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사천왕
사천왕.
튜버경이나 지구 출신 전생자들이 알고 있는 용사와 마왕의 판타지에서 사천왕은 마왕이 임명하는 네 명의 직속 부하다.
하지만 튜버경의 모략 때문에 마왕으로 전락한 인류왕국 13개 대영지 영주들은 마왕의 개념을 비꼬기 위해 사천왕의 개념을 비틀었다.
이 판타지 세계에서 사천왕이란 13인의 마왕의 투표로 뽑히는 선출직이며, 전시상황에만 마왕보다 높은 위치에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직무만 따지면 인류왕국과 싸우는 사천왕의 정확한 직책은 '13개 대영지 통합계엄사령관'이 적합하다.
'머리 없는 갑옷' 티탄.
'큰 산의 지혜' 오그 오그레스트.
'양뿔의 해방자' 숫양 장군.
'용사 살해자' 얼음 장군.
사천왕 중 얼음 장군은 아센 공방전에서 인류왕국의 정전협정 제안이라는 마왕군 역대 최고급의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공방전 당시 아센에 숨어 있던 대용사 이그니스와 영웅 프로스트와의 전투에서 전사. 사천왕 자리 중 하나는 공석인 상태다.
큰 혼란이 일어나야 했고, 처음엔 실제로 그런 조짐이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왕군 전체를 지탱하는 4개의 큰 기둥 중 하나가 사라진 거니까.
"이제 와서 인류왕국과의 평화조약이 무슨 의미냐! 재침공이다! 아센을 불바다로!"
혈기 넘치는 말머리 수인이 광장에서 포효하자 소머리 수인이 껄껄 웃으며 그의 어깨를 밀쳤다.
"크하하핫! 그런 일은 소처럼 뚝심 있는 내가 해야지, 네놈은 말하고 같이 마차나 끌어야 하는 거 아닌가?"
"뭐야? 진짜 소처럼 밭도 못 가는 놈이!"
"해보자는 거냐!"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지. 암소로 TS 시켜주마!"
사천왕보다는 불량배가 더 어울려 보이는 두 수인 사이의 분위기가 점차 험악해졌다.
저만한 덩치의 수인이 싸우면 일대가 난장판이 되는 건 당연한 일. 흥미를 느끼고 지켜보던 마왕령 주민들은 안색이 어두워져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슬슬 위병이라도 불러와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런 의견이 서서히 번져가던― 그때였다.
"흥미롭군! 그런데 군을 통솔할 정도의 지휘력이 요구되는 사천왕 자리를 노린다면, 당연히 불필요한 힘을 쓰지 않고 싸움에서 이길 지혜도 갖추고 있겠지?"
무시하기에는 너무 우렁찬 소리였다.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누가 시비를 거는 거냐.
말과 소 수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닿은 곳에 있던 건 두꺼운 가죽으로 된 거대한 벽.
벽이라고 착각할 만한 인물의 머리는 덩치가 있는 두 수인마저 시선을 한참 올려야 될 만큼 높이 있었다.
민머리에 투박한 인상.
왼쪽으로만 솟구쳐 도검 같은 인상을 주는 엄니.
오른쪽 이마부터 눈을 거쳐, 입 옆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흉터.
복장이 너무 수수한 일상복이어서 역전의 전사라는 이미지는 흐릿해졌지만, 긴 세월에 걸쳐 쌓아온 관록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위압감마저 지우는 건 무리였다.
직접 만나본 사람은 적으나, 누구나 그의 정체가 누구인지 예상할 수 있었다.
숲에는 숲의 현자인 엘프들이.
산에는 산의 현자인 오우거들이.
그리고 마왕령에는 그가 있다.
사천왕 중에서 가장 지혜롭다 알려져 있으며, 산에서 내려온 오우거들을 통솔하는 큰 산의 지혜, 아우구스트급 오우거인 오그 오그레스트가.
"사, 사천왕께서 왜 여기에······?"
"휴가다! 최근 낚시라는 거에 흥미를 느껴서 말이지."
휴가라면 사천왕이 광장에 생각 없이 돌아다닐 수도 있겠지.
두 수인은 그가 갑자기 나타난 까닭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사천왕 중 최고의 지혜자 답게 논리적인 설명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과 사천왕 공석을 차지하는 일은 또 별개의 일.
소 수인보다 머리 회전이 빠른 말 수인은 재빨리 무릎을 꿇으며 오그에게 지혜를 빌려달라 부탁했다.
"오그 님! 사천왕 자리에는 저 무식하게 힘밖에 모르는 소 보다는 저처럼 전장을 빠르게 누빌 수 있는 자가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음. 흥미로운 견해일세!"
그러자 질 수 없다는 듯, 소 수인은 무릎으로 도로를 포장한 자갈을 깨부수며 자기주장을 밀어붙였다.
"하오나 오그 님! 사천왕이라는 건 오그 님처럼 누구보다 강함을 드러내야 합니다! 힘이란 파워! 파워란 근육! 근육이라 하면 말 보다는 역시 소 아니겠습니까!"
