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흡혈귀
암실처럼 어두운 방. 조용히 불어오는 바람에 커튼이 느린 춤을 추듯이 흔들렸다.
그 커튼의 춤을 뚫고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줄기에 벌어진 입 안의 송곳니가 빛난다.
도검을 연상시키는 예리함.
송곳니의 안쪽에는 뱀의 독샘과 같은 게 있어서, 피부를 뚫고 타액을 주입할 수도 있다.
그 송곳니는 인간의 것이 아니다.
뱀의 것과 같은 송곳니를 가진 것은 흡혈귀. 밤을 지배하는 어두운 귀족.
오늘도 한 여성이 그의 앞에 섰고, 머리카락과 고개를 젖혀 목을 드러냈다.
선이 얇은 느낌의 가련한 곡선을 그리는 목. 상의를 조금 내린 탓에 빗장뼈부터 어깨와 가슴골의 형태도 선명히 보인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혈관.
흡혈귀의 눈은 어두운 곳에서도 생명이 지나는 길을 정확히 읽어낸다.
밤의 귀족에게 몸을 맡긴 여성은 열에 들뜬 한숨을 내쉬며 송곳니가 얇은 피부를 뚫고 들어오기만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 순간이 도래한다.
흡혈귀 특유의 마안과 최면술에 매료되어 통증을 잊은 채, 흡혈귀의 이를 통해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열기에 몸을 맡겼다.
"하읏-"
통증은 없지만, 체내에 삽입되는 이물감에 몸이 저절로 움찔거리고, 신음이 흘러나왔다.
당겨진 활시위처럼 뒤로 굽은 채 쓰러지려 하자 흡혈귀는 팔로 허리를 감아 그녀를 단단히 고정했다.
은밀하면서 치명적인 순간이 지난 뒤, 흡혈귀는 그녀의 귓가에 약속된 말을 속삭였다.
"백신 접종 끝났습니다."
"앗, 감사합니다."
슥슥슥.
흡혈귀는 능숙하게 소독솜을 사용해 그녀의 목덜미를 소독하고 반창고를 붙여줬다. 장미 문양이 새겨져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은 패션 밴드였다.
"출혈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3분 정도는 꾹 눌러주세요."
"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선생님."
백신 접종을 받으러 온 여성이 인사와 함께 나가자, 흡혈귀는 양치질을 하며 커튼을 젖혔다.
커튼을 쳤던 건 단순히 손님의 요청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는 오전의 햇살을 좋아했다. 너무 덥지 않고, 건강에도 좋았으니까.
인류왕국의 수도에 사는 그 흡혈귀는 다른 흡혈귀와 조금 달랐다.
그건 유심히 관찰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피부는 윤기 있고 혈색이 좋았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보통 흡혈귀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밤에 주로 활동하는 동족들과 달리, 그는 항상 이른 밤에 잠들어 아침 일찍 일어난다.
일어난 뒤에는 특제 영양 주스와 블랙 푸딩 하나를 먹고 나서 한 시간가량 조깅.
흡혈귀는 물론이고 보통의 인간과 비교해도 건강한 삶을 살았다.
이런데도 혈색이 나쁘다면 그건 죽을병이라는 얘기밖에 안 된다.
수도에서 그가 택한 직업은 의사.
밤의 귀족에게 어울리는 검은 망토 대신 백색의 가운을 입은 그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적절한 대가를 받는다.
"진료 시작합니다. 환자분 들어오세요."
주된 진료 방식은 흡혈을 통한 즉석 초고속 혈액 검사.
그리고 섭취한 약초를 체내에서 배합해 내보내는 송곳니 주사.
물론 소독과 양치질은 철저하다. 양치에도 특별히 배합한 치약을 쓰기 때문에 송곳니를 박아넣는 행위 자체가 환자에게 영양제를 투약하는 것과 같았다.
환자는 물릴수록 건강해지고, 흡혈귀는 돈을 번다. 이야기 속의 흡혈귀와 달리 그는 상당히 이상적이며 대등한 공생관계 구축에 성공했다.
"으음, 올드 레이디. 오늘은 피가 좀 다시네요."
"에구머니나. 요즘 디저트를 너무 먹었나?"
"당화혈색소가 오르신 거 같으니 조금 센 약을 처방해 드리죠. 가벼운 걷기라도 꾸준히 운동하시고요."
미남 흡혈귀 의사가 운영하는 인류왕국의 병원.
오늘도 주 고객층인 여성들이 북적이면서 성업 중.
입구에 걸린 현판에는 '흡혈귀의 천적'이라 불리는 교단의 이단 심판자. 유적 파괴자라는 이명으로도 불리던 여사제 멜티로제가 인증한 '안심 흡혈귀 마크'가 붙어있었다.
- 작가의말
??? "믿고 안심하는 안심 흡혈귀 마크. 지금 신청하세요. 말뚝에 꿰인 채 불타 죽기 싫다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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