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전생자 5
판타지 세계의 전생자들은 대부분 시골 영지 아센의 전생자 마을에서 태어난다. 덕분에 특출난 인재가 많은 그 마을은 '별이 내리는 땅'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전생자 마을의 이명이나 특징이 전국에 알려질 정도로 유명하지는 않았는데, 딱히 기밀로 취급한 건 아니다. 영지 자체가 너무 외진 시골에 있는 나머지 소문이 퍼지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전생자 마을에서 태어나기는커녕 아센의 존재조차 모르는 우말 안 개구리였던 그 청년은 자신이 판타지 세계의 주인공이라는 거나한 착각을 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자신에게 숨겨진 능력이 있다고 확신하거나, 골목길에서 사내 무리에게 위협당하던 여성을 구하겠다고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지도 않았을 거다.
만용의 대가는 뼈아팠다. 애초에 구하려던 여성이 골목길에서 위협당한 까닭은 그녀가 소매치기인 탓이었다.
뒤늦게 이를 깨달은 청년에게 명분은 없었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숨겨진 능력도 없었다. 청년은 소매치기를 놓쳐 분노한 사내들에게 말 그대로 먼지가 피어오를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
심지어 청년은 지갑까지 잃어버렸다. 소매치기가 틈을 봐서 도망치기 전에 당연하단 듯이 훔쳐 간 것이다.
늦게나마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2 치안 기사단이 와서 말리지 않았다면 그날 청년은 집이 아니라 영안실에서 잠들었으리라.
여기까지만 해도 상당히 울적하지만,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를 폭행한 사내들은 치안단 파출소 유치장에 하루 갇히는 정도로 끝났지만, 그는 취조실로 가야 했다.
그리고 거기서 그를 맞이한 건 치안단 기사가 아니라, 첩보와 암살을 담당하는 013 암첩 기사단의 기사였다.
"나이."
"여, 열일곱이요."
"아이고."
흐릿한 조명 하나뿐인 취조실 안. 암첩단 기사는 한숨과 함께 완갑을 풀더니, 그걸로 이세계 청년의 머리를 가볍게 때렸다.
"아저씨. 얼마 전에 상회에 오셀로 팔러 갔다가 퇴짜맞았었지?"
"윽. 그걸 어떻게?"
"뭘 보고 왔는지 몰라도 아저씨처럼 이세계에서 전생한 사람 중에 열에 일곱은 꼭 오셀로 팔러 가더라."
"아니, 뭐. 그야. 라이트노벨에서······."
"소설 보고 따라 하는 것도 어디 정도껏이지. 오죽하면 상인들이 아저씨처럼 오셀로가 대단하다면서 바가지 씌우려는 사람을 오쟁이라고 부르겠냐고."
"오, 오쟁이······."
"자, 다시 시작합시다. 나이."
"여, 열일······."
"전생 나이 플러스해서."
"···서른 둘."
"어, 뭐야. 그러면 열 다섯에 죽었어? 아저씨가 아니라 애네?"
"네······."
"그건 뭐, 고생 많았겠네. 왜 죽었는지까지는 안 물어볼게. 괜히 우울해질 거 같고."
암첩단 기사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보고서를 빠르게 채워가며 투덜거렸다.
"에휴. 이쪽이나 저쪽이나 어린 나이에 죽는 애들이 뭐 이리 많은지······. 그나저나 병영에서 나올 때 건수 올리겠다고 큰소리치고 나왔는데. 하, 씨. 양키놈이 또 죽어라 놀려대겠네."
"저기, 원래는 어쩌실 생각이셨는데요?"
"으음. 헛다리 짚기도 했고, 알려줘도 딱히 상관없으려나. 어이 꼬마 친구. 혹시 모험가들이 총 들고 다니는 거 봤어?"
"아, 네. 활보다 못하다면서 투덜거리던데······."
"그거야 시중에 화승총보다 약간 나은 쓰레기만 풀어서 그렇고."
" "
"하나 더 묻지. 저쪽 세계에서 살면서 외계인 고문이란 말 들어봤지?"
"으음, 도저히 현대 기술로 만들지 못할 거 같은 물건에 붙이는 말요?"
"그래. 그래. 스마트폰 같은 거."
"아니 스마트폰을 아시네."
"라이트노벨도 아는데 스마트폰을 모르겠냐 임마."
"그런가······?"
"우리로선 지구인이 외계인이지. 자, 여기서 문제다. 드라코 대륙에서 총을 제일 먼저 만든 건 어디 출신일까?"
"그, 그럼 설마······."
청년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비로소 자기 이전에도 수많은 전생자와 전이자가 있었음을 이해했고, 판타지 세계의 총이 그들 중 하나의 지식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이어서 자연스레 기사가 외계인 고문을 언급한 까닭에 의문을 가졌고, 질문 이전에 답이 먼저 나와버렸다.
"설마 고문으로······!"
기사는 입을 다문 채 표정을 굳혔다. 그 침묵이 답이라 생각한 청년은 안색이 창백해지는 걸 넘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풋."
미처 억누르지 못한 실소가 암첩단 기사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푸하하하! 아이고. 살짝 겁이나 줘볼까 했는데 이게 또 먹히네."
