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현자 표류기 3
마법도 사용할 수 없는 무인도에서 탈출을 준비하기 시작한 뒤로부터 300년은 훨씬 넘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이 실패한 불사의 현자는 5,176번 탈출 계획의 실행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원점으로 돌아가겠어. 무인도 탈출은 역시 배로 해야지. 행글라이더 만들 때부터 목재를 따로 빼둔 보람이 있군."
시험 운행은 섬 근처에서 충분히 했다.
이제 본격적인 출항을 이틀 앞둔 이 날.
강한 바람이 오두막 지붕 위를 지나가는 가운데, 불사의 현자는 스산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돌하고 산호 대가리들이 허접한지, 내가 허접한지는 결과가 말해주겠지."
거친 해류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튼튼하게 만들었다고 자부했다.
셰이프나 산호들이 배로 탈출하는 건 무리일 거라고 말해도 현자는 반박하지 않았다.
"결과야. 이 세상은 오로지 결과만이 남는다고······!"
이 시기라면 바위공주의 섬 일대는 남풍이 강하게 부는 시기.
행글라이더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시도와 착오를 거쳐 만든 돛을 펼치면 해류를 뚫고 섬에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
"후후후, 폭풍전야라는 말이 어울리는구나."
"정답이야!"
"엥."
파트너로 정하고 '윌슨'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준 광물 인간의 산뜻한 목소리에 불사의 현자는 묘한 불길함을 느꼈다.
"저기, 뭐가 정답이라는 거니 윌슨?"
"왕궁에 놀러 갔을 때 페로자가 말해줬어."
"페로자는 또 누구고."
"바위공주님의 곁에 있는 열 두 개의 로얄 셰이프 중 열 두 번째야."
"아아, 셰이프끼리 섞여서 태어난 블렌더(혼합체) 말이로군. 그 망할 아말감처럼."
"페로자의 취미는 날씨관측인데, 폭풍이 어마어마하게 올 거래!"
막연했던 불길함은 그 말을 듣고 나자 좀 더 뚜렷한 형체가 되어 현자를 압박해왔다.
필요한 건 바람이지 폭풍이 아니다.
당장 내일 새벽이라도 출항할 수 있도록 해안가의 바위 사이에 정박시켜둔 배가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정말로 폭풍이 온다면 지금이라도 뭍으로 끌어와야 했다.
"어, 언제부터?"
"오늘 밤부터!"
"그럼 말해줬어야지!"
"···묻지 않아서?"
"그건 그렇긴 한데!"
셰이프와 수십 수백 년 동안 알고 지낸 현자는 윌슨의 답변이 악의 없는 순수함에서 비롯되었다 판단하고, 깊게 따지는 대신 한탄에 가까운 비명을 내질렀다.
단일 개체인 셰이프는 무척 순진무구해 대화상대로는 좋지만, 의지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다.
그들에게서 힘을 빌리거나 지적인 도움을 바란다면 바위공주의 로얄 셰이프는 아니더라도 여러 셰이프가 뭉치면서 탄생하는 혼합형 셰이프, 블렌더 정도는 되어야 했다.
셰이프를 작업 파트너로 택하느니, 차라리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우리라.
한편, 바람 소리는 이제 강한 정도가 아니었다.
맹렬하고 날카로웠다.
숲속에 세운 오두막이 삐걱거릴 정도라면, 해안가에 정박한 배는 어떨까.
"아, 안 돼! 안 돼!"
불사의 현자는 혼이 빠진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해변으로 달렸다.
달리는 사이에 비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거세게.
현자는 폭우를 이겨내려고 입을 벌리고 되는대로 고함을 지르며 달렸지만, 작은 셰이프조차 그의 처절한 비명을 듣지 못했다.
압도적인 자연 앞에서 사람이란 비명 하나 마음대로 내지르지 못할 정도로 무력했다.
그리고 배를 정박한 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바위 사이로 보이는 나무 파편을 보고 무릎을 꿇었다.
현자라는 칭호를 달 정도의 지식과 5,175번의 실패라는 경험을 가진 그에게 여전히 딱 하나 부족한 게 있다면, 그건 운이었다.
이날, 불사의 현자가 계획한 5,176번 탈출 계획은 실행하기도 전에 처참히 좌초되었다.
- 작가의말
다들 해피한 서든절 되셨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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