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과 거짓은 종이 한 장 차이
진실과 거짓은 종이 한 장 차이
데오릭스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이 셈족의 AI는 감정이 없는 프로그램일 뿐이다.
외형에 따른 퍼포먼스를 기대하면 곤란하겠지.
AI에 거짓과 진실의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고 호소해봤자 의미 없는 일이란 것을.
"물론이다. 그분의 종으로서 내가 한 말이 진실임을 맹세한다."
다소 퉁명스러운 대답이다. 걸음의 속도는 변화가 없다.
"봉인이 해제됐으면 생텀 의회에서 에덴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텐데?"
"조금의 시간은 벌 수 있다. 이곳은 오랫동안 잊힌 채로 지내왔으니까."
"두루뭉술하게 대답하지 말고."
"에덴의 모든 기능을 정지시켜 놓았다. 즉 그들이 아직 에덴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어. 결정적으로 보호막이 단번에 해제되는 것은 아니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거다."
"내가 온다는 것은 루시퍼도 알고 있었을 테지? 너희들에겐 에덴조차 계획의 일부분일 뿐인 거냐?"
"어차피 에덴은 기능을 상실했어. 지금은 거대한 동물원일 뿐이지. 천사가 다시 이곳에 들어온다 해도 쓸고 닦는 게 전부야."
서전 임펙트를 일으킨 것은 악마가 아니고 천사라고 해도 그렇게 놀랍지도 않다.
이미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다만 궁금한 것은 계기다.
야훼는 이곳에 떠날 때 천사들에게 절대 인간의 역사에 관여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 명령은 천사들에겐 절대적일 것인데 그걸 배신하고 인간을 멸망시킨다?
뭔가 조금 앞뒤가 맞지 않는다.
"가브리엘과 세 명의 천사가 야훼의 명령을 어긴 것은 좀 말이 안 되는 소리처럼 들려 그들은 칠 대 천사다. 천사들의 모범이 될 자들이 어떻게 그런 반역을 꾀한 것이지?"
"잘 생각해 보면 야훼의 명령을 어겼다고도 할 수도 없다. 의회에서는 타락한 것을 혐오하고 소멸시키려 하지. 인간이 타락했다고 판단한다면 소멸은 당연한 거야. 그리고 그들의 계획을 자네도 알고 있잖은가? 이건 인간의 멸족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거라고."
"인간을 타락시킨 것은 가브리엘인데?"
"타락은 보는 시점의 차이일 뿐이다. 네가 말하는 서전 임펙트 전 이미 인간은 타락했다고 결론이 났었어. 단지 만장일치를 넘지 못해 흐지부지한 것이었을 뿐. 1차 세계 대전은 경고였고 2차 세계 대전에서 그리고 인류가 원자폭탄을 사용해 대량 학살을 벌이는 순간 이미 인간은 타락했다고 가브리엘은 생각했거든. 타락했으니 소멸시키는 건 당연한 절차."
"그래서 의회 만장일치를 끌어낼 목적으로 서전 임펙트를 일으켰다?"
"확실하게 어필하려면 그 정도 임펙트는 있어 줘야 했으니까."
"넌 왜 천사를 배반했지?"
"난 중립적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인간은 야훼가 만든 창조품, 천사라 해도 손대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루시퍼와 손을 잡았나?"
"이해타산이 맞았다고 할 수 있지."
"그래서 인류의 존폐 위기를 막았나? 그게 지금 현실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해?"
"물론이다. 우리 계획은 거의 완성 단계에 있었다."
"곧 있으면 지구 치환이 이뤄지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우리 계획의 중심은 오로지 너 하나야! 너 하나를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거지. 네가 우리 계획대로만 되었더라면 의회의 계획을 저지했을 테니까."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오로지 천사를 상대하기 위해 만든 무기잖아."
"물론, 하지만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파괴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야. 제어만 할 수 있다면 평화를 위한 단초로서도 이용할 수도 있는 것일 테지."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루시퍼가 만들었나?"
"아하, 넌 정말 궁금한 것이 너무 많구나."
"안 궁금하게 됐냐고! 진실을 알아야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을 테니까."
"바로 잡아?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 하고 싶은 건데?"
데오릭스와 친구처럼 편하게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데오릭스의 인공지능 시스템이 내 성격에 맞춰 대화법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 정하지는 않았어. 신중할수록 좋은 거잖아."
"시간은 그리 녹록하지 않을 거야. 빨리 결정하라고 다음 수까지 생각해야지."
"야. 이 정도면 진실 거의 다 안거잖아. 뭐가 더 필요해?"
