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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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는 말은 내가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많은 장면들이 있지만 지금 눈에 보이는 화면이 가장 아름답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아름답다는 기준은 모호하겠지만 보자마자 아름답다는 생각이 바로 떠오를 만큼 내려다 세상은 아름다웠다.
초록색과 푸른색과 갈색의 조합 그리고 눈이 시리도록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다의 일렁임.
차원에 균열을 내려다 멍하니 보게 되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발생하는 당연한 호기심.
낙하하는 속도를 보니 지구와 중력이 거의 흡사했다. 트랜스모퍼시스로 정동혁으로 되돌아갔다.
공간에서 의복과 이어링과 ITB를 꺼내 입고 장착하고 내려선 순간
【연결 확인】
언노운이 돌아왔다는 것은 여긴 에덴 내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나?'
【분석 중입니다】
바닥에 있는 모래를 한 줌 쥐어 봤다. 모래의 감촉이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떨어진다. 곱게 갈린 바닷모래와 살포시 불어오는 바닷바람의 시원함이 마음마저 청량하게 해 주었다.
풍경은 완연한 지구다. 위에서 내려다본 바다와 강, 시리도록 푸른 초원.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부분을 떼어내 옮겨온 것 같은 느낌이다.
【워프 차원 균열 속에 생성된 다차원 공간입니다. 지금도 계속 확장 중인 상태입니다】
'어느 정도 넓은 곳이지?'
【네크로폴리탄과 비슷한 정도입니다】
모래 위를 걸으니 느낌이 새로웠다.
【에덴에서 발생했던 정보를 분석하였습니다】
'벌써?'
【당신은 행동을 분석하면 데오릭스의 함정일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런데도 함정에 빠진 것은 당신의 선택입니다】
'그래, 내 본능이 그러더라고. 마치 거부할 수 없는 무엇처럼 머릿속에서 울려.'
【그것은 여섯 번째 감각 육감입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본체를 회수하면서 육감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육감으로 위험인자를 분류하여 회피할 수 있으며 행운을 찾아 움직일수 있게 됐습니다】
'육감이라. 그래 이곳에 온 것도 다 내 육감을 따라온 거라고 볼 수 있지.'
이미 생명체 하나를 인식했다.
"이곳 정말 잘 꾸며 놓았네."
-쏴아아.
바닷물을 들이치면서 바람을 밀었고 그 바람의 시원함은 말로 표현하기 아까울 정도였다.
세상 걱정이 없다면 이곳을 계속 걷고 싶을 정도로 고즈넉한 소리와 감촉 모두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좀 더 있고 싶지만 어쩔 수 없네. 손님이 왔다는 걸 느꼈을까? 아미도겠지 이 정도 차원을 만들어 낸 존재라면 말이지.'
환경을 봐서는 지구와 밀접히 관계된 존재일 것이다. 육감이 이끄는 대로 왔을 뿐이지만 낯선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길?'
좁은 길이지만 인공적으로 만든 거란걸 알수 있었다. 아니면 이곳을 세팅할 때 만든 것이던가. 오랜 기간 많은 사람의 발길이 닿아서 닳은 흔적이다.
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갔다. 언덕 너머의 풍경은 푸른 초원 지대였다.
양과 소 그리고 동산을 뛰어다니는 양치기 개. 한가로운 농가의 풍경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양치기 개는 나를 발견하고 신기하다는 듯이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녀석의 꼬리가 흔들거리는 것으로 보아 반가움의 표현이었다.
낯선 이를 경계하는 몸짓은 절대 아니다. 내 앞에서 급 브레이커를 걸더니 앞다리를 내밀고 고개를 납작하게 숙였다. 그리곤 다짜고짜 꼬리 프로펠러를 마구 돌렸다.
"야, 인마 낯선 사람이 오면 짖어야지 반가운 척하면 어떡해?"
검은 털과 흰털이 반반이고 머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흰색 털이 귀여운 이 개는 보더콜리라는 종이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꼬리 돌림이 한층 빨라진다.
'세포 노화가 일어나지 않는 조작을 가했을 뿐이지 나머진 그냥 개로군.'
'응?'
순간 깜짝 놀랐다. 어떻게 세포 노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지?
'이거 세포 노화가 일어나지 않는 개인지 확인해 볼래?'
【양과 개 모두 확인했습니다. 말한 대로 세포 노화가 진행되지 않도록 조작된 것이 맞습니다】
'실제 개지?'