"으음! 훌륭한 삼단논법이군. 자네 말도 흥미롭네!"
"어······."
"저기······."
말과 소 수인은 둘 다 곤혹스러워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누구 말이 더 옳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 누구에는 나도 포함해야 하네. 나는 사천왕이면 불필요한 힘을 쓰지 않고 싸움에서 이길 지혜가 필요하다 하지 않았는가?"
"아. 그러고 보니 그렇게 말씀하셨죠."
"그러니 이렇게 함세. 자네 둘 중 힘을 쓰지 않고 나와 대결할 수 있는 걸 제안해보게. 날 이길 수 있다면 마왕들에게 다음 사천왕 후보로 제안해주지. 흥미롭지 않은가?"
흥미롭지 않을 리가 없었다.
오우거라 하면 산의 현자라 해도 힘으로 밀어붙인다는 이미지가 더 강했으니까. 당장 저 오그의 풍채만 해도 작은 집 한 채쯤은 간단히 평지로 바꿔버릴 것처럼 보이지 않던가.
그런 오우거의 힘을 봉인하고 하는 시합이라면 자신들도 사천왕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거기까지 계산을 끝낸 두 수인은 시선 교환만으로 서로의 의도를 눈치챘고,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 그렇다면 그림 대결은 어떠십니까!"
"호오?"
"단, 그림 도구는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쓰는 걸로만!"
"흥미롭군. 작은 붓을 쥐어본 지는 꽤 오래되었다만!"
오우거가 미적 감각이 있어봤자 산에서 사는 인종에게 예술성이 얼마나 있을 것이며, 자기들보다도 훨씬 큰 몸으로 어떻게 사람이 쓰는 붓을 다루겠는가.
자기들도 그림 실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오우거보다는 잘 그릴 수 있으리라.
그림 대결을 제안한 뒷배경에는 그런 오만함이 깔려 있었다.
***
얼마 후.
"그래서?"
다과회에 초대받은 '머리 없는 갑옷' 티탄은 오그가 자기 몫으로 내어준 차와 케이크를 갑옷 안으로 쏟아부으며 말했다.
"어차피 네가 이겼을 게 뻔하잖아. 걔들은 어떻게 됨?"
"후후, 다음에는 반드시 이긴다면서 미술학원에 등록했다더군. 목표를 제시해 줬으니, 그 넘치는 체력과 열정을 활용해 대성할 거라고 기대하고 있지."
"걔들도 참 바보네. 네 취미가 뭔지 알았으면 차라리 힘 싸움으로 하자고 밀어붙였을 텐데."
"하하하하. 만약 그랬다면······."
오그는 커다란 엄니 때문에 자연스레 벌어진 입 안으로 차를 흘려 넣으며 웃음을 흘렸다.
"만약 그랬다면?"
"···이길 확률과 사망 확률이 동시에 올라갔겠지."
"역시 힘으로는 질 생각이 없다는 거네."
"상대를 가늠하지 못하는 만용에 자비를 베푸는 건 전사의 소양이 아니니까."
"그럼 그림 대결은?"
"그거야 그냥 취미고."
'큰 산의 지혜' 오그 오그레스트.
사천왕 중 가장 지혜롭다 알려진 그의 취미는 인간의 문화 수집과 기술 습득.
최근에는 낚시에 심취해 있으며, 마왕령 체스 토너먼트의 4년 연속 우승자이기도 하다.
인간이 만든 문화의 꽃으로 취급받은 음악과 미술은 한참 예전부터 초인의 경지에 도달해, 마왕들로부터 받은 그림 의뢰가 이미 1년 치 정도 쌓여 있는 상태였다.
"뭐, 아무렴 어때. 그보다 케잌 더 줘! 역시 오그가 만든 수제케잌은 좋아!"
"만드는 보람이 있는 감상이로군. 아주 흥미로워. 좋아. 상으로 두 접시를 주지."
"신난다!"
케이크를 두 접시 더 받은 티탄은 중후한 갑옷과 전혀 안 어울리는 귀여운 말투에 발까지 구르며 오두방정을 떨더니, 양손에 접시를 들었다.
그리고는 갑옷 안으로 케이크가 수직 낙하.
내장이 어떻게 되어 있든, 갑옷 안은 크림과 빵 부스러기 따위로 난장판이 되었으리라.
"존맛탱!"
"존맛탱인가아아아아아아."
"응? 방금 무슨 말 했어?"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만. 그보다 여기 차도 들게나. 마침 동방 제국에서 좋은 게 들어와서 다행이로군."
작게 티탄의 말을 따라 했던 건 티탄의 뒤에서 수행을 맡던 두 기사였다.
사천왕다운 품위가 없어 어디에 내놔도 안쓰럽게 보일 언행이지만 티탄 본인도 그 존재를 알지 못하는 '티탄 팬클럽' 회원인 두 기사에겐 투구 뒤에서 저절로 아빠 미소가 지어지게 하는 장면에 불과했다.
- 작가의말
오늘은 사천왕들의 평화로운 일상 얘기로 준비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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