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인외도서전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든, 남의 관심을 끌려고 억지로 교양있는 척하려는 사람이든. 도서박람회는 오는 사람을 거부하지 않는다.
본래 축제란 그런 거니까. 참가한 모두가 공평하고, 모두가 즐긴다. 누구 한 사람을 돋보이게 하려고 존재하는 행사는 보통 박람회가 아니라 콘서트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람에게 종이 위의 교양과 오락이 필요하듯,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매망량들에게도 교양과 오락이 필요했다. 정보화 시대에서 트렌드에 뒤처진 괴물은 괴담 하나 제대로 남기지 못하니까.
옛 방식을 고수하는 건 오래된 귀신이나 대요괴나 가능한 일이었다. 대표적으로는 흡혈귀나 구미호, 호주타란튤라가 여기에 속한다.
심지어 상어마저 토네이도를 타는 법을 익히는 시대. 지식은 하나라도 많이 접하는 쪽이 무조건 유리했다.
그리고 인외도서전은 교양과 지식, 영감을 안겨줄 오락을 갈망하는 모든 괴이한 존재를 위해 온 세계의 책을 모아서 선보인다.
이곳에 주인공은 없다. 그저 이야기를 좋아하는 괴물과, 사람들의 환상 속에 발자취를 남기길 바라는 괴기가 넘실거릴 뿐이다. 인외도서전은 꿈과 환상과 공포를 찾으러 온 모든 존재를 환영했다.
취급하는 책은 나폴리탄 괴담집부터 잊혀진 중국 황실의 인육 조리법, 아우터 갓과 교신하는 방법이 적힌 아마추어 무선 교본까지 다종다양.
그뿐만이 아니었다. 인외도서전에는 괴담과 전설, 설화 등에 출연한 여러 괴이가 초대되어 공포의 정점을 꿈꾸는 어린 악몽들에게 적확한 조언을 해주었다.
"구미호 선생님! 선생님처럼 나라를 흔들려면 역시 경국지색의 미모가 필요한 거죠? 예쁘다고 알려진 사람들 얼굴 가죽을 잘라서 합치면 저도 선생님처럼 활약할 수 있을까요?"
"호호호. 그래서야 그냥 누더기 골렘이잖니."
가령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던 구미호는 자신이 출간한 구미호 여행기와 살생석 생존기의 사인회를 열면서 독자와 프리토크를 나눴다.
"사거리에서 만난 흑인친구가 말했지. 나와 계약해서라도 악마적인 기타 실력을 얻고 싶다고."
"그래서 혼을 대가로 재능을 준 거로군요!"
"아닐세. 나는 레슨을 시켜줬지. 기본기를 처음부터 다시."
" "
"그리고 받은 돈이 레슨비보다 많아서, 그가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 소원을 이뤘다는 소문을 퍼트려줬지."
"어, 사실만 말한 거 아닌가요?"
"아니지. 그게 아니야. 단순한 노력과 재능만으로는 이야기에 마성이 깃들지 않는 법이니까."
악마와 계약한 기타리스트가 원인불명의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 '로버트 제이슨의 여름'을 메가 히트시킨 악마는 스산한 미소를 드러냈다.
"거짓말은 하나도 하지 않았네. 그저 유도했을 뿐이지. 그가 소설 속의 로버트 제이슨처럼 악마에게 혼을 팔았다고 말일세. 크큭. 악마에게 휘둘려 파멸에 이르는 범재의 일생은 충분히 자극적이라네. 스토리텔링은 사람의 마성에 깊이를 더해주는 법이지."
이런 식이다. 고르곤이, 흡혈귀가, 인어가, 외눈박이가, 호랑이 턱 밑의 창귀인 육혼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종이에 담아 전하고, 성대를 울려 말했다.
***
그리고 여기, 이제 막 이매망량의 세계에 입문한 새롭고 젊은 괴물이 있다.
아직 명확한 괴이 정체성을 찾지 못한 그는 인외도서전에서 쌓을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개성을 확고하게 다지려 했다.
그렇다고 해서 연예계의 슈퍼스타 같은 전설 속의 괴이와 다짜고짜 대화할 용기는 없었기에, 우선은 가까운 부스에 있던 책을 덥석 집었다.
"아앗, 이봐 거기! 잠깐만!"
책갈피처럼 비쩍 마른 몸 위로 머리 대신 활짝 펼쳐진 책이 달린 존재. 해당 부스를 관리하던 책 수호자는 화들짝 놀라 젊은 괴이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다른 손님과 잡담을 하고 있던 책 수호자는 제때 막지 못했다.
이곳은 세계의 온갖 이매망량이 찾아든 어두운 이야기의 박람회. 인외도서전.
이곳에 진열되어 팔리는 책은 세계의 괴담과 전설, 금기와 비밀. 신비와 저주에 관련된 거의 모든 것.
당연히 책만 있는 게 아니다. 거기엔 초상화를 그리면 화가 대신 나이를 먹는 신묘한 물감이나, 보는 사람을 풍경 안으로 빨아들이는 도술이 걸려 있는 산수화. 소원을 들어주는 마신의 손이나 원숭이 손가락 키링 세트도 팔고 있었다.
그리고 이날 책 수호자가 인외도서전에 가져온 굿즈는, 책으로 의태해 있다가 페이지를 펼친 사람을 잡아먹는 애완 미믹.
식인 괴수를 전시해놓고 너무 안일했던 게 아니냐는 책망을 듣는다면 책 수호자는 한눈을 판 사실을 인정하겠지만, 변명거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견본으로 전시해둔 건 미믹이니 책을 펼치지 말고 구경만 하라는 경고문을 충분히 크게 걸어놨다.
그것도 영어, 중국어, 아랍어, 고대 라틴어, 히브리어, 요정어, 판타지 세계 공용어, 심지어 외계 중력권에서 괴이가 찾아올 것을 대비해 은하 공용어로까지 써놓았다.
통한의 실책은 한국어를 추가하는 걸 깜빡했다는 사실이었다.
영어도, 중국어도, 아랍어도, 고대 라틴어도, 히브리어도, 요정어도, 판타지 세계 공용어도, 은아 공용어도 모르던 젊은 괴이는 아무런 생각 없이 미믹의 입을 봉하고 있던 가죽 벨트를 풀고, 페이지를 펼쳐버렸다.
당연히 표지가 펼쳐지며 나온 것은 그의 괴이 정체성을 찾아줄 옛 전설과의 만남이 아니었다.
"어롸."
유언을 남길 시간도 없었다. 젊은 괴이는 눈앞에 어둠을 이끌고 나타난 미믹의 아가리와 직면했고, 무심코 얼빠진 소리를 흘렸다.
꿀꺽.
"꺼어억."
다음은 순식간이었다. 미믹은 단숨에 젊은이를 삼키고 포식에 만족했는지 듣기 불쾌한 트림 소리를 냈다.
이곳은 인외도서전.
방심했다간 이야기 속이 아니라 심연의 구렁텅이인 괴물의 뱃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사악한 박람회.
사람의 책은 사람을 공포로 몰아갈 뿐이나, 괴물의 책은 사람을 물리적으로 죽일 수 있다.
입장과 함께 죽어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고 있으니, 위기에서 스스로를 지킬 자신이 없다면 입장 전에 한 번 더 곰곰이 생각해 주시기 바란다.
- 작가의말
마침 국제도서전 기간이라 박람회를 소재로 다뤄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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