀의 뒤를 쫓는 용병들로부터도 감지되지 않게끔 떨어져서 그들 무리를 뒤쫓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지 그야말로 결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몇 번이나 구르고 넘어졌는지 온통 흙투성이에 처참한 몰골이라서 외모조차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지만 적어도 그녀가 느끼고 있는 공포와 불안감만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난 그 뒤를 힘겹게 쫓으면서도 등에 짊어진 무거운 짐 덩이를 내려놓는다거나 하지 않았다. 이건 뭐, 척 봐도 금방 잡힐 것 같았으니까.
..역시나. 내 예상대로 몰이사냥이었던지 도망치던 그녀의 전방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째 좀 느슨하게 쫓아간다 싶었지. 난 침착하게 몸을 숨기고 지금껏 날 괴롭혀온 짐 덩이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이제 결정의 순간이다.
시야에 보이는 용병 무리는 열네 명. 그리고 근처에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른다.
싸워야 하나? 난 망설였지만 순간 용병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바닥을 기면서도 필사적으로 도망치려하는 요정의 모습과, 그런 요정을 둘러싼 채 낄낄거리며 웃고 있는 용병들의 모습에 발끈해서 나도 모르게 숨어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야, 이 개자식..!”
슝. 슈슝. 내가 고함을 지르던 것과 동시에 매서운 파공음들이 울려 퍼졌다. 주변 곳곳에서 날아든 화살들이 정확하게 요정 여인을 포위하고 있던 용병들에게 날아가 박히기 시작했다.
비명소리와 함께 반수에 가까운 용병들이 무너져 내렸고 살아남은 용병들은 무기를 꺼내며 즉시 산개하기 시작했다.
“..들아.”
난 쥐꼬리만 하게 작아진 목소리로 고함을 마무리 짓고는 다시 몸을 숨겼다. 은, 엄폐가 쉬운 숲속이긴 했지만 그건 그만큼 활을 가진 자도 숨어서 쏘기 쉽다는 의미.
누구인지는 몰라도 내 위치도 노출되었고 방금의 활솜씨는 척 봐도 보통이 아니었다. 게다가 상당한 다수.
난 신속하게 위치를 옮기며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물론 그러는 중에도 장내의 화살은 멈추지 않았다. 용병들도 꽤 실력이 있는 것 같았지만 어디서 오는지도 알 수 없는, 기가 막힐 정도로 정확한 화살들에는 속수무책이었다.
확실히.. 저 한가운데에 있으면 나라도 답이 없겠다. 이 녀석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궁사가 싸움에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사항, 즉 전술적 우위, 지리적 우위, 심리적 우위를 모두 완벽하게 실행하고 있었다. 일단 선수가 잡히고 표적이 된 이상 벗어날 길이 없다.
그리고 기본적의 궁술 자체가 척 보기에도 더없이 날카롭다. 나도 궁술을 좀 하는 편이지만 결코 저 정도는 못된다. 그렇게 내가 감탄하고 있는 사이에 용병들 전원이 적의 모습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채 순식간에 몰살을 당했다. 굉장한 화력이군.
그리고 이내 쓰러진 채 떨고 있는 요정 여인 주위에 그 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난 그걸 보고 더욱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건 바로 그 궁사들이 모두 요정들이었기 때문 이었다!
하나같이 훤칠한 미남미녀들이 활을 하나씩 매고 있는데.. 세상에 그 보기 힘들다는 요정을 이렇게 한꺼번에 많이 보다니.
듣던 대로 굉장히 아름다웠지만 이곳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나 마찬가지. 난 감탄하기보다는 한층 더 숨을 죽이며 기척을 숨겼다.
“아직 인간이 남아있다.”
그 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강인한 인상의 요정청년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살짝 모르길 기대했지만 역시나 그들은 내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다. 일사분란하게 주위를 경계하는 폼이 아무래도 인간에게 호의를 표시할 분위기가 아니다.
..하긴 나라도 동족이 저지경이 되면 인간들이 싫겠다. 난 슬쩍 혀를 차곤 물러날 준비를 했다. 아무리 악한 짓을 하려했다 해도 저 많은 수의 용병들이 모조리 처참하게 죽은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원하던 대로 요정 여인은 무사히 구조됐으니까.
난 저 용병들을 위해 눈물 흘려줄만큼 착하지는 못한 놈이고, 결국 나로선 최선의 결말인 셈이다.
..응? 난 몸을 돌리려다 이상한 광경을 보고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 벌벌 떨고 있는 요정 여인을 부축하거나 치료하는 대신 그 요정 청년이 품에서 단도를 하나 꺼내 여인 앞에 내려놓은 것이다.
“푸른 날개 요정의 긍지를 잃고 인간들에게 더럽혀진 몸. 자결해서 숲의 영혼에게 의탁해라.”
“...!?”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아니 뭐? 자결? 이런 미친놈들이! 요정 여인은 명백히 공포에 질려있었다. 그러나 흉흉한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다.
