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멍청한 판타지 모음집 2 터보

178. 하얀 털의 유니콘

"어째서 하늘은 유니콘을 만들었으면서 유니콘에 어울리는 처녀를 점지해 주시지 않느냔 말이다!"

말도 광견병이 걸리던가?

채집 의뢰를 나왔다가 호숫가에서 유니콘이 내지른 통한의 절규를 들은 모험가 곰은 마치 달에서 뒷걸음치는 듯한 독특한 스텝을 구사하며 현장에서 벗어났다.

유니콘은 곰마저 두렵게 할 정도로 처녀성에 굶주려 있었다.

각종 지역 설화나 음유시인의 노래에서 처녀에게만 따른다는 영물이라는 속성을 계속 붙여주고 유니콘들도 그 이야기를 즐긴 것이 벌써 수백 세대 이상.

설화 속에서 너무 오냐오냐해버린 결과 유니콘은 모두가 기겁할 정도로 처녀에게만 집착하는 애정결핍 몬스터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단순한 처녀가 아니다. 이 안쓰러운 몬스터는 눈이 너무 높아져 자기 눈에 차지 않으면 처녀라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 피가 불러온 재난에 짓눌린 꼴이었으나, 유니콘은 처녀성에 대한 집착을 꺾는 대신 세상을 향해 한탄했다.

"처녀의 무릎을 베개로 삼지 않으면 잠들지 못한단 말이다! 아아, 벌써 며칠째 불면의 밤을 지새웠는가! 이 등에 태울 만큼 가련하고 백옥같은 피부와 차가운 도시의 눈을 가졌지만 자기 말에게는 상냥한 처녀가 필요해. 가능하면 보이시하면서 포니테일 스타일로!"

디테일한 취향까지 곁들여진 추접스러운 한탄이 끝을 모르고 이어지고 있자니 그의 옆으로 나무가 굉음과 지진을 일으키며 내리꽂혔다.

마치 인류왕국의 전 왕인 기둥왕 그림 엑셀리온을 연상시키는 폭력의 소용돌이.

그 나무를 집어 던진 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던 마법사 농부였다.

"야. 거기 뿔 달린 성욕 덩어리."

"히익."

까닥까닥.

마법사 농부는 유니콘이 우는 소리에 낚시를 방해당한 불쾌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자기 앞으로 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평소라면 유니콘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시하거나 다른 곳으로 가서 다시 처녀 대성통곡을 시작했으리라.

하지만 고도로 격해진 살의는 유전자에 각인된 처녀충 컨셉을 마비시켰다.

당장 따르지 않으면 죽는다.

이를 본능으로 이해한 유니콘은 즉시 뛰어가 뿔이 땅에 박힐 정도로 몸을 숙였다.

"니가 처녀를 찾든 성희롱 대상을 찾든 땡깡부릴 만큼 만만한 사람을 찾든 내 알 바 아니거든? 근데 그 지랄 때문에 내 낚시가 방해받으면, 내가 화가 나겠지?"

방금 나무 집어 던진 충격으로 물고기들 다 기절해 떠 있는데 지금 회수하시죠.

유니콘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을 아꼈고, 결과적으로 그건 그의 목숨을 구한 선택이었다.

한 마디만 반박했어도 마법사 농부는 마법으로 낚싯줄을 움직여 유니콘의 목을 날려버렸으리라.

"어차피 지금 낚시를 계속해봤자 손맛도 별로겠는데. 이참에 네 녀석을 가지고 노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 아뇨아뇨. 저 같은 유니콘이 어떻게 어르신의 기대를 만족시켜드리겠습니까."

"그럴까? 내 생각대로면 넌 너대로 이득일 텐데. 온 대륙의 처녀들이 너를 보러 올지도 모르지."

유니콘이 귀를 쫑긋거리며 땅에 박았던 머리를 서서히 들어 올렸다.

처녀라는 단어에 집착한다 뿐이지 사리 분별과 손익계산을 아주 못한다는 말은 또 아니었다.

