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꿈
지구에서 머나먼, 지구와 닮은 어느 별.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삶 속에 인생의 공허함을 느끼던 그의 앞에 한 노인이 나타났다.
"그거 아는가? 이 세상은 가상현실이지. 우리는 그저 전기양의 꿈을 꾸고 있는 게야."
"노인장은 그걸 어떻게 아시죠? 증거가 있나요?"
"기회를 주도록 하지. 자, 여기 두 종류의 약이 있네. 파란 약을 먹으면 자네는 계속 상냥한 꿈을 꿀 수 있어. 빨간 약통은······. 잠깐. 약통? 내가 잘못 꺼냈······. 어이, 이봐!"
"알아. 무슨 말 하는지 잘 아니까 기다리고 있어 봐 대머리 영감님."
약통을 빼앗은 그는 내용물을 있는 대로 입 안에 털어놓고 꿀꺽 삼켰다.
파란 약은 가상현실에 남고, 빨간 약은 이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
우주 저편에 있는 인류도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지구와 비슷한 발상과 클리셰를 만들 수 있었다.
애초에 자기 삶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가 이 세계에 남게 되는 파란 약을 먹는 선택지를 할 리가 없었다.
"내가 너희들의 메시아가 되어주지."
근데, 뭐어······.
약을 먹고 가상세계를 탈출해 구세주가 되는 건 다른 영화 이야기고.
당연하다.
비슷하다는 건, 같다는 게 아니니까.
"···저기, 꿈에서 안 깨는데."
"미안하군. 약을 잘못 꺼냈어."
" "
"그건 내 설사약이라네. 나이가 들다 보니 대변이 잘 안 나와서 말이야. 게다가 즉효성이라서 애용하고 있지."
"그런 것치고는 배가 전혀 안 아픈데."
"당연하지 않나. 여기는 가상세계고, 그 약은 가짜 신호를 발생시켜 현실의 배변을 촉진하는 거니까."
" "
"말은 좀 끝까지 듣게. 하여간 요즘 애들이란."
" "
"그리고 메시아는 무슨 메시아인가. 이건 현실 세계 관광 판촉 프로그램이란 말일세. 하루 정도 바깥 공기를 쐬고 돌아오는 코스지."
" "
"누가 미쳤다고 기후조절에 실패해서 행성 표면온도가 20도가 넘는 지옥 같은 현실에 살고 싶겠나. 현실이란 아주 핫한 바캉스 같은 거야."
"저기,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그럼 이 설사약을 먹은 내 본체는······."
"잘 듣게. 젊은이."
노인은 파란 약을 그의 손에 꽉 쥐여주며 말을 이었다.
"꿈을 꾸게나. 꿈을 멈추지 마! 누가 현실이라고 말하면 코웃음 치며 흘려넘기게. 꿈을 꾸는 자네는 누구보다 멋져! 꿈을 꾸는 것을 멈추지 말게나!"
비장한 얼굴로 노인의 말을 새겨들은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돌아서서 달렸다.
비록 지금이 괴롭더라도, 내일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꿈을 꾸면서.
어쩐지 마음은 물론이고 뱃속마저 개운해진 듯했지만,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빨간 약과 단 하나의 파란 약을 삼킨 그에게 중요한 건, 구리기 짝이 없는 현실보다도 기대와 꿈이 넘치는 미래뿐이었다.
- 작가의말
매트릭스라고 생각했나요?
유감. 초콜릿 공장이었답니다.
기후위기에서 기후종말로 넘어가고 있는 기념으로 써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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