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마왕 2
마왕군 13개 영지를 다스리는 마왕 중 하나, 올레는 알현실의 옥좌에 앉아 고뇌에 빠져 있었다.
알현실이라 해서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다. 장식에 조금 공을 들인 커다란 회의실 정도다.
어떤 마왕은 '용사가 쳐들어온다 해도 원래는 같은 나라의 젊은이 아니냐. 피해가 막심하거나 죽은 사람이 없다면 잘 먹여서 돌려보내고 싶다'라는 취지로 일부러 성을 개축해 관광지처럼 꾸미는 일도 있다.
하지만 마왕 올레는 실용성에 더 초점을 두는 스타일이다. 용사가 쳐들어온다면 영지에 진입하기 전에 요격하거나 보급을 끊어서 성에 접근도 못 하게 하는 걸 좋아했다.
그렇게 실용성을 좋아하는 만큼 회의도 최소한으로 하는 편이었기에 지금처럼 아무도 호출하지 않은 회의실에 혼자 앉아 골몰히 생각에 잠기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좋게 말하면 명상. 나쁘게 말하면 땡땡이.
오늘의 수행 담당인 켄타우로스 시종의 머릿속에서는 무슨 궁상을 떠냐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또 한편으로는 집무실에서 보고서를 읽고 있을 시간을 낭비하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하아."
마왕이 깊은 한숨을 쉬자 시종의 머릿속에서는 무의미한 추리가 시작되었다.
마왕 올레라 하면 오래된 연륜에 걸맞은 침착함으로 상황을 헤쳐나가는 노련한 실력파.
귀족으로서의 격과 덕망이 높아, 거대요새를 둘러싼 긴장감이 절정이었던 시기에도 인류왕국에서 선물을 들고 찾아오는 귀족이 있었을 정도다.
특히 마왕 올레의 위상은 아센 공방전이 끝난 이후로 정점에 도달했다. 퇴각전에서 한 명의 피해도 내지 않았던 건 이그니스의 실눈참모 서성이었으나, 이그니스 사후에 마왕급인 그가 전장을 신속하게 인계받음으로써 안정적인 지휘가 가능했다는 게 마왕군 내부의 평가였다.
뿐만 아니라 마왕 올레가 단독으로 거둔 확실한 성과도 있었다.
그는 마왕군의 대표로서 여왕과 평화조약을 맺었고, 지금껏 '인류왕국 내에 속한 마왕령'으로 취급되었던 13개 영지의 공식적인 독립을 인정하는 문서를 받았다.
그건 정세를 잘 모르는 시종의 눈으로 봐도 커다란 성과였다. 지금껏 마왕령은 반란군이 마왕의 유혹에 넘어가서 성립된 괴뢰국가 취급을 받았으나, 이번에 여왕이 정식으로 인정함으로써 '마왕군'이 아닌 '마왕국'이라는 명칭이 뒤따르게 된다.
13개 영지는 더 이상 타국에 소속되지 않은, 독자적인 주권을 가진 국가임을 표명하게 된다.
마왕국이 성립되면 마왕령 내에서 용사들이 유격대를 편성해 게릴라전을 펼치더라도 마왕들이 국가의 이름으로 정식 항의를 보낼 수 있다.
국가 대 국가의 입장이기에 인류왕국은 이 항의를 절대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할 수 없게 된다.
지금까지는 일방적인 약탈을 방관하거나 무조건 군대를 풀어야 했으나, 마왕국이 성립됨으로써 용사의 행동에 제약을 걸 강력한 수단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마왕령에서 언제 용사의 습격을 받게 될지 몰라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꿈과 같은 이야기.
다만, 아직은 모든 게 잠정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현재 마왕군과 인류왕국은 평화조약을 제안한 '일시적 휴전 상태'다. 일정 조율과 대표단 구성, 장소 협의 등의 문제가 남아있어서 곧바로 평화조약에 도장을 찍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마왕 올레가 고뇌하고 있는 건 이런 복잡한 문제이리라.
시종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슴속에 긍지와 애국심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당사자가 느낀 것과 현실이 살짝 어긋나 잇는 건 흔한 일.
더 친숙한 표현으로 정리하자면, 시종은 김칫국을 마셨을 뿐이다. 그것도 아주 거하게. 막걸리도 반병 정도 섞어서.
"어떻게 해야 인지도가 올라갈까."
" "
시종의 가슴속에서 타오르던 애국의 불길이 싸하게 식고, 대신 당혹과 환멸만이 남았다.
농땡이 부리면서 고뇌하는 게 고작 자기 인지도 문제였냐아아아.
계속 마왕을 배려해 침묵했던 시종은 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걸로 시간만 축내게 하느니 차라리 일이라도 시키자는 충심 아닌 충심에서 비롯된 행동력이었다.
