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말
제1차 아센 공방전 이후, 마왕군은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얼음 다리를 건너 철수했다.
실눈 참모 서성이 얼음 장군 이그니스의 사망과 그 뒷수습에 한눈을 팔지 않고 제 역할에만 충실한 덕분이다.
최초 진입 시 프로스트가 쏟아낸 마법 공격이나 암살 클랜과의 전투로 인한 사망자가 제법 되었던지라, 이들을 모아 부활 마법을 거는 것만 해도 상당한 시간이 소모되었다.
서성이 어물쩍거렸다면 이 과정이 더 길어져 아센의 정규군과 맞붙었으리라.
물론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지는 않았다. 서성의 퇴각 지휘에는 빈틈이 없었다.
딱 하나, 이그니스의 군마를 빼먹었지만 말이다.
이것만큼은 그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그니스의 군마는 불꽃 부관, 프레이가 타고 불사자 마을로 향했으니까.
퇴각하는 와중에 부대에서 이탈한 군마의 행적까지 뒤쫓는 건 아무리 유능한 참모라도 무리였다.
군마의 삶이 살짝 꼬이기 시작한 건 여기서부터다.
다른 말의 세 배는 됨직한 심장을 지닌 얼음 장군의 군마는 머리까지 영리해, 가르쳐준 이가 없는데도 사람의 말을 할 수 있었다.
근데 심장이 크고 머리가 뛰어난 게 담력이 좋다는 말과 일맥상통하지는 않는다.
애석하게도 이그니스의 군마는 피를 보면 경직되고, 고함을 들으면 펄쩍 뛰었으며, 밤중에는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에도 기겁해 울었다.
대놓고 한 단어로 축약하자면, 쫄보였다.
그러나 이그니스와 프레이의 평가는 달랐다.
그들이 보던 군마는 전장에서 얼음 마법을 구사하기 쉽게 지면을 굳건하게 지탱해 주었다고 착각했다.
적장의 우렁찬 고함에 놀라 펄쩍 뛰었을 때는 겁쟁이인 것과 별개로 과하게 우월한 신체 능력 덕분에 수 미터나 뛰어올랐고, 덕분에 이그니스는 적장을 공중에서 저격할 수 있었다.
경직되든 펄쩍 뛰어오르든. 이그니스에게 있어 군마는 훌륭한 파트너였다.
그렇다 보니 매번 전투가 끝날 때마다 이그니스는 군마에게 '너는 정말 훌륭한 말이구나!'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뭐, 진실은 얼음과 냉기를 구사하던 이그니스의 주된 전술인 광역 폭격이 군마의 유리멘탈과 기가 막힐 정도로 궁합이 좋았다는 것뿐이었지만 말이다.
한밤중의 나뭇잎 소리 때문에 놀랐던 일화는 더 가관이었다.
평소 마구간이나 평지처럼 조용한 곳에서만 잠을 잤던 군마에게 나뭇잎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최악이었다. 불안감을 심하게 자극했다.
그건 병사들은 물론 군마를 좋게 평가하던 이그니스마저 짜증 낼 정도였으나, 서성의 평가는 달랐다.
서성이 사천왕 직속 참모가 될 수 있었던 건 본인의 노력과 재능, 그리고 불행한 미래를 볼 수 있는 제3의 눈에 의한 것.
그리고 서성은 목격했다.
대규모로 조직된 용사와 용병 군단이 밤을 틈타 얼음 장군의 군단을 급습하는 불행한 미래를 말이다.
만약 군마가 소란을 피워서 간부급을 전부 깨우지 않았다면 이그니스의 군대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을 터였다.
그랬다. 이그니스의 말은 운이 좋았다. 겁쟁이라는 걸 들킬 위기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어째선지 그때마다 다른 사건이 일어나 그의 약점을 덮어버렸다.
