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가장 높은 땅의 문 앞에서
이그니스가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한 번도 못 본 낯선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하늘은 하얀색. 태양이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주변은 밟고 따뜻했으며, 잔디밭인 지면에는 구름이 얕게 깔려 있었다.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쾌적했다.
"여기가 그 유명한 천국인가."
"여기서는 그렇게 안 부르고 '가장 높은 땅'이라고 말하는 거 같던데."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거기에는 젊은 시절을 그대로 유지한 프로스트가 있었고, 옆에는 프로스트와 나이 차가 크게 나 보이는 어린 여성이 그의 팔을 붙든 채 생글거리고 있었다.
"프로스트 아저씨? 어떻게······."
어떻게 살아있는 거냐고 물으려다 바로 입을 다물었다.
프로스트가 멀쩡히 서 있는 까닭도, 지면에 구름이 잔잔히 깔린 이곳의 정체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습니까. 전 완전히 죽어버렸나 보군요."
"그런 거 같다. 근성 없는 네크로맨서 놈. 돈 쥐여줄 때부터 무리라고 우겨대더니만. 너무 일찍 보내버렸잖아."
"억지 부려놓고 근성 없다고 구박하는 건 좀······."
이그니스가 운을 떼자 프로스트의 팔을 붙들고 있던 여성이 그의 편을 들어줬다.
"맞아요. 여기선 함께 있을 시간을 만들어 준 것만으로 고맙다고 해야 할 부분이라고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
"그, 그건······. 그치만 내가 수도에 있었으면 현자들처럼 이용해 먹으려는 놈이 나왔을 거고. 그림 폐하의 명령도 있었고······."
"변명하는 남자는 싫어해요, 프로스트."
"으, 죄송합니다. 여모님."
만담을 떠오르게 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이그니스가 입을 쩍 벌리고 열었다.
"부인? 따님이 아니라?"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샬롯이라고 해요."
"큭큭큭. 잘 어울리지?"
순간적으로 과시욕이 발동한 프로스트가 으스댔지만, 그의 의도와 달리 이그니스는 죽은 물고기 같은 눈을 했다.
"아니 누가 봐도 나이 차 심하게 나잖아. 솔직히 실망인데 아저씨."
"뭐, 뭐 임마? 야. 얘 모습 바꿔서 사기 치고 있는 거야! 원래는 얘가 나보다 세 살 위··· 끼야아아악!"
영웅에게 어울리지 않는 새되고 처량한 비명이 울렸다. 샬롯이 프로스트의 겨드랑이 아내를 움켜쥐고 시계 방향으로 비튼 탓이다.
"프로스트, 뭐라고?"
"나, 나, 나이 차가 무슨 상관이겠어! 어차피 여긴 죽은 뒤의 세계인데!"
"어머나. 여자가 원하는 말을 꼭 여자 입으로 말해야 하나요!"
"세, 세 살 연하! 알겠냐 이그니스, 우리 마누라가 나보다 세 살 어려!"
"아, 그러십니까."
프로스트가 없던 가문을 혼자 지켜온 여성의 억셈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괄괄한 성격인 걸까.
깊게 파고들면 자기도 꼬집힐까봐 몸을 사린 이그니스는 속으로 '과연 프로스트 아저씨의 부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아, 뭐 잡담은 이쯤에서 줄이고. 어떠냐 이그니스. 같이 갈래?"
"어디로 말입니까."
"어디긴. 아랫세계에서 천국이라 부르는 곳이지."
"하지만 여기가 거기 아닙니까?"
"말했잖아. 여긴 가장 높은 땅이라고. 입구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고, 진짜는 저쪽이야."
프로스트가 손끝으로 가리킨 곳에 시선을 돌리자 거대한 문과, 시야에 전부 들어오지 않는 광대한 도시가 나타났다.
"무슨?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거야 네가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해서 그런 거고. 낙원은 항상 가까이 있는 법이지. 종교 식으로 바꾸면, 믿음이 부족하네 어쩌구 하는 거 있잖아."
"미묘한 비유네요."
"쳇. 어쩌겠어. 사실 나도 최근 와서 마누라한테 들은 게 전부인데."
"그래서 저기가 천국이라는 겁니까······."
"생각했던 거하고 많이 다르지?"
생각을 대변한 말에 이그니스의 고개가 크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인류왕국의 수도에 없었던, 백색 마탑과 좋은 경쟁이 될 것 같은 마천루를 이루는 건물들.
간판은 번쩍이고, 마차에는 말이 없다. 문 바로 너머의 도로에는 말쑥한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처음 보는 기계를 손에 쥔 채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솔직히, 낙원이나 천국처럼 보이는 세계는 아니었다.
