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 변화
당연한 얘기지만 신은 권능을 다룬다.
이는 그 존재에 따라서 다양한 방향으로 특화되었고, 상상하기도 어려운 힘을 발휘한다.
운페이가 혼돈을 몸에 두른 채 몸을 날렸다.
회색 빛 잔영이 그려지며 볼탄의 전면을 압박했다. 한껏 밀린 대기가 겹겹이 쌓이며 폭발했다.
[어리석은 인간. 그 죄를 물어주지.]
볼탄의 몸에서 황금색 빛이 터져 나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도색하고는, 비어있는 손 위로 거검 하나를 만들어냈다. 이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사위를 찍어 누르는 위압감을 드러냈다.
볼탄은 본디, 징벌의 신.
그의 권능은 무력 그 자체에 있다. 힘을 상징하여 나타나는 검은 무엇도 베어 낼 수 있고,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다.
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운페이와 볼탄이 충돌했다.
대기가 열화하여 터져나갔다. 너덜너덜해진 대지는 또 한 번 뒤집혀서 넝마가 되어갔다. 금빛 섬광은 회색의 물결에 저항하며 빛을 뿌려댔다.
[그냥 두지 않는다.]
[재가 되어라, 인간.]
볼탄을 따라온 신들 중 둘이 권능을 사역했다.
삭풍이 불고 탄화 된 돌이 솟아올랐다. 운페이가 맞댄 손을 떼어내고 이를 회피했다. 옷자락이 바람이 베어서 잘게 쪼개졌다.
“흥! 신이라는 것들이 꽤나 치사하군!”
비올레가 어둠을 불러와, 신의 권능을 걷어냈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어둠은 신의 것이 맞지만, 초월할 당시 얻은 힘의 근원 역시 어둠이 맞다. 그렇기에 이르미아가 그녀를 어둠의 씨앗으로 삼은 것이고.
낭창하게 뻗어난 손 끝으로 새카만 어둠이 휘몰아쳤다.
달빛이 죽고, 그 위로 검은 베일이 씌워졌다. 두 신이 이를 경시하지 못하고, 힘을 회수하여 맞서는 것에 집중했다.
[부질 한 짓이다, 인간. 초월을 하였다 해도, 너희의 숫자는 고작 둘. 그것으로 우리를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 한 건 아니겠지?]
금색 빛이 운페이의 몸을 훑고 갔다.
장포가 뜯어지고, 피부가 갈라져서 핏물이 솟아올랐다. 세레인의 다급한 비명 소리가 폭음 사이를 뚫고 흘러나왔다.
“아아……잠시만 기다려 보라고.”
손을 툭툭 털며 운페이가 답을 했다.
손해를 보았음에도 낭패한 기색은 없었다. 회색빛으로 만들어진 검을 양 손에 쥐고는 다시 볼탄에게 몸을 날렸다.
치고, 박고, 쓸었다.
순식간에 수 백 번의 공방이 이어졌다. 순차적으로 다른 신들도 이 싸움에 끼어들었다. 권능이 발현되고, 다양한 방법으로 운페이를 압박했다. 대기가 고정되고, 수분이 말랐다. 신이라는 이름으로 사용 할 수 있는 모든 힘이 인간 하나를 죽이기 위해서 동원되었다.
“큭……! 위험 한 거 아닌가?”
거리를 두고 몸을 피한 젠킨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상황을 비교적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운페이의 싸움이다. 그 결과가 인간 자체의 운명과 닿아 있음을 알았다.
“아니에요. 그는……”
“아니라고?”
왁슨이 눈을 좁히며 운페이를 바라봤다.
피가 나고 옷이 베어져 상태가 좋지 못하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운페이의 기세가 보였다.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싸움을 시작 할 때보다 강성해져 있었다.
“우, 운페이가 괜찮은 건가요?”
“성녀님.”
“말씀 해 주세요. 괜찮은 건가요?”
창백한 안색으로 세레인이 물었다.
날개가 뜯긴 후에도 비올레는 본래의 힘 덕에 금세 힘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세레인은 다르다. 그녀의 힘은 신들이 남긴 빛 자체. 그것이 뜯겨져 나갔으니 멀쩡한 몸을 유지 할 수가 없었다.
“운페이 경은 무언가를 노리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시간이 갈수록 확실해지고 있어요.”
“확실해 진다?”
“말로 하기가 힘듭니다. 그의 기세가 틈 없이 완성되는 느낌이에요. 처음 전투에 들어갔을 때는 흔들림이 많은 촛불이었지만, 지금은 꼿꼿하게 선 기둥과 같아요.”
세레인이 다시 시선을 돌려서 운페이를 바라봤다.