"마왕님. 어떤 일 때문에 인지도를 고민하게 되신 겁니까?"
"으응. 시종아. 얼마 전에 용사가 쳐들어온 적 있어서 내가 요격 나갔었잖아?"
아센 공방전 때의 일로 고민한 것조차 아니었던 거냐아아아아아아.
마음속의 마왕 주가가 다시금 하한가를 경신하며 바닥에는 또 바닥이 있음을 증명해 버렸다.
"확실히, 그런 일이 있었죠."
"그때도 이 옷 입고 있었거든?"
"평범하게 영주가 입을법한 정장에 검은 망토 두른 게 다잖습니까."
이 마왕은 대체 어디까지 유감스러워지려는 걸까.
시종이 새로운 고뇌 주제에 포커페이스 뒤편에서 괴로워하는 사이, 마왕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데 용사가 이 모양새를 보고 흡혈귀인 줄 알았더라고."
"아하. 그건 확실히 마왕님 입장에서는······."
"시답잖은 일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기는 하지."
날카로운 이미지와 미중년이라 부르기에 손색없는 외모. 잘 다듬어진 수염. 차분한 성격. 그리고 훤칠하고 다부진 몸에서 나오는 귀족의 품격까지.
어느 것이든 흡혈귀를 떠올리기 좋은 이미지이긴 하다.
하지만 마왕 올레는 흡혈귀가 아니다.
계통을 따지면 흡혈귀가 아니라 몽마.
몽마하면 유명한 인큐버스처럼 정기를 빼앗지는 않는다.
오히려 불면증인 사람에겐 그의 존재 자체가 구원이다.
그의 종족은 샌드맨.
모래와 수면을 다루며 아이를 잠으로 인도하는 요정에서 비롯된 잠의 일족이었다.
"화살을 날리길래 비실체화해서 피했더니 안개로 변하는 비겁한 흡혈귀라 하더라."
"뭐, 실제로는 모래로 변하신 거지만요."
"무기는 물푸레나무 말뚝을 가져왔고. 여신교의 녹아내린 분홍도 아니면서."
"뭐, 흡혈귀에게 물푸레나무 말뚝은 유효하다는 이야기가 많으니까요."
"난 마음만 먹으면 칼 한 방에도 썰려서 죽는단 말이다."
"아니. 마왕님이신데 죽는 걸 전제로 하면 어떡합니까. 게다가 보통은 갑옷 없이 칼 맞으면 다들 한 방이고."
"아무튼 기분 나쁘지 않아? 사람한테 고블린이라고 말하는 꼴이라고."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이해는 됐지만, 적어도 흡혈귀는 미형에 속하지 않습니까."
"고블린도 고블린 기준으로는 미형이야. 여담이지만 오크의 가슴은 여섯 개여서, 젖이 두 개인 인간은 그들 기준으로 추남 추녀지."
"알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 기준······!"
"으음. 미안하네."
"아셨으면 됐습니다. 뭐, 저도 켄타우로스와 티라노사우루스가 같다고 하면 화내기는 하겠지만요."
마왕의 고민에 공감한 뒤, 시종은 머릿속에 스쳐 간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그렇지. 다음엔 샌드맨 일족 전용의 정장 같은 걸 입고 맞이하면 어떨까요?"
"생각해 봤는데, 그건 그것대로 곤란해."
"어째서죠?"
마왕은 답변해 주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일일이 설명하는 것보다 실물을 한번 보여주는 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가볍게 손을 털자 마왕의 발치에서 모래가 일어났다. 너무 부드럽고 고와서 가까이서 보더라도 연기로 착각하게 되는 잠의 모래였다.
잠의 모래가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마왕은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하의부터 상의까지 달과 별이 앙증맞게 그려진 옷. 머리 위의 나이트캡까지 한 세트였다.
"아니 마왕님. 갑자기 왜 잠옷을?"
"이게 샌드맨의 정장이야."
" "
"이걸 입고 싸우면 어떻게 되겠나?"
"분위기 읽으라고 용사에게 한 소리 들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정장을 못 입는 걸세. 드레스 코드가 안 맞아."
"인지도 낮은 마이너 종족은 어필하기도 참 어렵네요."
"큭. 가장 신경 쓰고 있던 부분을 대놓고 찌르다니······!"
마왕 올레는 용사에게 기습공격을 허용했을 때보다 더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용사가 쳐들어오지 않는 마왕령은 한가했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면서 업무를 안 하고 여유를 부려도 괜찮을 만큼.
유유자적한 평온 속에, 아무래도 좋을 마왕의 고민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 작가의말
마이너에겐 마이너의 고민이 있는 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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