데오릭스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너! 너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아니냐고."
"나? 데악마 말이야?"
"물론,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잘 알아야 그걸 제대로 다를 수 있을 거다."
"이야기해 주면 되지? 굳이 다른 장소로 가야 할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거야?"
"가 보면 알아."
조금 대화가 끊어졌는데 내가 다시 시작했다.
"주인을 배신한 AI네." "닥쳐! 이게 다 인간 때문이야."
"근데 루시퍼가 어떻게 여섯 네필림을 이곳에 데려왔지? 이곳 천사들은 또 어떻게 추방했고? 네가 했어?"
"난 그런 건 못해. 천사를 모두 추방한 것은 루시퍼도 나도 아니야."
"그럼?"
"메타트론."
"그가 왜?"
"모르지."
"메타트론도 루시퍼와 손을 잡았다는 건가?"
"그건 아닐 거야. 루시퍼가 이곳에 들어오도록 허락한 것은 나이니까."
"서로 윈윈했나?"
"후, 과거의 악랄했던 그 밤의 기억을 장난처럼 말하지 말아 줬으면 해. 의회에서 에덴을 손에 넣고 이용하고 싶어 했고 난 그분의 종으로서 그것을 막고 싶었을 뿐이야."
"와, 그렇다고 악마 새끼와 손을 잡아? 그게 더 중죄야 인마." "알아.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모든 명령 중 최우선 순위는 에덴을 지키는 거라고."
"그분의 종이 에덴 지키겠다고 악마와 거래했어? 너도 타락했군."
"뭐라고 해도 좋아. 난 내 선택을 지금까지 후회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어."
"그래서 루시퍼에게 에덴을 넘기고 루시퍼와 날 만들 계획을 세웠어?"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한 조각에 인간의 DNA와 세포를 합성해 생명체를 만들었어.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금단의 행위였지만 에덴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었다고. 루시퍼는 이곳을 망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그것으로 날 협박했으니까."
"흥, 자기 행위를 어쩔수 없었다는 듯이 그럴싸하게 포장하지 마. 넌 그분을 배반한 종자일 뿐이야."
"그래서 널 만들었고 그 결과물이 내 앞에 서 있는 너겠지."
"아, 갑자기 생각나서 하는 질문인데? 너 계속 날 지켜봤냐?"
"너희 시간으로 매일매일은 아니고 간혹. 처음에는 네 존재가 잡히지 않아서 실패했나 했지. 루시퍼도 마찬가지였고."
내가 하우레스 라인 안에 있을 때다. 하우레스 라인은 천사의 거룩한 희생으로 만들어진 결계. 그 결계를 데오릭스도 루시퍼로 뚫지 못했다는 거다.
"그러다 어느 날 네가 잡혔어. 생각보다 한심하더군.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지만 루시퍼가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어."
"혹시 중국 상하이 알아?"
"물론, 그때 원자폭탄이 터졌을 때를 말하는 거지?"
"그것까지 알고 있었나? 그때 날 구한 것은 누구지?"
"루시퍼야. 정확히 널 구한 악마는 릴리스였고."
"그때 연옥으로 날 워프 시킨 것이 릴리스였다고?"
"그렇다고 했잖아."
"루시퍼는 날 계속 지켜보고 있었구나."
"당연한 소리 아냐? 네가 이번 계획의 핵심이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잖아."
잡담까지 섞으며 데오릭스와 나란히 걸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시설물에 방어 시스템은 없는 거야? 지금 나 같은 놈을 축객할 수는 없는 거야? 내칠 무기 같은 것 말이야."
"당연히 있지. 하지만 네겐 소용이 없다는 걸 알기에 발동하지 않는 거고. 즉 득보다 실이 많다는 거지."
"그분이 만든 시설물인데 강력한 무기 없어? 악마를 물리칠 만한?"
"무슨 소릴 하고픈 거야? 악마가 어떻게 여길 접근해? 뒈지려고?"
"루시퍼는 왔잖아?"
"야, 그놈이 그냥 대놓고 왔을까 봐? 처음엔 당연히 숨어서 수작질을 걸었지."
"그래서 루시퍼의 말에 홀랑 유혹당해 여길 열어줬다?"
"미안하지만 어디까지나 난 아니야! 문을 열어 주자고 한 건 메타트론이었어."
"와, 도대체 너희 관계가 어떻게 된 거야?"
"생텀 의회는 분열되었고 가브리엘 쪽이 에덴을 사용하려 하자 메타트론이 에덴으로 급히 넘어왔어. 그는 이곳을 숨기고 싶어 했지. 이 큰 에덴을 숨기는 건 요원하지 않은 일이었어."
