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1억 년 버튼
"여기 한 번 누르면 다른 세계에 1억 년 동안 갇히는 버튼이 있답니다♪"
와인색에 가까운 붉은 예복을 입고 얼굴의 반만 가리는 염소 뼈 가면을 뒤집어쓴 괴인이 버튼을 보이자, 사내는 괴인의 말을 무시한 채 주저 없이 달려들었다.
사내의 머릿속에선 빠르게 그 버튼의 원본으로 추정되는 '5억 년 버튼'의 이야기가 스쳐 갔다.
5억 년 버튼이란 일본의 멀티 크리에이터 스기하라 소타의 만화에서 소재로 사용된 도구로, 버튼을 누르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5억 년 동안 고립되었다가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5억 년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면 고립되었던 동안의 기억이 사라지고, 버튼을 누른 사람은 보상금을 받게 된다는 게 그 만화의 핵심.
누를 것이냐 말 것인가. 5억 년의 기억이 지워진 뒤의 자신은 누르기 전의 자신과 동일 인물인가.
만화 자체보다도 소재의 철학적 부분이 매력적이어서 많은 사람이 의견을 나눴었고, 사내 역시 이야기를 접했다.
그리고 그는 누르는 쪽이었다. 트라우마도 남지 않으니 기회만 온다면 언제든지 눌러 주겠다고 벼르고 벼르던 그였다.
그런 그는 기회가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게다가 갇히는 기간이 원본의 1/5밖에 안 되는 1억 년 버튼이.
"어이쿠. 성급하시기는."
"보상이나 준비해 놓고 있어라. 애송아!"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이상적인 곡선을 그린 펀치가 버튼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1억 년 버튼은 몹시 단단하고 뻑뻑해서 버튼이 눌리기는커녕 주먹을 휘두른 사내만 다치고 만 것이다.
"끄아악!"
1억 년 버튼은 주먹을 싸맨 채 비명을 지르는 사내를 보다가 비웃음 섞인 조롱을 날렸다.
"나약하구만. 애송이."
" "
"네놈에겐 버튼을 누를 자격이 없다. 다시 수행하도록."
***
1억 년 버튼에게 무시당한 사내는 곧바로 수행의 나날을 보냈다.
헬스장. 홈 트레이닝. 달리기. 다시 헬스장.
그리고 복수심을 담은 증오의 정권 지르기 1만 번.
수면과 식사를 제외한 모든 시간을 근력 단련에 쏟아부었다.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가 빠져 대머리가 되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건 이미 자존심 문제.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쳐부숴 주겠다는 결의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희미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증오의 정권 지르기 1만 번을 끝내도 해가 저물지 않게 되었을 무렵.
"오우. 또 뵙는군요 ♬"
염소 뼈 가면을 쓴 붉은 예복의 괴인이 다시 나타났다. 역시나, 손에 1억 년 버튼을 든 채로.
"···버튼을 땅에 내려놓도록."
"정말로 도전하시겠습니까?"
"다물고 내려놓기나 해. 이제 알겠어. 내 인생은 버튼을 누르기 위해서 존재했던 거야."
"그러시다면야. 좋은 여행이 되기를."
괴인이 버튼을 내려놓자 사내는 자세를 잡았다.
자세는 별의 핵을 지지대로 삼는다는 감각으로.
악력은 석탄을 다이아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아.
파괴력이란 스피드와 체중, 악력의 곱셈.
전신을 충분히 이완시키고, 최대 높이까지 올렸던 주먹을 수직으로 내질렀다.
아니, 그 내려치기는 이미 단순한 주먹질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났다.
사출했다. 대지에 내리꽂히는 한 발의 미사일처럼. 그 표현이 가장 정확하리라.
한 차례 굉음이 울린 후. 사내는 목격했다.
버튼이 확실하게 눌린 모습을!
"해, 해냈다······. 해낸 거지? 응? 이봐, 내가 해낸 거 맞지?"
"후후후♪ 축하드립니다. 원하신 걸 해내셨네요. 우선 당신의 노력과 성과에 경의를 표하도록 하지요."
사내를 칭찬한 괴인은 입고 있는 옷만큼이나 붉은 입술에 길고 하얀 검지를 올린 채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설명은 끝까지 듣는 게 현명한 거랍니다♪"
"엣."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기 전에 사내는 한 줌 빛이 되어 버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사내가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당연하다. 괴인이 준비한 1억 년 버튼은 판타지 세계의 현자들이 만든 것으로, 버튼을 누른 대상을 아공간에 보관하는 구시대의 도구였다.
물건이든 생물이든 보존 기간은 1억 년.
누군가 밖에서 꺼내주지 않으면 그 뒤에는 안에서 망가지거나 천천히 썩어갈 운명이었다.
"후후후.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지만. 설명을 들을 생각도 안 한 건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 어리석다고 말하는 게 맞겠죠."
한편, 간만의 포식에 만족한 1억 년 버튼은 트림 소리를 내며 말했다.
"꺼억. 존나 쉽군!"
- 작가의말
이번 회차는 어떤 의미에선 밈을 이용한 서술트릭이라 할 수 있겠네요 :)
특별출연: GM (iD off-마인드 게임 / 카카페나 문피아 등에서 보실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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