【세포 구성까지 완벽한 개와 양과 소입니다. 말도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세포 노화가 일어나지 않는지 알수 있었지?'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영향이 트렌스모퍼시스를 압도하고 있기 때문으로 파악됩니다】
트렌스모퍼시스라는 스킬이 가지는 고유능력의 범위 내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힘이 침범한 것이다. 트렌스모퍼시스를 몇 번 사용하다 보니 서로 파동이 맞아가는 느낌이라고 언뜻 생각은 했지만, 그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나 보다.
'그럼, 내가 쓸 수 있는 스킬이 는다는 소리야?'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권능력이 트렌스모퍼시스를 완벽히 침습하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인지된 상황이 아니므로 결과를 확인한 후에나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언덕 아래 새하얀 벽돌길이 나왔다. 여러 채의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파랗고 초록색의 지붕들이 아기자기하게 모여 있는 작디작은 마을이다.
손때 묻은 흔적이 곳곳에 보이는 벽돌벽을 따라 걸었다. 오래되어 윤이 반질반질 나는 나무 문은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내보였다.
작은 마을. 다만 사람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겠지만.
낯선 외지인이 마을에 관광 온 것처럼 순전히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감상했다.
"이야, 꼼꼼하게도 만들었다."
이 세상을 창조한 존재가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나오는 가장 꼭대기 집에 있다.
"와우."
난 그가 왜 꼭대기 집에 터를 잡은 것인지 알 것 같다. 회백색의 회칠한 건물 사이를 벗어나자마자 드넓게 펼쳐진 바다의 풍경이 한눈에 들었다.
미치도록 아름다운 절경이다. 저길 매일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똑, 똑.
굳게 잠긴 문은 낯선 이와 내방인을 가로막는 경계점이다. 노크 소리가 아주 경쾌하다고 생각했다. 나무의 울림이 너무 좋다.
뒷덜미에서 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귓불을 간지럽히고 지나갔다.
"계십니까?"
바람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에 내 목소리의 울림은 괜한 훼방꾼이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누구신가?"
내부에서 울려 나오는 답신음. 타지 생활을 하던 아들이 오랜만에 아버지를 찾아왔다면 이런 느낌일까? 하지만 나는 그런 쇼 타임을 즐길 여유가 없었나 보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입니다."
"웃기지도 않네."
"진짭니다. 아니라면 어떻게 여기 왔겠습니까?"
-덜컥
문이 바깥쪽으로 열리는 터라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회색의 로브 같은 겉옷에 약간 꾸부정한 허리. 가슴까지 내려오는 흰 수염. 짚고 있는 지팡이는 누런빛마저 퇴색 돼버린 오크 지팡이. 다만 나를 아래위로 살피는 눈빛만큼은 이 자가 노인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했다.
"워프 균열 속에 숨어 계시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누구냐? 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이 영감은 트렌스모포시스를 꿰뚫어 보지 못하나?
노인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보더니 살짝 굽은 등을 펴는 것 같이 뒤로 움찔 물러났다.
"진짜잖아!"
"그렇다니까요."
"어떻게 된 거야? 자세히 말해줘."
"손님 접대를 문 앞에 서서 하시렵니까?"
"아닐세. 들어오게."
"여기 잘 꾸며 놓았네요."
"그런가? 하하, 시간이 많이 남아도는 노인네의 안줏거리지."
노인이 메타트론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 앉게. 혼자 살다 보니 마땅히 대접할 것이 없네."
"혹시 식사는 하셨습니까?"
"보다시피 귀찮은 것은 질색이라."
집안 내부는 주인의 성격을 대변하듯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 집에는 아쉽게도 주방이라는 공간이 없었다.
"갑자기 허기감이 몰려오는 데 혹시 식사 준비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네."
ITB에서 여러 가지 요래 재료를 꺼내고 탁자 위에서 바로 요리하기 시작했다.
고기 굽는 냄새가 집안에 가득 차오를 때 우리는 이미 애피타이저만으로 포도주 한 병을 깔끔히 비웠다.
본격적으로 고기를 플레이팅 했고 썰고 꼽아서 입속에 담는 호사를 즐겼다.
"음, 음, 음. 정말 맛있어. 감칠맛이 혀 위에서 춤을 추는 것 같네. 이런, 너무 오랫동안 미각의 즐거움을 잊고 있었나 보다네."
"한잔하시죠."
메타트론의 빈 잔에 적포도주를 따랐다.
그는 가공된 음식이라느니 권능이 묻었다느니 그런 쉰 소리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기분에 억지 맞춤도 아니다. 그저 자신 앞에 펼쳐진 것을 즐길 뿐이다.
