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사망 플래그
"자네, 이번 전쟁이 끝나면 뭘 하고 싶은가?"
"예! 고향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녀와 결혼식을 올릴 예정입니다!"
"그 못생긴 얼굴로 잘도 여자가 생겼군!"
"그렇습니다!"
"축복하마! 결혼식 날에는 꼭 부르도록!"
"감사합니다! 알겠습니다!"
좆됐다.
옆에서 듣고 있던 병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공포에 떨었다.
그곳은 인류왕국의 분쟁지대.
판타지 세계 3대 세력에 들지 못한 소국이 인류왕국 38개 대영지 중 하나라도 빼앗아 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 전장.
51개 대영지로 구성되었을 당시 마왕군이 13개 대영지를 점거하는 바람에 국력이 크게 약해졌다지만, 과거에는 기둥왕이라는 존재 자체가 억지력이었기에 주변 소국들도 섣불리 침략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왕이 즉위한 지금은 다르다.
철마라면서 증기로 움직이는 장난감을 만들어 부수고, 신형 전함도 진수식에 나가 때려 부숴버렸다.
이런 아둔한 여왕이 상대라면 대영지 하나 정도는 빼앗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게 소국들의 판단이었고, 온갖 명분을 들이대며 전면전은 안 일으키면서 영지 분쟁만 될 정도의 전쟁을 일으켰다.
대부분의 명분은 족보에 따른 정통한 대영지의 후계자라는 식의 주장이었고, 그중에는 피자에 파인애플을 올리는 걸 정당화시키겠다는 명분도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명분만 만들면 군사를 일으켰기에, 후세의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 소국들이 일으킨 전쟁을 모두 합쳐 '아무 말 전쟁'이라고 부른다.
병사가 속한 부대와 지휘관은 이 아무 말 전쟁의 전장에 배치되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가장 전투가 격렬한 곳에 말이다.
"다음! 자네는 전쟁이 끝나고 뭘 하고 싶은가!"
"예! 이번 전쟁에서 고아가 된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쳐주기로 했습니다!"
"악기는 다룰 줄 아나?"
"피아노가 전공이고 바이올린도 다룰 줄 압니다!"
"믿을 수 없군. 당장 연주해보도록!"
지휘관의 지시가 떨어지자 세상에서 가장 작을 것 같은 바이올린을 꺼내든 병사는 놀랍도록 섬세한 선율을 감성이 메마른 전장에 퍼트렸다.
오랜만에 문화를 느낀 지휘관은 저절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는 그의 어깨를 강하게 두들겼다.
"빌어먹을! 백 점 중에 백이십 점짜리 재능이로군! 연주하기 전에 내 저택에 가서 사정을 말하도록. 집사가 구호물자를 추가로 내줄 거다!"
"감사합니다!"
"다음! 다음! 다음!"
젠장. 젠장. 젠장.
훈훈한 광경이 연출될 때마다 사고방식이 부정적인 병사는 마음속으로 계속 젠장을 연발했다.
애인과 키스할 거라느니. 고백할 거라느니. 헤어진 부모의 소재지를 찾았으니 만나러 갈 거라느니. 다리를 잃은 동생을 어깨에 얹고 서커스를 보러 갈 거라느니.
어느 병사든 단편소설 하나는 거뜬히 뽑아낼 것 같은 애절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용케 이런 사연 있는 병사들만 모아서 부대를 꾸렸다는 점은 경이로움 마저 느껴진다.
그리고 부정적인 병사는 알고 있었다.
큰 사연에는 확실한 죽음이 기다린다는 것을.
이른바 '사망 플래그'라는 것을 말이다.
그건 그에게 있어 큰 힘에 큰 책임이 따르는 것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상식이었다.
그리고 이렇게도 생각했다.
이 세상이 연극이고 대본을 쓴 작가가 실력이 있다면 여기서 전부 다 죽일 거라고. 그러는 게 가장 극적이니까.
'엄마, 우린 다 지옥으로 가요. 편지는 못 쓰지만 부디 건강하세요.'
그는 속으로 평소 좋아하던 음유시인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전장에서 전멸할 날만을 기다렸다.
한편, 이 지휘관과 벌써 여러 전장을 같이 다녔던 베테랑 병사는 그의 생각을 정확히 읽고는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절대 안 죽을 테니까 걱정 말라고. 저 양반만 믿으면 돼. 숨겨둔 비장의 술을 걸고 내기하도록 하지."
그것도 사망 플래그잖아.
나름대로 격려해주려고 한 말임을 알기에, 부정적인 병사는 차마 그렇게 반박할 수 없었다.
***
그리고 작전 투입 당일.
"일어나라 엑셀리온의 용맹한 아들과 딸들아! 기사와 같은 용맹함으로 이 땅을 지켜내는 거다. 너희는 오늘 죽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정했다!"
" "
지휘관의 격려와 연설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감정에 휘둘리면서도 흐름을 정확히 읽어낸 용병술로 전장을 무너지지 않게 유지했다.
그뿐이랴.
"자네가 죽을 곳은 여기가 아니다!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쳐주기로 했을 텐데?"
"죽는다는 건 쓸데없는 걱정이다! 자네가 걱정할 건 내게 보낼 청첩장을 어떤 종이에 쓸지다!"
"문제랄 것도 없다! 전원을 살려 너희 부모에게 돌려보내는 건 나에게 있어 퀴즈가 아니라 당연한 일이니까!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어!"
총에 맞고 활에 꿰뚫려도 위험지역에 돌진해 자기가 구하겠노라고 약속한 병사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이걸 다 구하네.'
지휘관에게 구출되어 구호 막사로 옮겨진 부정적인 병사가 넋을 잃은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베테랑 병사가 그의 다리에 붕대를 감아주며 말을 걸었다.
"말했지? 저 양반만 믿으면 된다고."
"선배님은 어떻게 지휘관님을 그렇게까지 믿을 수 있는 겁니까?"
"그야 저 양반, 플래그 회수 더럽게 못 하거든. 저 말빨로 호감 산 여자가 내가 아는 것만 따져도 일곱 명인데 단 한 명하고도 안 이어졌어."
" "
"그뿐이랴. '해치웠나'라고 말하고 발이 미끄러져서 적군 숨통을 끊어버리더라니까."
"그정도면······."
"맞아. 귀신 들린 산장에서 제일 먼저 무리에서 떨어져도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타입의 녀석이지."
"플래그 하난 귀신같이 피해가는군요."
"운명도 타고난 재능인 거야."
그렇게 떠드는 사이에도 지휘관은 병사를 두 명 더 구해왔다.
뿐만 아니라 구하는 와중에도 성실해 보일 정도로 사망 플래그를 쌓아 올렸다.
"기운이 없다면 이거라도 마시고 있도록. 후훗, 사실 수통에 술을 좀 담아왔지. 다른 부상병하고 나눠마신 뒤에는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가지고 있게나. 그 수통은 고향의 소꿉친구가 준 부적이니, 반드시 회수할 걸세. 이 멍청한 전쟁이 끝나면 여기 전원하고 같이 마시고 싶군. 하하하하하!"
러브 코미디였다면 보는 사람을 답답하게 만들어 죽일 타입의 인재였으나, 사방천지에 흉조와도 같은 사망 플래그를 뿌려놓고도 살아남는 전장의 그는 너무나 믿음직해 보였다.
- 작가의말
플래그 더럽게 회수 못 하는 타입의 러브코미디 주인공들에겐 사실 전쟁영웅의 재능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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