" "
"외계인 고문 먼저 말했다고 쫄기는. 야. 말귀가 통하는데 고문을 왜 했겠어. 제대로 돈 주고 스카웃했지."
"그래요······?"
"애초에 예전에 왕국에서 실권을 장악했던 튜버경도 이세계인이었고. 해부실험이니 고문이니 할 이유가 없지."
"그러면 외계인 고문 얘기는 대체 왜 했어요?"
"놀려먹으려고."
" "
이 나라 기사들 성격은 뒤틀려있고, 이 인간이 대표격인 게 아닐까.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사이, 암첩단 기사는 허리춤에서 총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다소 오래된 SF소설에서 광선총으로 볼법한, 둥그런 곡선형 디자인이 강조된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 총에서도 광선이 나오기는 했다.
앞을 향해 발사되는 게 아니라, 홀로그램처럼 허공에 마법진을 그리는 게 다였지만.
마법진을 벽에 가져다 대자 마법진을 중심으로 벽이 덜컹거리며 열렸다. 열린 틈새에서 천연덕스럽게 나타난 건 파출소나 길거리가 아닌, 수십 명의 기사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넓은 사무실이었다.
청년은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게 완전히 다른 공간하고 연결되어 있다는 걸 이해했다. 틈새로 보이는 공간만 해도 파출소보다 훨씬 넓었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공간 마법에 놀랄 새도 없이, 틈새 저편에서 금발에 굵은 턱선이 몹시 인상적인 남성이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작고 인상이 부드러웠다면 귀여울지도 모르는 행동이다.
하지만 넓게 벌어진 어깨와 옷으로 숨겨지지 않는 근육을 가진 마초 사나이가 불쑥 나타나는 건 귀여움보다 호러에 가까웠다.
"헤이 보이! 건수 올린다더니 잘 됐나? 브루클린 시궁쥐마냥 찌그러진 얼굴은 아니라고 말하는 거 같은데?"
"하필 대기타고 있던 게 댁이었냐. 브루클린은 또 어디 박힌 동네인데?"
"오우, 뉴욕 제일의 낭만이 살아있는 곳이지. 맨해튼 다리와 재즈가 어울리는 곳이기도 하고!"
"지구에 박힌 촌구석을 내가 어떻게 알아! 시끄럽고. 보고서나 가져가. 그리고 집으로 꺼져 양키놈아!"
"Ha-HA! 시도는 좋았어 보이. 돌아가려 해도 지구를 특정할 수 있는 절대 위상 좌푯값이 없어서 무리지만!"
"어쩌다 그 과묵한 제피 단장 후임으로 이세계에서 전이한 푼수가 암첩단 단장이 된 건지······."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라. 가장 어울리지 않는 거야말로 가장 어울린다는 뜻이지!"
"됐고, 보고서나 받아. 난 또 다른 데 가야 하니까. 근처 산에 UFO인지 뭔지 추락했다더라."
"아, 그 건이라면 보고 받았어. 다른 단원도 보내놨으니까 그건 천천히 하고. 어디 보자······. 아하. 특별히 위험한 능력도 없고 상식이 좀 모자란 정도다? 전생의 나이도 너무 어려서 기술적으로 얻어낼 건 없나."
거기까지 말한 암첩단 단장은 턱을 씰룩이며 흉계를 꾸미는 눈을 했다. 사실은 장난에 불과했지만 우람한 덩치에서 나오는 위압감은 장난과 거리가 멀었다.
"남은 건 외계인 해부밖에 없겠네~?"
"히익!"
청년이 새된 비명을 내질렀고, 기사는 벗어뒀던 완갑으로 단장의 머리를 후려쳤다. 청년에게 장난처럼 했을 때와 달리, 마력까지 담아서 아주 세게.
"그 농담 이미 내가 써먹었다. 그리고 그런 험악한 덩치하고 얼굴로 그딴 소리를 하니까 애가 과학에 겁먹었잖아. 쟤 다리 후들거리는 거 안 보여?"
"No~ X파일 조크는 내가 알려준 건데 왜 보이가 다 해먹는 거야?"
"너무한 건 암첩단에 안 맞게 깐죽거리는 댁이고. 공간 연결 끊을 거니까 얼굴 치워."
더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기사가 권총 방아쇠를 한 번 더 당기자 벽이 서서히 복구되기 시작했다. 암첩단 단장은 조금 더 떠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미 마법이 풀리고 있는 시점에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기사가 보고를 마치자 청년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저기, 그런데 이런 건 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딱히 숨길 이유가 없으니까. 애초에 언론사를 나라에서 운영하기도 하니까 정보가 새도 걱정할 게 없고······."
그는 씨익 웃으며 덧붙였다.
"너희 세계에서도 UFO나 외계인을 처리하는 정부 기관이 있다는 건 농담거리로만 끝나지 않던가?"
"앗, 확실히."
"뭐 그런 거야. 앞으로 처신 잘하라고. 꼬마 친구."
전생자며 전이자가 늘어날 대로 늘어난 판타지 세계.
그들을 감당해온 나라에는 개인이 상상도 못 할 이세계인 대응 조직과 미스터리가 도사리고 있었다.
- 작가의말
오늘은 ‘이세계 X-파일’이란 느낌으로 만들어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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