사람을 초월한 듯한 범상치 않은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분명 근거가 있으리라.

거기까지 계산한 뒤, 유니콘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정좌했다.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지요. 어르신."

***

얼마 후.

커다란 원형 경기장과 이를 활용한 여러 경기가 주요 관광 상품인 어느 대영지의 도시.

객석의 사람들은 배당금이 적힌 티켓을 흔들며 열띤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원형 경기장의 마지막 4코너를 통과하고 있는 말들의 무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실황 중계를 맡은 아나운서 또한 달아오른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목소리에 힘을 주어 실황을 늘어놓았다.

"4코너를 지난 지금 선두로 나선 건 브레스트 파이어. 브레스트 파이어가 4 마신 차. 상당한 거리 차지만 조금 지쳐 보입니다. 힘차게 쫓아오는 건 샤인 스파크. 이어서 크리스마스 저니가 앞을 노립니다. 크리스마스 저니. 치고 나오나요. 샤인 스파크. 크리스마스 저니를 따돌린다! 브레스트 파이어와의 차이는 앞으로 2 마신 반!"

그 중계를 듣고 있던 마법사 농부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때가 됐군."

거의 동시에 관객석의 열기가 급격히 상승했다.

한 마리, 후열의 마군에서 계속 힘을 숨기고 있던 말이 새하얀 돌풍이 되어 뛰쳐나왔기 때문이다.

그 정체는 마법사 농부가 직접 훈련시킨 유니콘.

너무 뒤로 물러나지도 않고 마군에서 한정적으로 체력을 유지하다 마지막에 한 번에 발산하는 게 유니콘과 마법사 농부가 세운 전략이었다.

굳이 마지막에만 힘을 쏟는 형태로 작전을 짠 이유는 단순했다.

처음에는 약한 척하다가, 마지막에 눈부신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다.

컨디션이 저조한 것처럼 연기해 마법사 농부는 높은 배당금이 걸린 유니콘의 티켓을 구할 수 있었다.

유니콘은 유니콘대로 눈부신 활약을 펼쳐 여성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협박에서 시작된 계획이었지만, 결과만 보면 양쪽에 득이 되는 이야기였다.

갑작스러운 이변에 놀란 건 아나운서도 마찬가지.

"다, 다이아몬드 버진! 다이아몬드 버진이 뛰쳐나왔다아아아아?"

중계 마이크를 쥔 손에 핏줄이 불뚝 솟아올랐다.

"다이아몬드 버진! 크리스마스 저니를 제치고! 다이아몬드 버진! 앞으로! 선두 경쟁에 참전! 브레스트 파이어, 샤인 스파크, 다이아몬드 버진! 마지막 직선주로에서 나란히 달립니다! 달린다! 달린다! 나란히! 200미터 지점 통과! 골은 바로 앞! 브레스트 뒤처진다! 브레스트 여기까지인가! 샤인! 다이아! 샤인! 다이아! 다이아! 다이아! 다이아! 다이아몬드 버진이 제쳤다! 다이아몬드 버진! 미하엘 기념배를 제패한 것은 다이아몬드 버진! 첫 대상 경기로 국왕 기념급을 택한 무모한 유니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실력으로 당당히 증명! 2착은 샤인 스파크, 3착은 크리스마스 저니!"

경주를 제패한 유니콘. 아니, 다이아몬드 버진은 거센 콧김을 뿜고는 자신의 자랑인 하얀 갈기를 휘날리며 뿔을 높이 처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대로 계속 이겨나가면 자기를 좋아하는 처녀 팬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 거라고.

그러나 유니콘은 아직 알지 못했다.

원형 경기장의 레이스는 그가 원하고 바란 처녀들보다, 근육과 수염의 비중이 큰 중년 사내들이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작가의말

선입의 다이아몬드 버진.

추입의 팔콘 펀치.

좀 더 모아서 뜨거운 경주를 구성해보고 싶네요.

Sp2는 이미 정했으니 무리고, Sp3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