너무나 고속으로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지라, 그녀의 눈에는 제대로 보이는 게 없었다. 다만, 왁슨의 말 때문일까 왠지 모르게 조금 전 보다는 불안감이 덜했다.
[인간이 이 정도까지 올라 선 것은 칭찬하겠다. 하지만 무릇 생명은 자신의 주제를 알아야 하는 법.]
[너희의 운명은 정해졌다. 이곳에서 파멸하거라.]
달궈진 검이 운페이의 머리를 꿰뚫듯 떨어졌다.
대장장이의 신이었던, 올그라다. 끝도 없이 만들어지는 그의 검은 끊어 낼 수 없는 굴레와 같이 운페이를 속박했다.
“음. 아아……”
운페이가 몸을 반 치 움직이며, 손을 흔들었다.
쏟아지던 검의 세례가 그 위로 잡히며 물처럼 흩어졌다. 울그라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네놈! 무슨 짓을 한 거냐!?]
불같은 물음에도 그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손을 가만히 보며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흩어진 권능의 검은 희미한 흔적은 남은 채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정말이로군. 내 생각이 맞았어.’
쿵. 운페이가 허공을 때리며 근처에 있던 신을 압박했다.
깜짝 놀란 신이, 권능을 쏟아 부으며 접근을 차단했다. 삭풍이 몰아쳐서 벽을 만들었다. 산도 베어내는 바람이라, 다가 올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파스스……
하지만 운페이가 손을 가볍게 흔들자, 이 권능은 의미 없이 흩어졌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 없었던 것 같이. 이를 본 신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권능은 맞서 싸울 수 있으나, 이처럼 해체하지는 못한다. 가능 하다면, 권능의 주체 뿐이다. 외부에서 이런 식으로 대응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놀란 모양이군.”
[대체 무슨 수작질을 부린 거냐, 인간!?]
볼탄이 불같이 물어오자, 운페이가 양 손을 모았다.
그리고 천천히 벌렸다. 그 사이로 황금색 검이 빚어졌다. 찬란하게 빛나는 검은 볼탄이 들고 있는 것과 완벽하게 같았다.
[무, 무슨?]
가볍게 흔들어 본 운페이가 검을 해체했다.
“당연하지 않나? 내가 말 한 것이 옳다면, 너희의 힘들은 결국 혼돈에서 태어났다.”
[헛소리 하지 마라!!]
“허면, 이는 어떻게 설명 할 생각이지?”
황금빛 검이 다시 나왔다.
발치에서 삭풍이 불고, 끝도 없는 검이 그 주변을 감쌌다. 상대했던 신들의 권능이 운페이의 손을 따라 구현되고 있었다.
“남편, 어떻게 한 거야?”
“할 수 있는 일. 신들의 권능이 결국 혼돈에게서 나온 거라면, 혼돈이 이 모든 걸 다루는 건 당연하잖아.”
“……그런 거야?”
“그런 거지. 세상 모든 것들이 모여서 혼돈을 이룬다면, 결국 혼돈에서 세상 모든 것들이 시작됐다 보는 것이 옳아. 권능이라 해도 결국 세상의 한 부분. 혼돈을 다룰 수 있다면 이 역시 가능한 것이지.”
파앗. 손을 쥐어 만들어 둔 권능을 흩어냈다.
몸 안 가득 채우고 있는 혼돈의 기운이 잘게 요동쳤다. 싹을 피워서 이제 겨우 움트고 있는 중이다. 서넛 정도의 권능이 한계. 그 이상은 무리였다.
하지만 그걸 다른 이들이 알 게 뭔가.
신들의 눈에 경악과 불신. 그리고 공포가 자리했다.
[있을 수 없다……! 세상에 처음 난 위대한 존재는 우리들 뿐이다! 혼탁한 존재에서 우리가 나왔다니! 말 도 안 된다!]
[……그래! 헛소리로 우리를 기만하려 하다니. 저 인간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동포들이여! 그리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닙니다! 힘을 모아서 저 인간을 해치워야 합니다!]
이 모습을 보고 누가 신이라 말을 할까.
두려움에 헛소리를 찍찍 해 대는 건 결국 그들이 말 하는 하찮은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저열한 면이 있었다. 결국 신이라는 건 강대 할 뿐 위대하지는 않다.
[그만. 다들 그만하세요.]
[이르미아?]
[인정 할 건 인정 합시다. 부정 해 봐야 우리만 비참할 뿐이에요. 우리는. 우리 신들은 혼돈에게서 나온 것이 맞습니다.]
이르미아는 모든 신을 대신해서 계획을 주도했던 존재다.