이그니스와 프로스트가 인류왕국의 정치적 수단으로 소모되어 대용사와 영웅이 되었다면, 군마는 운이 너무 좋아서 오해를 제때 해소하지 못해서 '얼음 장군에게 걸맞은 명마'라는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냥 쫄아서 움직이지 못하거나 난리를 피웠을 뿐인데요.'
그 말 한마디만 하면 해결될 오해였지만, 사람 말까지 할 줄 알면서도 이것만큼은 절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쫄보 말은 너무 겁먹은 나머지, 진실을 말해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면 얻어맞을 거라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마는 오해를 푸는 대신, 가만히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까지는 간다는 말을 맹신했고, 그 중간이 지나면 기회를 봐서 은퇴할 셈이었다.
그는 피와 고함이 소용돌이치는 전장보다는 목장에서 종마 생활을 하면서 한가롭게 풀이나 뜯고 싶었다.
물론 현실은 중간은커녕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의 주인과 함께하는 꼴이 되었지만 말이다.
***
그리고 타고난 겁쟁이 기질은 불사자 마을의 공동묘지에 와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말에서 내린 프레이가 이그니스의 시신을 안고 네크로맨서가 있는 오두막으로 서둘러 가는 사이, 혼자 남은 군마는 목격했다.
"흐아아암. 잘 잤다!"
"어이, 아침이라고. 언제까지 관짝에 박혀 있을 거야?"
"오늘도 뼈 빠지게 일해보자고. 난 뼈밖에 없지만!"
"저저 해골바가지 놈 일어나자마자 뺑끼칠 각재는 거 보소."
"오늘도 아침 공기는 상쾌하구만. 폐가 신선해지는 기분이야."
"아저씨. 폐가 움직이기는 하고?"
"아, 씨. 누구 가글 없어? 자는 새에 빗물이 입에 고였나봐. 냄새 구린데."
그건 불사자 마을에선 누구나 아는 일상적인 일이다.
불사자 마을은 분지에 지어져 음기가 퍼지지 못하고 묘지로 흘러 들어가, 망자가 되살아나기에 최적인 구조.
거기에 네크로맨서와 과학자가 각각 강령술과 비밀 물약을 사용해 망자들을 사역하고 있었다.
그 망자들이 밤중에 푹 쉬고 아침에 흙을 파면서 일어났을 뿐인, 지극히 건강한 풍경이었다.
어떤 의미에선 일도 안 하면서 밤에 잠도 안 자는 작가나 상사의 압박 때문에 강제로 야근을 해서 사람 꼴이 아닌 근로자들보다 훨씬 건강한 게 아센의 망자들이다.
물론 이그니스의 군마가 그런 사정을 알 리가 없다.
"푸끼에에에엑!"
군마는 말과 사람의 언어가 애매하게 섞인 비명을 내지르며 바람처럼 달아났다.
평범한 겁쟁이 말이었으면 달리기 전에 기절했겠지만, 다른 군마의 세 배에 달하는 커다란 심장을 가지고 있어 기절하기도 쉽지 않았다.
***
후일, 아센의 망자들은 유령이 되어 자신의 군마가 어디 갔는지 묻고 다니던 이그니스에게 이렇게 답했다.
"아, 그 무시무시하게 덩치 큰 말 말이죠."
"포효했을 때는 깜짝 놀랐죠. 혼이 쏙 빠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분명 주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소리였을 겁니다."
"묘지에 올 때까지 참고 있던 게 한번에 터진 게지."
"마지막까지 할 일을 다 하고 떠났다. 그런 게 아닐까요."
"크으, 기사도구만. 기사도야!"
"굉장한 말을 모셨구려. 나으리."
그 말을 들은 이그니스는 뿌듯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확실히. 과분할 정도로 훌륭한 말이었지. 이젠 전쟁이 없는 곳에서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군. 더는 군마가 아니니까."
극에 달한 겁쟁이 군마는 최후까지 신념을 관철한 기사도와 구분되지 않았다.
- 작가의말
어찌된 영문인지 114화가 누락되었다는 걸 이제야 알아서 급히 추가했네요.
빼먹어서 정말로 미안해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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