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성녀
"그럼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교단에서 파견된 시험관의 선언에 시험장에 있던 학생들이 일제히 시험지를 뒤집었다.
과목은 신학.
교단에서 서부 아카데미로 파견을 나왔던 그녀는 '그래도 교단 출신인데 신학은 쉽지'라고 생각했다.
실로 안일한 판단이었다.
신학은 신과 밀접하게 관계있다고 하나 어쨌든 학문.
시험지에는 성지를 두고 둘러싼 역사적인 전쟁부터 시작해 성자의 연혁, 그리고 바위 공주가 신벌을 받은 과정 등을 묻는 복잡한 문제가 실려 있었다.
어느 것이든 단순한 믿음만으로 풀릴 문제가 아니었다. 성지와 역사에 대한 지식이 필요했다.
심지어 바위 공주가 받은 신벌의 경우엔 전설 속의 이야기이지 않던가.
북쪽 바다의 잊혀진 섬나라가 실제로 존재했으며, 학문의 한 갈래로 취급되어 신학과 고고학 양쪽에서 신경 쓴다는 사실을 생전 처음 알게 된 그녀는 경악했다.
'말도 안 돼. 여신님의 총애를 받은 공주가 질투심 때문에 등대의 불을 꺼트렸다는 이야기는 동화잖아!'
믿음과 사랑으로 반짝이던 눈이 갈 곳을 잃고 종이 위를 방황했다. 식은땀이 쏟아지고, 책상 위가 400년은 헤매야 할 것 같은 카타르슬로프 대사막처럼 호호막막(끝없이 넓고 아득함)하게 느껴졌다.
서부 아카데미에서 행해지는 종교의식 관리를 위해 파견되어 성녀라고 불리기는 하나, 성녀라는 호칭은 어디까지나 의식 진행 시 품격이 떨어지는 걸 막으려는 조치다.
직함을 떼고 보면 교단에서 그녀는 여러 성직자와 동등하며, 서부 아카데미에서는 신학을 포함한 여러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 신분.
다시 말해, 성녀라 해서 면학은 면제되지 않는다.
특혜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은 압박을 받는다.
예를 들자면 지금 치르는 신학 시험이 그렇다.
그녀가 신학은 쉽다고 우습게 봤듯, 다른 학생들도 '성녀라면 신학 시험 정도는 쉽게 풀겠지? 부럽다'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로 시험이 만만했다면 상관없었으리라.
그러나 이 순간 성녀는 확신했다.
이거 제출하면 좆된다. 라고.
다소 험한 표현이지만 그것 이상으로 정확한 표현도 없었다.
그녀가 신학 시험에서 죽을 쑨다는 건 그녀가 낙제되는 걸로 끝날 이야기가 아니다.
성녀라는 직위와 함께 그녀를 서부 아카데미에 파견한 교단의 체면이 실추된다.
망신살이 뻗치는 일을 교단이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최악의 경우엔 그녀를 교단 본부로 소환하고 다른 성직자를 성녀로 임명할지도 모른다.
물론 본부로 소환당해도 죽지는 않으리라.
대신 상당한 수준의 체벌과 재교육은 확정 사항이라 봐도 좋았다.
그뿐이랴. 출셋길은 막히고, 평생 수도원에서 밑도 끝도 없는 교전의 필사를 반복하며 평생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싫어···. 나는···. 낙제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된 이상 성녀는 최후의 무기를 쓰기로 했다.
연필을 가운데 쥔 채 손을 포개고, 눈을 질끈 감았다.
성직자에게 있어 최대의 무기는 신을 향한 신앙심이며, 그걸 발휘하는 최고의 형태는 당연히 기도였다.
'나는 굶주려 있어. 목말라 있어. 합격에! 아아, 여신님. 부디 이 위기를 피해갈 방법을!'
어찌나 간절했는지 기도는 하늘에 초고속으로 닿았고, 가장 높은 땅에 있던 천사가 응답했다.
'여신의 아이야. 우리가 너를 어찌 도와주면 되겠느냐.'
'천사님. 이 시험지에서 반은 못 풀겠는데 답 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너 성녀 칭호 받은 것치고는 머리에 든 게 제법 노답이구나.'
'천사님은 천사이신 것치고는 화술이 생각보다 저연령이시네요.'
'어려운 단어 섞어 쓰면 너 못 알아들을 거잖아.'
'그건 확실히.'
'아무튼 그건 안 되겠구나. 너는 시험에서 시험에 든 것이니, 네 믿음으로 시련을 이겨내거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하······. 쓰읍. 사기 스킬 작작 쓰라고. 이해됐니?'
'하지만 천사님. 간절한 부르짖음에 급히 구해주시는 것도 믿음과 사랑의 형태 아닐까요?'
'어라.'
'게다가 천사님이 직접 오실 정도로 간절하게 기도했는데.'
'쓰읍······. 그건 또 그거대로 묘하게 일리가 있네.'
'저는 제가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혹시······. 천사님도 모르는 문제이신 건?'
' '
'쫄?'
'와, 천사도 화나게 하는 그 재주를 높이 사서 그냥 개인적으로 알려주마. 우선 1번 문제부터 틀렸어. 그거 답은 2번이 아니라 4번이야.'
'폼나게 신탁이라는 걸로 할까요?'
'에휴. 그래. 좋을 대로 하고. 2번 답도 4번이야.‘
***
한편, 나머지 학생들과 학생들을 감독해야 할 시험관 모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녀를 지켜봤다.
성녀는 그녀 나름대로 비밀리에 신탁을 내려받았다 생각했지만, 천사를 소환할 정도로 확고한 신앙과 믿음이란 게 어디 숨길 수 있겠는가.
성녀는 천장을 뚫고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빛줄기 속에서 시험지의 답안을 빠르게 채워나갔다.
성녀가 신학 시험을 보는 도중에 신탁으로 정답을 내려받았다면 이는 신앙이 깊은 것인가, 아니면 부정행위인가.
후일 판타지 세계의 여러 교육자와 성직자들 사이에서 심심하면 논의되는 문제인 '성녀의 딜레마'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뭐, 정작 딜레마를 만든 장본인인 성녀는 체면이 구겨지는 걸 어떻게든 면하고자 했던 교단이 압력을 가한 덕분에 논란이 되는 일 없이 합격처리 됐지만 말이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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