무력은 볼탄에 밀릴지 몰라도, 그 말에는 분명 힘이 있었다. 신들의 술렁임이 더욱 더 커져갔다.
[무슨 헛소리냐, 이르미아! 너는 신의 권위를 부정하려는 것이냐!?]
[볼탄. 힘으로 세상 말미에 갇혀있던 우리가 다시 육체를 가지고 나온 건 누구의 힘이죠?]
[……]
[혼돈의 힘이 우리를 본래의 모습으로 돌렸습니다. 정녕 혼돈이 혼탁한 찌꺼기의 집합이라면 이것이 가능 할 거라 보십니까?]
당연한 얘기다.
신들도 알고 있던 바. 다만,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다. 입 밖으로 나온 진실에 싸움은 멎고, 침묵이 내려왔다.
[……그래서?]
그때, 볼탄이 씹어서 뱉듯 물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이제 와서 혼돈을 어미라고 부를 셈인가? 우리는 모두 어미를 세상 밖으로 밀어놓은 패륜아들이 되는 거고?]
[진실이 그렇다면 받아 들여야 하는 일이죠.]
[닥쳐라, 이르미아. 나는 그리 할 수 없다. 설사 저 혼탁한 것이 나를. 그리고 우리를 낳았다 하더라도 변하는 것은 없다. 이 세상의 주인은 우리고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은 모조리 쓸어버리면 그만이다.]
볼탄의 몸에서 강력한 힘이 새어나왔다.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르미아가 쓰게 웃으며, 운페이를 바라봤다.
“후. 이래서 애들은 어릴 때 교육을 잘 해 놔야 하는 건데. 혼돈, 이 상황을 어떻게 할 거야?”
“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역시 힘이 부족해서 그런 건가?”
쪼르륵 걸어온 혼돈이 운페이의 옆에 섰다.
그녀는 난장판이 된 전장에서도 털끝 하나 자치지 않았다.
“음. 음? 남편, 이 꼬맹이 왠지 익숙한데?”
“아하하. 그럴 수밖에. 너와 내 모습을 반씩 땄으니까. 아마 우리 딸이 생긴다면 이런 모습 일 거야.”
“……딸?”
비올레가 물끄러미 혼돈을 봤다.
혼돈도 고개를 돌려서 그녀를 마주봤다. 꼭 닮은 외모에 누가 봐도 모녀라 할 만큼 느낌이 유사했다. 혼돈이라는 거창한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 만큼.
“시오나.”
“응?”
“시오나로 지을래. 애도 이름은 있어야지.”
지금 이 상황이 이름이나 지을 때인가 싶다.
하지만 비올레는 진지했다. 혼돈을 지그시 보는 게 마음에 드냐고 묻는 거 같다. 잠시 고민하던 혼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오나. 마음에 들어.”
“후후. 그럴 줄 알았어. 딸이 생긴다면 그 이름으로 하고 싶었거든.”
“마누라. 애가 어떤 존재인지는 잊지 않았겠지?”
“상관없잖아. 지금은 이렇게 귀여운 아이인데.”
비올레가 희게 웃으며 시오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운페이 조차 놀랄 정도로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사납고, 유혹적이며, 호탕한 웃음이 아니다. 그건 정말로 딸을 보는 어머니의 웃음.
[나를! 우리를 놀리는 것이냐!?]
하지만 그녀의 웃음이 부드러운 만큼, 볼탄은 크게 분노했다.
그의 주위로 남은 신들이 모두 모여 들었다. 타이렌 등을 상대하는 소수의 신을 제외하고 남은 이들의 전부였다. 심지어 이르미아 뒤에 있던 신들 조차 볼탄에게 향했다.
“신들의 대답은 그것인가?”
[진실은 상관없다! 이 세계의 주인은 우리 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힘으로 그것을 관철하면 되는 일! 거부하는 놈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지워주겠다!]
“저런 패륜아 새끼를 봤나.”
운페이가 혀를 차고는 시오나 머리위에 올라가 있는 비올레의 손을 마주 잡았다.
남편과 아내. 그리고 딸 하나. 잠시나마 이상적으로 꿈꾸는 가족이 된 거 같아, 가슴이 따듯했다.
“시오나. 여기부터는 좀 도와줘야겠어.”
“어떻게?”
“좀 커다란 회초리가 필요하거든.”
잘못을 일깨워줘도 반성하지 않는 아이라면 결국 매를 들 수밖에 없다. 그것도 아주아주 호되게. 다시는 이런 생각 따위는 하지 못할 정도로 강하게 벌을 주어야 한다.
웅. 씨앗이 자신이 난 나무를 보며 공명했다.
- 작가의말
추석 후유증이 심하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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