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배달
그는 사람을 죽일 때 쾌락을 느끼는 살인마였다. 대상을 유혹해 진심으로 애정을 표할 때 본색을 드러내는 것은 그가 즐겨 쓰는 패턴이었다.
물론 살인이란 게 쉽다면 현대사회는 성립되지 않았고, 경찰 따위의 치안 조직도 의미가 없으리라.
따라서 그는 나름대로 살인 플랜과 시신 처리법, 알리바이 등을 짜내야 했다.
이번에도 조건을 충족시키는 건 까다로웠지만, 살인마는 이번 시체 처리가 쉬울 거라고 예감했다.
이번 대상은 북극 같은 오지를 동경하는 여성.
그녀는 외국어도 운전 실력도 뛰어났다. 덕분에 그는 그녀가 극지방의 오지까지 운전하기를 기다렸다가 숨통을 끊기만 하면 됐다.
알리바이라면 전날 체크인을 해둔 호텔의 숙박기록이면 충분하리라.
애인이 술김에 싸웠다가 차에서 나가 멋대로 실종. 세간에는 이렇게 보도되리라.
대략적인 뼈대만 잡은 탓에 허점이 많고 즉흥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계획이었지만 그의 내장은 역겨운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상에 공개할 수 없는 살인 경력이 자신감의 근원이었다.
그러나 플롯은 발단만 순조로웠다. 전개부에서 위기와 절정을 맞이하기도 전에 갑자기 암초를 만났다.
물론 도로 위에 진짜 암초는 없다. 비유였다.
비유였지만, 이 경우엔 암초라는 단어가 비유 대신 직유로 쓰일 수 있지 않을까.
"쿠워어어엉!"
암초가, 새하얀 백곰이 보닛 위에 강철 같은 발톱을 꽂아 넣은 채 포효했다.
도시까지의 거리는 멀어서 구조요청은 불가능. 라이플이 있기는 하지만 공교롭게도 트렁크 안에 있다.
제일 나은 선택은 백곰이 질려서 돌아가기를 신에게 바라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그의 기도를 들은 건 신이 아니었다. 악마, 사신, 또는 심판자였다.
덜컥. 운전대를 잡고 있던 여성이 주저 없이 문을 열었다.
갑자기 나타난 곰 앞에 이성이 마비된 걸까? 곰을 상대로 도망갈 만한 준족을 가지고 있던 걸까?
살인마의 머릿속에 온갖 추측과 욕설이 빠르게 스쳐 갔다. 너무 빠른 나머지 제대로 단어를 고르지 못한 뇌는 정제되지 못한 언어를 내보냈다.
"씨, 씨발? 씨발! 씹빨. 씨팔 뭔데?"
한편, 살인마가 미쳤다고 생각한 여성은 곰을 마주한 채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블라디미로비치 블라디미르 웬카무이 씨. 맞으시죠?"
"꾸워어어···. 아, 네. 접니다."
"연락드렸던 배달입니다. 여기다 사인 부탁드릴게요."
"아하. 어쩐지 이런 오지에 차가 온다 싶더니만. 잠시만요. 이미 입금 했으니까 괜찮죠?"
"네. 얼마든지."
정중하게 허가를 구한 백곰은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차 안으로 불쑥 들어와 살인마와 얼굴을 마주했다.
"어? 곰이 말을 해? 곰이? 어째서 곰? 곰 왜?"
"으~음. 딱 알맞은 썩은내야. 마음에 들어. 요즘 인간들은 숙성된 맛이 좋다니까."
"오, 오지마! 끄아아악! 끼야아아아악!"
저항할 틈도 없이 살인마의 어깨가 손톱 모양으로 찢어졌다. 넘치는 피를 곰 발바닥에 묻힌 후, 곰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여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양피지로 된 수령확인서를 꺼냈고, 그 위에 피로 된 곰 발바닥 도장이 찍혔다. 살짝 오므린 탓에 피로 찍지 않았다면 제법 귀여워 보이는 발도장이었다.
"머큐리 재단에는 늘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속이 타락한 인간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대단한 건 아니랍니다. 시대가 좋아질수록 사람이 타락하는 속도도 빨라지니까요."
"나 같은 식인 곰한테는 만만세로구만. 그 기술 발전 때문에 요새 더워져서 걱정이지만."
"후후. 재단에서도 판타지 세계에서 전이한 곰의 혈액과 털 샘플을 정기적으로 얻을 수 있다고 호평이랍니다."
"사인이라도 해줘야 하려나."
"강원도에 전이한 식인 엘프는 대화가 안 통한다고 어찌나 불평하던지."
"남의 소설에 슬쩍 올라타서 이미지 세탁하는 짝퉁 귀쟁이들이 협조적일 리가 없지. 그나저나 시트를 더럽혔는데, 생각해 보니 이거 돌아갈 때 타고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괜찮아요. 서비스로 드릴게요. 근처에 지인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이 있어서요."
"아아, 그 나폴리탄 잘하는 집."
살인마를 속여 배송지까지 데려온 도시지기와 식인 백곰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도시지기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 자리를 떠났고, 포식이 시작됐다.
하늘까지 닿을 기세로 처참한 비명이 울렸다.
하지만 이곳은 식인 곰이 출몰한다는 소문 때문에 마을 주민은 오지 않고, 지도에서조차 지워진 도로.
이곳에 도달한 악은 더 크고 잔인한 악에게 삼켜져, 극지방의 차가운 눈 아래 파묻힐 따름이다.
사회가 성립되지 않는 곳. 약육강식의 세계란 늘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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