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성녀 3
'어째서 시험 같은 게 존재하는 걸까.'
수도원의 시련보다 더 험난한 아카데미의 학업에 질릴 대로 질린 성녀는 기어코 자신이 파견 나온 아카데미의 교육방침 그 자체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권한만 있었다면 그녀는 교육이란 개념 자체를 이단으로 지정했으리라. 스트레스만으로 이단 지정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도 남았다.
'아아, 기말고사라니. 이 얼마나 잔인한 시련인지! 서부 아카데미에선 수도원보다 맛난 거나 놀거리가 더 많다고 생각했는데!'
안 그래도 신탁을 내려받아 시험을 풀어서 교단의 체면을 구겼다는 이유로 경고를 받은 그녀였기에 속으로만 절규하던 어느 날.
"예? 슬라임의 대수해에요?"
"얼마 전부터 포교를 시작한 엘프 촌락에서 성녀의 파견을 요청했다더군. 마침 서부 아카데미는 곧 여름 방학이라니까, 자네가 출장을 가줬으면 하는데."
에~ 싫은데~.
성녀는 도박사의 포커 페이스와 좋은 승부가 될 것 같은 홀리 페이스로 진심을 숨겼다.
서부 황야도 더운 건 마찬가지지만 대수해라면 더운데다가 습기까지 더해질 게 분명했다. 여름철 가기 싫은 곳으로 두 곳을 꼽자면 성녀는 당장 대수해와 알라우네 식물연방이 있는 남부 열대지방의 정글을 말할 터였다.
"이번 출장에 응한다면 기말고사는 패스할 수 있도록 교단에서 조치해 주겠네."
"맡겨주세요 추기경님. 여신님의 찬란한 빛과 사랑을 저 숲의 식인종들에게 전하고 오겠습니다."
존나 쉽군.
서부 아카데미를 관리하는 서부 대공과 먼저 만나 성녀의 성향을 확실하게 파악한 교단 본부의 추기경은 속으로 웃었다.
물론 이쪽도 도박사를 농락할 만큼 뛰어난 홀리 페이스를 구사했기에 성녀는 그가 묘하게 자세한 설명을 피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
대수해의 엘프들과 조우한 성녀가 뭔가 심각하게 잘못됐음을 깨달은 건 진흙을 구워 만든 욕조에 몸을 담그고, 물이 알맞게 끓기 시작한 뒤였다.
욕조 앞에서 줄을 지으며 대기하고 있던 엘프들은 컵을 들고 욕조물을 한 컵 퍼내고, 벌컥벌컥 마셨다.
"키아아아아. 이궈거든~!"
" "
"속이 개운해지는구만! 이 국만 있으면 하루 종일 사냥할 수 있어!"
" "
"몸에 피톤치트가 넘치는 사람은 성녀님밖에 없을 거야!"
"아, 하하. 아하하······."
"성녀님. 야채 더 넣을 건데 괜찮겠나?"
"예?, 아, 예, 예에······."
성녀가 허락하자 대수해의 엘프들은 갓 토벌한 거대 당근과 식인 감자를 다듬어 탕에 쏟아부었다.
뭐, 수식어가 좀 붙기는 했지만, 탕에 당근과 감자를 추가했을 뿐이다.
거기에 파를 한대 꽂아서 깊은 맛을 추가.
본래라면 양파나 마늘도 넣을 예정이었으나, 성녀가 버틸 수 없다고 거부해 생강으로 대체.
뭐,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식인종 엘프들은 성녀를 우려낸 야채국을 만들고 있었다.
덧붙여 탕 속이라 해서 알몸은 아니다.
그녀는 빈 곳에 약초를 채운 커다란 삼베 자루를 입고, 팔다리 구멍을 뚫은 채 탕에 앉아있었다.
잠깐 쉴 때마다 탕 밖으로 나오는 그녀의 모습은 커다란 녹차 티백이 걸어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심한 꼴은 안 당하는 데다, 다이어트 사우나라고 생각하면 의외로 버틸만한 더위였다.
"더럽혀졌다기보다······. 깨끗해져 버리네. 아니. 건강해져 버리는 걸까?"
마음속이 복잡해진 티백 성녀는 대파를 끌어안은 채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러자 의도치 않았지만 저절로 국 일부가 입 안에 스며들었고, 그녀는 깨달았다.
"어머 뭐야. 이거 맛있네?"
맛있었다.
말에 가감할 필요 없이, 순수하게 맛있다는 말만이 나왔다.
숲 한정 최강의 수렵민족인 엘프는 숲에서 뭐든 먹고 살아야 했기에 식인마저도 허용했고, 그 기간이 길었기에 다른 민족에 비해 타의 추종을 자랑하는 인간 조리지식을 쌓은 것이다.
"하하. 신성력을 쌓은 수행자에게서만 나오는 피톤치트가 맛에 생명력을 돋우는 거라네."
"무서울 정도로 잘 아시네요."
"많이 먹어봤으니까."
"···그래서 무서울 정도라는 거예요."
"하하하하! 걱정 말도록. 아무리 우리라도 정식으로 초대한 성녀님을 잡아먹지는 않으니까."
"···국거리로는 쓰지만요."
식인 조리의 달인과, 성녀라 불리는 최상급 소재의 조합.
그 조합으로 탄생한 맛은, 엘프를 매료하고 성녀마저 반하게 만드는 궁극의 맛이었다.
"저기~ 밥 남은 거 있으면 조금 주실래요? 국에 말아 먹게."
그날, 성녀는 자기 몸으로 우린 건강 야채국을 두 그릇 비웠다.
- 작가의말
성녀는 성스러운 스프를 마셨다!
힘이 5 상승했다!
지능이 2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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