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209℃ 와플 오디세이
그곳은 제빵사의 불이 반죽의 바다를 달구는 빵들의 세계. 빵타지아.
전 우주에서 가장 달콤한 차원이라는 이명을 가진 그곳이 충치균에 의해 멸망의 위기를 맞을 뻔했던 것도 이제는 오래된 이야기.
이스트가 창조한 고리의 도넛이 드높은 하늘의 증기에 가려져 실존을 의심받고.
초코소라의 탐구와 고찰을 적은 쿠키 문서 대부분이 소실되고.
민트초코가 시나몬 블레이드로 세상을 구했었다는 게 시시한 농담이 된 시대에.
반죽이 굳어져 형성된 ‘반죽의 대지’에는 새 빵, 페이스트리류에 속하는 크루아상인(人)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백 겹의 빵 껍질을 두른 크루아상들은 수를 급격히 불리지는 못했다.
반죽의 대지가 오랜 기간 가뭄이어서 크루아상들이 만족스럽게 우유를 마시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져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이 속출한 탓이었다.
하다못해 샌드위치 계곡에서 막대빵 나무와 양상추 잎새로 둘러싸인 생크림 호수에 크림이 풍부했다면 걱정이 없지만, 날을 거듭할수록 생크림 호수의 수위는 낮아지는 중이다.
'호수를 독차지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호수를 공유하는 두 크루아상 무리는 원시적이나, 공존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건 그 얕은 지성으로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뿐이랴. 반죽의 대지에는 너무 많이 타서 어떤 빵도 되지 못한 검은 맹수들이 도사린다.
빵이 되지 못한 그것들은 최소한의 지성도 가지지 못한 맹수였고, 빵을 향한 명백한 적의를 가진 채 시도 때도 없이 크루아상들을 노린다.
빵타지아는 새로운 빵들에게 상냥하지 않았다.
***
그렇게 감당할 수 없는 미래가 조금씩 현실로 다가오던 어느 날, 두 무리는 호수의 기묘한 이변을 알아채고 긴장했다.
꼿꼿이 세워진 와플이 그곳에 있었다.
네모나고 반듯하며, 직사각형 모양으로.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풀빵.
크루아상들은 와플이 이곳에 세워진 까닭을 알지 못했으나, 대지 위에 나타난 이질적인 존재를 보고 내면의 무언가가 자극받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반죽보다 더 근원에 있는, 밀가루에 깃들어 있는 지성.
와플이라는 이질적 존재는 크루아상들에게 그 지성을 끌어내는 계기가 될 것처럼 보였다.
크루아상들은 이대로 미지와의 접촉을 통해 폭발적으로 지성을 일깨우고, 막대빵을 도구로 써서 동족과 살육전을 벌이고, 엄청난 속도로 문명을 일궈낼까? 문명 레이스에서 선두주자로 달려 나가 반죽의 대지를 제패할까?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반죽의 대지에 떨어진 게 와플이 아니라, 수상한 외계 기술로 만들어진 모노리스였다면 말이다.
게다가 이들은 어쨌거나 빵.
팔다리가 있고 살아서 움직이기는 하나. 빵이란 기본적이고 푸근하고, 달콤하고, 따뜻한 존재다.
설령 우유 강이 완전히 마르고 생크림 호수가 버터뿐인 샛노란 바닥을 보인다 해도, 근본적으로 부드러운 빵들이 생존경쟁을 위해 서로의 빵 껍질을 뜯으며 투쟁할 일은 없었다.
훗날 문명이 개화하면 자원의 중요성이 부각되어서 빵들조차 캔디칼과 케이크칼을 들고 서로 싸우는 날이 올 것이나, 적어도 오늘은 아니었다.
털퍼덕.
열풍을 맞은 모노리스······. 가 아니라. 와플이 쓰러진 가운데, 생크림 호수의 크루아상들은 오늘도 느긋하고 따끈따끈한 하루를 보냈다.
와플의 존재에 긴장한 건 잠깐에 불과했다. 크루아상들은 쓰러진 와플을 다시 세웠다가 그 밑에 깔리는 놀이를 즐기거나, 평소처럼 호수 근처에서 데굴거리거나, 양상추 그늘에서 낮잠을 즐겼다.
미래가 암울하더라도, 빵 안에는 언제나 푸근한 희망이 있었다.
- 작가의말
좋아. 오늘 아침은 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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