그는 내가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하지도 않은 모양이다. 놀라움의 크기도 작았기에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식후 불로장생초라는 궐련까지 나눠 피고 커피까지 다 마실 동안 그는 내게 이곳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가령 바니가 똥을 어떤 자세로 싸느냐는 것 등, 가끔 양 모는 것을 게을리한다는 둥, 바람의 강도는 어떠냐는 둥, 풍경이 마음에 드느냐는 둥.
그의 울타리 밖으로 뛰어나가려니 자꾸 뒷덜미를 잡고 끌어댄다.
"그러니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어? 그야 그쪽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하긴 하지."
"여기보다 더하지요. 거대한 태풍이 불어서 지금까지 애써 만들어 놓은 것이 다 날려가게 생겼으니까요."
메타트론을 처음 본 순간 내 육감은 이렇게 말했다. 이 천사는 진국일 거라고.
언노운의 말도 있고 해서 난 내 육감을 신뢰하기로 했다.
그간 일어난 일을, 제스처를 가미해서 제법 세세한 부분까지 디테일을 살려서 설명했다.
이곳에 한낮에 도착했는데 벌써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내 이야기는 계속됐다. 메타트론은 몰두하면서 가끔 담배를 입에 물기도 했다.
새삥을 뜯은 건데 삼분의 이 이상은 메타트론이 다 피운 것 같다.
이야기 중간중간 이해가 되지 않거나 사건 연결이 안 되는 부분은 즉시즉시 질문을 해 왔다.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은 아이들이 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를 집중하는 것처럼 메타트론은 내 이야기에 연신 고개를 끄덕여 됐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긴 이야기가 끝이 났을 때 메타트론은 창문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밤하늘은 어떤가? 조금 어둡지 않아? 달빛의 강도를 조금 더 키우는 건 어떨까?"
"괜찮은데요? 여기서 더 밝으면 밤이 아니죠. 밤은 밤대로 그 맛이 있거든요."
"그렇지? 파도 소리, 바람 소리 소리에 더 집중할 수 있으니까."
한숨 돌리자는 이야기다. 나는 노인 앞에서 일회용 커피를 타고 담배 한 대를 물었다.
"지구가 이곳과 같았으면 좋겠네요."
"인간이 없다면 가능하겠지."
"섬뜩한 소리네요."
"자네는 이미 인간이 아니잖은가? 인간으로 살았을 때의 기억 때문에 그렇게 매달리는 건가?"
"어쩌면요···."
"자네라면 맘에 두고 있는 인간들을 살만한 행성으로 옮겨 다시 시작할 수도 있을 걸세. 할수 있다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네. 선택의 폭도 그 가치 기준도 다르다는 것일세."
"그렇기야 하겠지요. 하지만 전 있는 그대로 지구가 더 마음에 드네요."
"그게 자네의 결정이라면, 단지 천사에 대한 얄궂음이 아니고 악마에 대한 복수심이 아니라면 말일세."
"천사와 악마의 기준이 뭡니까? 인간의 눈으로 보면 누가 악마고 누가 천사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세상이 이렇게 변한 것은 천사 때문이 아닙니까?"
"그건 아니지. 그렇게 되도록 빌미를 제공한 것은 인간이 아닌가? 과학의 발전을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산물들 때문이지. 마음에 악이 깃들면 그건 이미 경쟁이 아니야. 인간의 잦은 다툼은 발전하기 위한 경쟁이라고 누누이 말해 왔었지. 하지만 대량 학살이 자행되고 그럴 힘을 손에 넣은 순간부터 경쟁은 더 이상 발전이 아니게 됐어."
이제 메타트론은 본론에 접근할 생각인 모양이다.
"제3차 세계 대전이 예견되었고 미래를 인지한 몇몇 우수한 천사의 입을 통해 나온 것은 곧 계시와도 같았네. 인류는 대량 학살에 휘말릴 것이다. 대기는 시커먼 연기로 둘러싸이고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것이 생명력을 잃고 바스러져 갈 것이다. 진정한 아마겟돈의 시작이니 뿔 나팔을 불 때가 도래했도다."
요한계시록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 같았다.
메타트론은 무심한 눈길로 창밖을 응시했다. 난 이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말을 자르거나 대구조차 하지 않았다.
"천사는 인간의 역사에 개입할 수 없어. 학살을 막고자 했지만, 그 또한 인간 역사의 일부분이니···."
"그중에 가장 열성적인 천사는 가브리엘이었네. 인간의 경쟁은 이미 경쟁이 아니다 악이 깃든 타락이라고 주장했어. 하지만 의회에서는 절대 인간의 역사에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을 확고히 했네."
"그런 가브리엘에 조언한 것은 동료도 다른 천사도 아닌 루시퍼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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