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흡혈귀 3
흡혈귀는 인류왕국의 뒷사회에서 암약하는 밤의 귀족.
부동산 매매를 주 사업으로 삼는 그 역시 여기에 속했다.
그가 취급하는 것 중에 정상적인 물건은 없다.
여러 영지를 활동 범위로 삼아 헐값이나 다름없거나 진즉에 철거해야 했던 건물을 매입해 팔아넘기고, 다음 먹이를 찾아 떠나는 게 그의 사업 전략.
다시 말해, 허위나 불량 매물을 취급하는 악덕 부동산 업자였다. 노후되고 처치 곤란한 매물을 팔고 싶어 하는 건물주는 얼마든지 있었고, 그의 사업에 손님이 끊기는 일은 없었다.
피해자가 그를 찾아서 대가를 받아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경비대나 현상금 사냥꾼이 들이닥칠 즈음엔 다른 도시로 달아나 있으니까.
오늘도 마찬가지이리라. 흡혈귀는 관 속에서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은 채 눈을 떴다.
"으음! 개운하군! 오늘도 부지런하게 불량 매물을 팔아치워볼······. 어라?"
관 뚜껑을 열자 보인 건 낯선 천장.
자신의 아지트가 아니었다.
그뿐이랴.
"헬로우. 미스터 뱀파이어. 게임 하나 하겠나?"
"히익? 메, 메메, 멜······? 어째서 멜티로제가?"
녹아내린 분홍처럼 불길하고, 보라색에 가까운 전신갑주.
아니, 이제는 왕국 기사단의 기술이 더해지면서 갑주와 조금 다른 물건이 되었다.
정확히 하자면 갑주의 방어력과 밀폐성을 추구하면서, 날렵한 기동성의 실현과 각종 만능 유틸리티 툴까지 내장된 슈트.
흡혈귀는 그런 기능미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저 보라색은 안다. 저 보라색의 근본이 되는 녹아내린 분홍을 안다.
그것은 흡혈귀의 천적. 멜티로제의 분홍.
멜티로제 2호를 자칭하는 화이트 엘프는 중계마법을 이용해 천장에 자신의 얼굴을 천장에 투영하고 있었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에게 깊은 트라우마와 상징을 새겨주기 위한 예리한 디자인의 마스크가 번뜩였다.
"너는 그동안 부동산으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고 살았지. 피해자들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여본 적은 있나?"
"하, 합법이야! 매물을 자세히 확인하지 않은 녀석들이 등신이지!"
"아주 당당하군. 지금껏 찾아온 피해자들을 내쫓을 때도 그런 태도를 보였다지.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듣자니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기더군."
"뭐가 궁금하지? 헤헤, 뭐, 뭐든지 알려줄게. 나는 인류왕국의 건물이라면 모르는 게 없어. 귀족 저택의 비밀통로는 어때? 아, 그, 그렇지. 영웅 프로스트의 저택에 전설 속 바위 공주의 섬으로 이어진 포탈이 숨겨져 있다는 건 아나?"
"흥미롭군. 하지만 그런 건 이미 나도 알아. 내가 궁금한 건 흡혈귀에 대한 거지. 예를 들자면······."
덜컹. 덜커덕! 쿠당탕!
곳곳에서 목재가 철거되고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가 천장이라고 생각했던 건 단순한 나무판자에 불과했다. 진짜 천장은 유리로 되어있었고, 반투명한 중계마법의 화상 너머로 아직 어두운 새벽하늘이 보였다.
"뭐야? 아지트는? 아무리 자고 있었다지만 관째로 들어서 다른 곳으로 옮긴 건가? 어떻게 된 거야?"
"아니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내가 궁금한 건, 사람의 돈을 빨아먹던 흡혈귀가 하늘 아래서 자외선 차단 슬라임도 바르지 않은 채 언제까지 당당할 수 있느냐야."
"나, 나나나나. 나는 흡혈귀야. 이까짓 유리천장 하나 못 부실 거 같아?"
"오우. 시도해 보시지."
흡혈귀는 멜티로제 2호가 그 말을 하기 전에 이미 행동을 취했다. 손톱 끝에 마력을 모으고, 망토를 휘날리며 솟구쳐 유리천장을 할퀴었다.
빠각.
유리 대신 흡혈귀의 손가락이 부러졌다.
"으끼야아아악! 강철도 버터처럼 베어버려야 하는데 어째서?"
"말하는 게 늦었군. 이 천장은 주교급의 축복을 받은 강화유리야.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밤의 귀족인 흡혈귀들은 절대 부수지 못하지."
흡혈귀는 멜티로제 2호의 말을 무시한 채 비틀거리며 가장 가까운 문으로 향했다.
부러진 손가락을 치료하는 것보다 급한 건 탈출이었다. 이대로 아침이 밝으면 자외선 차단 슬라임이 없는 흡혈귀는 그대로 재가 될 운명이었으니까.
그러나 문을 여는 것조차 흡혈귀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안에 사람 있어요~"
"뭐, 뭐야?"
문 뒤편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 흡혈귀는 화들짝 놀라 물러났고, 천장에서 멜티로제 2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피해자들에게 협조를 받았지. 흡혈귀는 불편하겠어. 초대받지 않은 집에는 들어가지 못한다면서?"
"설마, 설마······!"
흡혈귀는 그제야 방 전체를 둘러봤다.
문은 동서남북에 하나씩 있었고, 열리는 건 남쪽 문 하나뿐이었다.
나머지 문에서는 안에 사람이 있다거나, 초대하지 않은 흡혈귀는 집에 들이지 않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다고 남쪽 문 너머에 출구가 있던 것도 아니다.
방 너머에는 다시 네 개의 문이 있는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인류왕국의 건물이라면 모르는 게 없다. 그렇게 말했던가?"
두 번째 방에서도 천장의 중계마법으로 모습을 드러낸 멜티로제 2호가 말했다.
"그렇다면 필시 이 주택가의 미로도 아주 쉽게 돌파할 수 있겠지."
" "
"좋은 여행이 되길 바라지."
결코 좋은 뜻이 아니었다. 판타지 세계에서 좋은 여행을 바란다는 건 명복을 빈다는 관용구로도 사용됐고, 지금 멜티로제 2호의 목소리에선 흡혈귀를 향한 악의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게임을 시작하도록 하지."
"으아아아악! 열어줘! 열어줘! 열어달라고!"
흡혈귀는 비명을 지르며 문에 달려들고, 당기고, 돌리고, 애원했다.
그러나 이 주택가에 입주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불량 매물을 구매해 피해를 봤다. 욕을 하면 했지, 친절을 베푸는 사람은 없었다.
하늘이 서서히 밝아져 오는 가운데, 흡혈귀는 어디가 출구인지 알 수 없는 유리천장의 주택가를 끝없이 헤매야 했다.
마치, 치즈를 찾아 미로를 헤매는 실험실의 쥐처럼 말이다.
- 작가의말
웹소 제목스럽게 바꾸면 ‘판타지 세계의 직쏘가 되었다’정도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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