이래서야 용병들에게 포위됐을 때랑 다른게 뭐냐? 이런 빌어먹을.. 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했지만 그 사이 그 청년이 여인의 팔에 단도를 억지로 쥐어주었고 난 그것까지 본 이상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뭐하는 짓들이야!”
순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지만 그 정돈 나도 예상했다. 난 순식간에 나무와 나무 사이를 빠르게 이동해서 공격을 피해내면서 그들 무리에게 측면으로 접근했다.
그러자 무서운 속도로 요정들이 흩어지며 제각기 나무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흡사 산다람쥐 같은 움직임이다. 별반 힘을 들이지도 않고 부드럽게 다리만으로 나무를 타고 올라가 순식간에 월등히 유리한 나무위의 자리를 각각 차지한다.
하지만, 그것도 이미 알고 있었어! 난 달리던 기세를 살려 무서운 기세로 나무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저들처럼 나무를 가볍게 타고 오르는 재주는 없지만 난 나무와 나무사이를 강력하게 연달아 박차고 뛰어올라 순식간에 나무 꼭대기로 솟아올랐다.
수풀을 뚫고 나무꼭대기까지 솟아오른 내 바로 앞에 깜짝 놀란 표정의 요정 사내 한명이 보인다.
설마 내가 이렇게 쫓아오리라곤 생각도 못했겠지. 난 순식간에 그를 걷어차서 나무 아래로 떨어뜨리고는 곧장 옆 나무로 건너뛰어 그 곳의 한 녀석도 마찬가지로 떨궈버렸다.
그러자 다시 정신을 차린 요정들이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난 재빨리 나무에서 뛰어내려 내가 떨어뜨린 두 녀석의 근처이자 아직도 단도를 들고 멍하니 앉아있는 초라한 행색의 요정 여인 옆에 쿵하고 착지했다.
너무 급하게 뛰어내려 발이 좀 아프지만, 각설하고 일단 한 놈을 다시 걷어찼다. 원체 비쩍 마른 몸에 정통으로 내 발차기를 맞자 그대로 픽 꼬꾸라지는 요정을 무시하고 나머지 한 놈을 뒤에서 덮쳐 순식간에 팔을 봉쇄하고는, 그 요정 녀석의 허리춤에 묶여있던 대거를 뽑아 목에 들이댔다.
“활 안 멈추면 죽인다!”
내 협박이 먹혔는지 파공음들이 일순간에 멈췄다. 난 최대한 침착하게 보이려 애쓰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일단 여인은 구했고 인질도 둘을 잡았다. 전략적으로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의 방편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굉장한 수준의 궁사들에게 완벽하게 포위되어 있다. 저들이 날 죽이고자 한다면 정상적으로는 이곳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 시체가 되어 실려 나가는 것 외에는.
“짜증나게 하지 말고 내려와. 난 짜증나면 손이 멋대로 움직이는 체질이거든.”
그렇게 껄렁거리며 말하곤 대거에 힘을 좀 주자 산개했던 요정들이 하나 둘씩 내 정면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난 그들을 노려보며 조금씩 움직여서 큰 나무를 등지고 섰다. 최악의 경우엔 이 나무를 엄폐로 삼아 도주를 감행해야겠지. 난 개중에서 리더로 보이는 그 요정 청년을 향해 말했다.
“왜 두 명은 안 나오는데? 저격이라도 하게? 난 인질이 둘인데 하나 먼저 죽이고 시작할까?”
그러자 그 녀석의 얼굴위로 놀란 기색이 떠오른다. 쳇, 요정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표정관리는 통 못하시는구만. 이미 처음부터 이 녀석들 인원쯤이야 파악하고 있었고 순식간에 무리들의 수를 파악하는 건 기본중의 기본이다.
아무튼 내 협박에 곧 숨어있던 나머지 두 요정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 보니 그 두 명만 여성이다. 여자라서 숨긴 거였나? 흠, 역시 이 상황에서도 눈이 자동으로 돌아갈 정도로 미인들이군.. 이 아니라. 이제 어쩌지?
“바라는 것이 뭐냐, 인간.”
뭐라고 해야 할까. 인간에 대한 혐오와 경멸이 이보다 더 물씬 풍겨나게 말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까칠하군. 하지만 네놈도 다를 바 없어. 난 그 녀석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전에 하나만 묻자. 저 여인은 왜 죽이려고 했지? 구출하러 온 것 아니었나?”
그러자 요정 청년은 인상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얼씨구? 화를 내? 지금 상황을 모르나본데.
“인간 따위가 참견할 바가 아니다!”
“아~ 그래? 요기 인질이 죽고 나면 좀 참견할 바가 되려나?”
난 건들건들 대꾸하며 대거로 인질의 목에 가느다랗게 혈선을 그었다. 내키는 짓은 아니지만 어차피 이대로 있으면 빠져나갈 수도 없고 성질도 나는 마당이니까.
내게 잡힌 요정는 어떻게든 내게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지만 완벽히 제압된 데다가 애초에 완력으론 나와 상대가 안 된다. 과연 그 요정 녀석은 창백해지더니 급하게 대답했다.
