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다큐멘터리 3: 기사돼지
슬라임의 대수해의 생태계는 아센의 민속학자 베른이 연구하기 전까지 수수께끼로 가득했습니다.
이곳에서 넘치는 영양분은 주변 생태계까지 영향을 끼쳐 농작물의 괴수화나 인근 식생의 흉포화 등의 영향을 끼치기도 했지요.
뭐, 정작 북부 영지 현지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합니다.
가혹한 환경에 적응했다는 걸까요.
그리고 여기,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또 하나의 생명이 있습니다.
바로, 기사돼지입니다.
슬라임의 대수해 일대에서만 출몰하는 기사돼지는 멧돼지의 친척입니다.
큰 덩치와 크고 날카로운 엄니를 살려서 적을 꿰어 죽이는 것도 다른 멧돼지와 같죠.
으음, 레코더맨?
그렇게 떨어져 있으면 기사돼지가 화면에 안 잡히잖습니까.
걱정 마세요. 기사돼지는 긍지가 있어서 자신에게 덤비지 않으면 기본적으로 온순합니다.
보통은 땅을 파서 감자나 버섯, 나무뿌리를 씹는 걸 즐기죠.
그리고 애초에 협곡 해파리 버섯 때도 사얼거민 때도, 레코더맨이 멋대로 움직여서 화를 당한 거잖습니까?
이번엔 사고 좀 사고 없이 촬영했으면 좋겠네요.
이번에도 사고가 난다면 레코더맨은 다큐멘터리 촬영보다 슬랩스틱 코미디에 재능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마침 저기 참수뱀이 기사돼지를 노리고 왔네요.
턱의 교합력이 약한 대신 육중하고 날카롭게 경화된 꼬리를 써서 사냥감의 목을 치는 숲의 처형인이죠.
기사돼지는 항상 도전자의 고기만 먹으니, 오늘 레코더맨이 잡아먹힐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사냥에 나선 참수뱀의 전략은 조금 나쁜 듯합니다.
평소라면 나무 위에서 매복하다가 꼬리만 내려서 공격할 텐데 말이죠.
목이 굵고 땅에 가까운 기사돼지를 상대로 실력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걸까요?
결과는 예상대로입니다. 기사돼지가 엄니로 꼬리칼을 받아내고, 앞발을 들어 머리를 뭉개버립니다. 참수뱀의 도전은 무모했군요.
기사돼지의 검이자 방패인 엄니에는 숲의 강철이라는 별명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 강철처럼 단단한데다 성장 속도도 빠른 엄니는 위협적.
기사돼지는 태어나면서부터 투사의 자질을 타고난 셈입니다.
운명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운명이 항상 좋은 쪽으로만 흐르는 건 아닙니다.
기사돼지에게 있어 엄니는 가장 믿음직한 파트너인 동시에, 목숨을 위협하는 마검이기도 하니까요.
조금씩 뒤로 굽으면서 자라는 기사돼지의 엄니는 최종적으로 눈을 꿰뚫게 됩니다.
적에게 패배해 긍지인 엄니가 부러져 목숨을 구하느냐.
성장이 멈추지 않는 엄니에 눈이 꿰여 시력을 잃느냐.
대부분의 경우, 기사돼지는 자신의 눈을 기꺼이 엄니에 바칩니다.
마침 저기 사냥 담당에서 은퇴한 기사돼지가 오는군요.
눈을 꿰뚫고도 한층 더 자란 탓에 뿔과 눈이 단단히 결합한 것처럼 변했습니다.
은퇴한 기사돼지는 자신의 부인과 새끼들을 데리고 왔네요. 부인만 다섯입니다.
저게 바로 수컷 기사돼지가 고집스럽게 긍지를 지키는 이유입니다.
시력을 잃고도 살아남은 기사돼지는 빛을 잃는 대신, 짝짓기에서 암컷들에게 우수한 수컷으로 인정받게 되는 거죠.
존경을 표하는 건 다른 수컷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전에 사냥한 참수뱀을 물어 은퇴한 기사돼지 앞에 놓는군요.
스스로 시력을 잃는 건 분명 어리석지만, 기사돼지들은 이런 식으로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숲 속에서 자신들의 사회를 지켜왔습니다.
긍지를 지킨 전사에게 합당한 존중과 존경을 바치는 사회.
그들의 굳세고 튼튼한 다정함은 혐오와 비방으로 얼룩진 우리 사회에 일침을 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기사돼지의 무리는 짐승 무리보다도 철의 규율을 가진 기사단이라 하는 게 어울릴지도 모르겠네요.
어떻게 생각하나요. 레코더맨?
···레코더맨?
···오, 이런.
참수뱀이 한 마리 더 있었군요.
그것도 나무에 숨어서 머리만 베어내는 전략을 충실히 지키는 영리한 뱀이었네요.
레코더맨······.
촬영 나갈 때마다 죽는 건 당신의 긍지 같은 건가요······?
※ 본 다큐멘터리는 인류왕국 엑셀리온 국영 언론사 튜버 타임즈에 의해 기획 및 제작되었습니다.
※ 레코더맨은 사망 후 적합한 절차에 의해 부활하였습니다.
※ 본 촬영에서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 작가의말
본 다큐멘터리는 모든 직원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최고의 직장. 튜버 타임즈에서 제공하고 있습니다.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