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산중 호걸
호랑이가 없는 곳에서는 여우가 왕이다.
그 격언을 마음속 깊이 새긴 교활한 여우는 자신을 왕으로 떠받들어줄 약해 빠진 숲을 찾아다녔다.
거대 다람쥐들이 종적을 감춘 지금이야말로 군웅할거의 시기. 판타지 세계의 숲은 난세였고, 곳곳에서 이 전국시대를 제패하기 위해 영웅과 간웅이 난립하고 있었다.
"큭큭큭. 소문은 익히 들었다. 이곳의 왕은 토끼라지?"
"아닌데요. 라지토끼님인데요."
이건 또 뭔 소리야.
여우는 작달막한 날다람쥐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너그럽게 넘어가기로 했다.
이곳을 제패하면 날다람쥐 또한 자신의 수족으로 일하는 신하가 된다. 그는 자신의 무력보다는 집단의 힘을 더 신용하는 타입이었다.
풀과 열매껍질 따위로 숨겨진 짐승의 길을 따라 토끼가 산다고 하는 굴 앞에 도착한 여우는 입맛을 다셨다.
그 굴은 왕의 거처로서 합격점이었다. 토끼굴보다는 곰이나 호랑이가 살법한 크기였고, 입구에는 해골과 뼈로 쌓은 토템이 장식되어 있었다.
분명 토끼 전에 살던 호랑이가 만든 거겠지. 여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호랑이의 인테리어 센스를 칭찬했다.
"이리 오너라! 남쪽 참나무 숲에서 왕림하신 여우님을 맞이하거라!"
조금 지나자 동굴 안쪽에서 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 정체를 알아본 여우는 화들짝 놀라 크게 물러났다. 꼬리는 땅에 비비듯이 기세로 바짝 내렸고, 눈에는 공포와 불안이 깃들었다.
여우는 안다. 저 풍채를. 저 줄무늬를, 저 이빨을!
저것은 호랑이!
굴에서 나온 것은 이 숲에 없다고 알려진 호랑이였다!
"어, 어째서 호랑이가? 왜 호랑이?"
온몸을 떨어대는 여우를 쓱 훑어본 호랑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날카로운 발톱을 휘두르지도, 포효하지도 않았다.
어째선지 여우를 측은하게 바라보고는, 몸을 옆으로 길게 늘어트리며 앉았을 뿐이다.
그 동작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여우의 의문은 금방 해소되었다.
그렇다.
날다람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곳은 토끼굴이며, 굴의 크기와 인테리어는 숲의 주인에게 걸맞은 수준이었다.
이윽고, 숲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토끼라 하기엔 너무나 컸다.
엄청나게 크고, 두껍고, 무거워 보였다.
입 밖으로 드러난 것은 앞니가 아니라 송곳니였다. 길고 날카로운 한 쌍의 송곳니는 대장장이가 악마에게 혼을 팔아 벼려낸 검처럼 요사스러운 한기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토끼였다. 저것은 토끼였다. 누가 봐도 토끼였다. 분명한 토끼였고, 아무튼 토끼였다. 토끼였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어처구니없지만, 토끼는 분명 토끼였다.
동그랗게 말린 꼬리와 길쭉한 귀, 앞다리와 대조적으로 늘씬하게 뻗어있는 뒷다리. 온몸으로 자신이 토끼라 주장하는, 토끼였다.
뭐, 호랑이보다 두 배 정도 컸지만 말이다.
라지토끼라는 이명으로도 알려진 숲의 주인이 한쪽 뒷발을 들어 천지를 명동케 하는 땅 울림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성큼 앞으로 나가 호랑이의 등 위에 엉덩이를 올렸다.
무지막지한 무게가 등을 짓눌렀으나, 호랑이는 괴로워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고양이 같은 교성을 냈다.
그렇다. 이 숲에 호랑이가 없다는 말 또한 사실이었다.
이곳에 있는 것은, 줄무늬가 고운 라지호랑이 뿐이었다.
"냐아아아아옹~♥ 가, 감사합니다♥ 주인님♥"
"으음. 오늘도 의자로서 손색이 없구나. 좀 더 살찔 것을 허락한다."
"야오오오옹♥ 고양이는 기뻐요오오오오옷♥"
"자, 그래서."
여우를 향해 태산 같은 그림자를 드리운 채, 지상에 현현한 태양처럼 붉은 눈이 여우를 응시했다.
"여(余)에게 무슨 용건인가. 약한 자여."
"아, 아와와와. 아와와와와와와와와······."
이곳은 인류왕국의 샤를 여왕이 유년기에 패왕류를 수련하던 숲.
여왕이 왕국으로 떠났으니, 그녀와 함께 무공을 연마한 토끼가 숲의 왕이 된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 작가의말
야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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