"문 안쪽 사람들은 '게임 판타지 세계'라고 부르나 봐요."
"게임······? 오락보다는 일하는 걸로밖에 안 보이는데요?"
정확한 지적에 프로스트보다 가장 높은 땅에 오래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샬롯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사람에겐 사람의 수만큼의 즐거움이 있는 법이니까요."
"안쪽에는 잠도 안 자고 영원히 악마를 잡아 죽이는 곳도 있다더군."
"허어."
"아무튼 너도 가자. 저쪽 세계에 미련도 안 남았을 거 아냐."
"그야 그렇지만······."
이그니스는 망설였다.
프로스트의 말대로였다.
미련은 없다.
첫 현자의 공방을 이용해 강자를 몰살하려던 얼음 장군의 야망은 저지했고, 프레이가 어른으로 성장한 것도 봤다.
미련은 없지만, 그가 가장 높은 땅의 문을 넘기엔 한 걸음의 용기가 부족했다.
이그니스에겐 그 감정을 문장으로 바꿀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 속내를 날카롭게 꿰뚫어 본 프로스트는 그를 대신해 말했다.
"죄책감이구나. 튜버경과 함께 마왕군을 만들어 버린."
이그니스는 고개를 숙이고 침묵으로 긍정했다.
마지막에 프레이와 대화하면서 새삼 깨달았지만, 이그니스 때문에 운명이 뒤틀린 사람은 저 땅 아래에 얼마든지 있을 터였다.
그걸 생각하자니, 도저히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없었다.
스스로 채운 감정의 족쇄다. 이것만큼은 프로스트도 풀어줄 수 없었기에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알겠다. 언젠가 마음이 풀리면, 그때 다시 만나자."
"감사합니다. 프로스트 아저씨. 전부 다."
"됐어. 선배가 후배를 챙기는 건 당연한 거니까."
그러자 샬롯이 불쑥 끼어들었다.
"말은 당연하다 해도 말이죠, 프로스트가 여기서 다시 만났을 때 당신 얘기를 얼마나 했는지 몰라요. 여기로 못 올까 봐 걱정도 많이 했고. 아랫세계 시간으로는 하루 정도?"
"제, 제인 엄마! 그런 건 말 안 해도 돼! 그보다 빨리 가자고!"
"어머나~ 쿨하게 떠나려고 했는데 애간장 태우던 게 들켜서 부끄럽나요? 귀여우셔라~"
"샬~롯~!"
보기 드물게 얼굴이 빨갛게 된 프로스트는 그녀를 옆구리에 낀 채 씩씩거리며 문으로 향했다.
"어이, 이그니스!"
그러다 갑자기 멈추더니, 등을 보인 채 소리쳤다.
"잠깐의 이별이다. 저편에서 다시 보자고!"
***
프로스트와 그의 아내 샬롯이 떠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애초에 가장 높은 땅은 아랫세계와 시간의 개념이 다르니까 헤아린다 해도 의미가 없었다.
이그니스는 멀뚱히 선 채, 문을 지나 게임 판타지 세계로 새로운 모험을 떠나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피부색, 용모, 인종에 상관없이.
모두가 저편을 향한 호기심과 기대를 품은 채 앞으로 나아갔다.
모험을 떠날 자격이 없거나, 그 마음에 희망과 기대를 품지 못한 사람은 그저 가장 높은 땅의 구름 낀 초원을 방황할 뿐이다.
긴 시간 동안, 멀뚱히 선 채 문을 바라보고 있던 이그니스처럼 말이다.
그렇게 헤아릴 필요 없는, 끝이라는 게 보이지 않는 죄책감과 망설임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생각하는 것조차 포기해 가던 이그니스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뻣뻣하게 굳은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있던 건, 이글거리는 불처럼 시선을 사로잡는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여성.
이그니스는 다시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린 채 답했다.
"서 있었어."
"문이 앞에 있는데도?"
"갈 수가 없어서. 갈 자격이 없는 거 같아서."
"그러면, 같이 가보는 건 어때요?"
이 세상에서 그의 죄를 위해 기도해줄 수 있는 그녀는 손을 꽉 붙든 채, 언젠가 봤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먼저 가지 말고요. 이그니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절대로 떨어질 것 같지 않던 이그니스의 발이, 저절로 앞으로 향한 것이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영원 같았던 순간을 지나, 두 사람은 앞으로 향했다.
끝나지 않는 모험의 꿈. 그 너머를 향해.
- 작가의말
엔딩 아닙니다.
우리 식당 아직 영업합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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