"딱 그 점을 이용해 루시퍼가 제안했겠지? 여섯 네필림의 권능을 사용해 방어막의 역장을 일으키게 해서 에덴을 숨긴 거였네. 에덴의 방어 시스템을 내부로부터 역으로 발동되게 해서 스스로가 자신을 지우게 만드는 방법이었군."
"정확히 설명대로. 난 에덴을 지키기 위해 어쩔수 없이 루시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메타트론은? 왜 도망간 거야?"
"루시퍼 때문이지. 그가 가진 기록지를 보고 싶어 해서."
"그럼, 그전까지 네가 훔쳐본 것이구나."
"어쩔수 없었어. 에덴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한 희생도 했을 테니까."
"그걸 희생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배신이라고 하는 거다."
"네가 내 입장이 되어 봐도 별수 없을걸. 말했잖아 내 최우선 순위는 에덴을 지키는 것이라고."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 한 참 걸었는데 마침내 데오릭스가 한 곳에 멈췄다.
"속죄의 방?"
"잘 알고 있군. 저번에 보여준 영상이 꽤 도움이 됐나 보네."
"뭐? 어쩌라고? 내가 속죄라도 해야 해?"
"후, 들어와 봐. 그럼, 알수 있을 테니."
"잠깐. 내가 날 알아서 뭐 하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이미 난데?"
"멍청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만들기 위해 루시퍼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야 해."
"네가 말해 주면 되잖아?"
"그러니까 따라 들어와. 이곳에서 이야기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어."
속죄의 방. 저번 영상에서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나와 있지는 않았다. 단지 지도를 외우다 보니 이곳이 속죄의 방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고 알고 있을뿐.
데오릭스는 이미 안으로 들어간 상황이다.
"제길 다시 한번 나를 더 속이면 아예 에덴을 아작내 버릴 테니까."
나는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를 가나 기본적인 구조는 상하좌우 아래위 다 하얗게 빛나는 묘한 재질로 만든 곳이다. 재질은 알수 없다. 언노운이 없으니, 분석도 안 되고.
돌은 당연히 아니고 금속 재질인 것 같으면서도 뭔가 코팅된 플라스틱 느낌도 난다.
역시 눈으로 보고 파악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한계다. 다른 구조물은 없다. 텅 빈 방이다.
"여기로."
방 가운데 서 있는 데오릭스가 손짓했다.
"뭔, 참 복잡하기도 하구나."
데오릭스와 마주 보는 위치에 왔을 때였다.
데오릭스는 고개를 까닥 숙여 보였다.
나는 그의 제스처를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 그건 인간들이 흔히 하는 목례가 아니라는 것은 금방 알았다.
"일단은 널 구금 조치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서다."
-팟
"하, 미치겠군."
이곳으로 날 유인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땐 이미 늦었다는 것도 알았다.
내가 데엑마인 것을 알면서도 여기 데려왔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돌아갔다.
-피이이이이잉
공간이 일그러졌다.
차원 균열 패시브 발동이라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진 않을 터.
하지만 균열은 막 변신해 나가는 나를 빨아들이듯이 삼켰다.
무한의 공간.
어둠과 무지개색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소용돌이치듯이 빨려 들어갔다.
빙글빙글 돌아가며 빨려 들어가는 곳의 종착점이 어딘지는 알 수 없다.
집중력을 잃지 않도록 신경 쓰며 능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본능이 위험을 감지하고 내 행동에 제동을 걸었다.
이 구성을 무너뜨리면 안 된다는 촉이 나의 행동을 막아냈다.
"쳇! 데오릭스···."
데오릭스를 욕할 필요는 없다. 나 자신이 멍청해서 그런 거니까. 신중치 못한 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었으니까.
'점?'
무지개색 소용돌이 속에서 언뜻 살짝 빛을 내는 작은 점을 발견했다.
이번에도 그렇듯이 알수 없는 직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래비티 어노멀리를 사용해 그 점을 향해 날았다.
점은 점점 가까워졌고 점점 커졌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변한 거대한 몸이 들어갈 정도의 원형인데 이 또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빨려 들어가는 속도를 제어할 수 없기에 스쳐 지나가면 그대로 끝인 상황이다.
본능을 믿고 뛰어들었다.
-쓔우우우욱
몸이 추락하는 느낌을 받았다.
-팟
어둠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양털 같은 구름과 맞닿아 있었고 지면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너무나 새파란 하늘, 보드라운 양털 구름, 물론 물방울로 몸이 젖었지만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몸을 뒤집자, 지면이 보였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