“그, 그만둬라! 우린 그녀를 죽이려고 한게 아니다. 구출하러 온 것도 사실이다.”
“근데 왜 단도 쥐어주면서 죽으라고 한건데?”
“그게 구출이니까! 우리라고 그녀가 죽기를 바랄 것 같은가? 하지만 이미 인간에게 더럽혀진 그녀의 영혼이 훼손되었다. 자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그녀, 유우라를 구하는 일이다.”
난 순간 뒤통수를 사부의 주먹에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청년 요정의 표정은 결코 거짓을 말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기색까지 분명히 담겨있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이 녀석들도 분명 동족을 사랑하고 아끼겠지. 그래서 이들의 관념과 사상으로 가장 좋은 선택을 한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그게 무슨 망할 구출이냐, 영혼이 더러워져서 죽인다고?”
“인간주제에 함부로 말하지 마라! 우리라고 편한 마음일 것 같나? 그러나 그것이 그녀를 위한 일이란 말이다!”
난 버럭 소리를 지르는 청년 요정의 눈가에 맺힌 눈물과 그 뒤에 늘어선 요정들의 하나같은 표정을 보고 온몸에 맥이 빠졌다. 그런 건가.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사고방식 자체가 다른 거다. 그리고 이들도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사실 반 호기심으로 여기까지 참견하게 된 내가 함부로 간섭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말이야, 그건 틀렸어. 난 가슴이 답답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야 이 개자식들아! 고상한척 위선 좀 그만 떨어라. 그깟, 그까짓 강간 좀 당하면 더러운 영혼이 되고 구제받을 수 없어서 자결해야 깨끗해지냐? 하! 이 비겁한 놈들. 너희들은 고작 강간당하고 안당하고로 영혼을 구별하나보지? 니들이 그렇게 벌레같이 보는 인간들도 그러지는 않는다. 이 인간보다도 추잡한 주제에 고상한척만 하는 개자식들!”
내 말이 어지간히도 충격이었는지 요정들이 모두 충격 받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긴, 고상한 숲의 종족들께서 이런 더러운 말을 어디서 또 들어보겠어.
하지만 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난 인간의 논리로밖에 말하지 못한다. 그리고 난 죽어도 요정의 논리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니들도 이 여자가 죽길 바라지 않잖아! 그러면.. 으윽!”
난 순간적으로 뭔가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음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아슬아슬하게 그런 내 앞머리를 무언가 강력한 힘이 스치고 지나간다. 뭐지?! 보이지 않는다?
“허, 마법을 피했는가.”
마, 마법인가? 난 멀리에서 들리는 당혹스런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즉시 인질을 버리고 나무 뒤로 돌아서 이동했다. 그러나 채 나무 어름을 반도 돌기 전에 무언가 강력한 힘이 날 붙잡는 것을 느꼈다.
뭐야! 몸부림을 쳤지만 마치 거인의 손에 붙잡힌 듯이 꼼짝할 수가 없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마어마한 압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날 짓눌렀다.
“크악!”
버티지 못하고 꿇은 무릎이 곧바로 바닥이 파고들어갈 정도로 강력한 힘이다. 온몸에 힘을 모아 저항했지만 고통만 가중될 뿐, 꼼짝을 할 수가 없다. 태어나서 처음 보고, 처음 당해보는 마법이다.
이, 이건 너무 반칙이잖아.. 제기랄! 내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불평하는 순간 압력이 일시적으로 약해졌다.
하지만 난 본능적으로 망치로 못을 두들기듯이 2타, 3타가 이어지리라 판단하고 즉시 몸을 굴려 좀 전의 위치에서 벗어났다. 예상했던 대로 아슬아슬하게 내가 있던 지면이 무언가의 강력한 충격을 받고 움푹 패여 들어갔다.
안심한 난 마법사를 찾기 위해 온 신경을 끌어올렸지만 다음 순간 내가 서있는 지면에 다시금 그 충격파가 내려 꽂혀서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믿을 수가 없군. 마법을 또 피하다니.”
난 마법사의 황당하단 감정이 실린 목소리를 들으면서 다시 압력이 약해진 틈을 타 몸을 일으켰지만 이내 또다시 쏟아져 내리는 압력에 땅바닥을 나동그라졌다. 무섭도록 빠르게 의식이 약해진다.
안 돼!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죽는다! 난 손에 쥔 대거를 움켜잡고는 압력파를 이를 악물고 견디기 시작했다. 압력이 약해지는 잠시의 순간이 유일한 기회다.
그리고 그 순간이 찾아오는 순간 난 온 힘을 끌어 모아 대거를 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집어던졌다. 사실 반 도박이다. 이미 시야가 흐려서 위치도 제대로 파악 못했으니까.
“으음..”
“장로님!”
난 다시금 내려 꽂이는 압력에 쓰러지면서도 히죽 웃었다. 맞은 모양이군. 쳇.. 하지만 이 이상은 무린걸. 난 또다시 약해지는 압력을 느끼며 방어 자세를 갖추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또 한 번의 타격이 전해져옴과 동시에 의식이 멀리멀리 아득한 곳으로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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