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 부서지는 흐름
운페이는 혼돈에 대해서 알게 된 이후부터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초월예지와 비슷한 어떤 감각. 품안에 터를 잡은 혼돈과 같은. 즉, 본류에 대한 연결고리였다. 다른 존재와의 연결이 초월예지와 무엇이 같은가 물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답하기가 조금 모호한 부분이 있다.
혼돈에 닿은 느낌은 바다 속 깊은 곳에 잠긴 것과 비슷했다.
바다임은 느끼나 그 끝을 볼 수는 없는. 도도한 흐름이 이어주는 거대한 인과가 느껴지지만 무어라 명확하게 짚어 낼 수는 없었다.
의지?
명확하지는 않다. 혼돈에게서 뻗어 나오는 색은 산 위에 올라서 다 같이 뱉는 외침 비슷하니까. 하나의 목소리 같으면서도 뒤섞여 누구의 것인지를 알기가 어렵다.
“남편, 여기지?”
하지만 분명 한 것은 있다.
지금 이곳. 다양한 힘들이 뒤섞여 있는 이 장소에서 무언가 결론이 나리라는 것이다.
“너무 오래 걸렸군.”
“세레인……?”
“아니. 저건 세레인이 아니야.”
“후후. 긴 얘기가 될 거 같은데, 이쪽으로 오는 건 어떤가?”
운페이가 비올레와 함께 종탑 안으로 들어갔다.
교황청을 지키는 네 개의 문에는 사방을 감시하게 만들어 준 종탑이 하나씩 달려있다. 평상시라면 기사단이 상주하여 눈에 불을 킨 채 지켜야 할 곳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타이렌, 람, 움트라. 남은 사도의 전부인가?”
“그쪽을 먼저 신경 쓰는 건가? 세레인은?”
“어찌 할 생각이었다면 이런 무대까지 만들지는 않았겠지.”
타이렌 등과 아르미아가 대치를 하고 있다.
구석에는 왁슨과 젠킨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생각해 보지만 부질없는 짓이라 판단하여 머리에서 지웠다.
어차피 중요 한 건 그녀. 아르미아의 속내다.
“침착하네. 좋은 모습이야, 그건.”
“어이, 그 멍청한 계집애는 어디에 있지? 그 안에 있는 건가?”
“후후. 세레인 말인가? 물론 이 안에 있다. 지금은 잠들어 있지. 언제고 님이 와서 구해주지 않을까 하고 말이야.”
“님? 남편을 말 하는 거냐?”
“당연하지 않나?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있어. 그걸 몰랐다고 말 하지는 않겠지?”
비올레도, 운페이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둘 다 눈치 없는 멍청이가 아니다. 그녀의 마음 정도는 옛적이 눈치 채고 있었다. 다만, 한 사람은 차마 모질게 대할 수 없었던 것이고, 다른 한 명은 그걸 부풀리기 싫었던 것뿐이다.
“집어치워! 이곳에 사랑 놀음을 하기 위해 모인 건가? 아르미아. 네가 말 하던 배우가 모두 모였다. 원하는 게 대체 뭐지?”
“쯧쯧. 그렇게 감정이 메말라서야 어찌 이 세상을 살아가려는지.”
빙글빙글 웃은 그녀가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갑작스러운 일에 모두의 표정이 굳었다. 쑤욱 들어간 손이 가슴 안쪽을 헤집었다. 피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하얗고 빛나는 결정을 가슴에서 꺼냈다.
“그건……”
“열쇠. 이것이 혼돈의 봉인을 풀기 위한 마지막 조각이다.”
“그걸 내놔라-!”
타이렌이 힘을 사용하며 그녀를 몰아붙였다.
다른 사도도 힘을 보탰다. 거대한 에너지가 파도처럼 쏟아졌다. 거대한 힘의 향연에 종탑이 삐걱거리며 힘겨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만. 더 이상 힘을 쓰면 이 열쇠를 부숴버리겠어.”
“뭐, 뭐!?”
“열쇠는 봉인의 핵과 같아. 세대를 넘어서 전승되게끔 설계되어 있지. 여기서 부서지면 그대로 흩어졌다가 다음 세대의 성녀를 찾아서 나타나게 될 거야.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은 거야?”
“네, 네년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지만 타이렌이 할 수 있는 바는 없었다.
그는 혼돈의 봉인을 풀어야만 하는 입장이다. 이미 림의 조직까지 모두 공개되며 일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열쇠가 부서진다면 그만한 타격은 없을 것이다. 다음 세대의 거사를 위해 숨어든다면 그게 몇 년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너희 둘은 어때? 이 열쇠가 필요해?”
“필요……”
“필요없어!”
운페이보다 한 발 앞서서 비올레가 외쳤다.
“그래? 혼돈의 힘이 있어야 너희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길 수 있다는 건 알 텐데?”
“흥! 분명 그건 맞는 말이야. 남편과 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혼돈의 힘이 필요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죄다 집어치우고 거기에 매달릴 생각은 없어! 아이를 원하는 건 진심이야……다만, 남편이 그보다 더 중요할 뿐이지. 허튼 생각으로 나를 유혹 할 생각일랑 집어치워.”
“아하하. 생각보다 멋지게 변했네.”
“역시 그때의 신은 너였군.”
“뭐, 그렇지.”
아르미아가 조금은 부드러워진 얼굴로 수긍했다.
혼돈이 잠들고 모든 계획이 시작되었을 당시, 비올레를 찾았던 것이 그녀다. 어둠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하고 재생을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수천 년도 지난 이야기.
“이해하기 어렵군. 아르미아, 당신이 원하는 건 대체 뭐지? 혼돈의 봉인을 풀기 위함이었다면 이런 건 필요 없겠지. 하지만 반대라면 더 이상해. 대체 무슨 걸 바라고 이런 모습을 연출하는 거지?”
“세계의 평화.”
“……뭐?”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이러는 거라고.”
누구 하나 황당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게 무슨 누오 똥에서 금 나오는 소리란 말인가. 세계 평화라니. 머리에 왕관이라도 씌워줘야 할까?
“혼돈은 우리와 같은 신이 아니야. 그것은 그저 에너지와 의식 찌꺼기의 집합체. 너무나 거대한 에너지에 육체가 생겨나고, 법칙조차 거스르는 존재가 되었을 뿐.”
“신이 아니다……?”
“그래. 혼돈에게는 의지가 없어. 그저 존재하고, 그 힘을 사방으로 사용 할 뿐이야. 너희 인간이 그 일면을 얻어 초월한 존재가 되었고, 정령은 더 높은 곳으로 스스로를 인도하려 하였지.”
너무 무질서했던 시기다.
수많은 신들도 이를 어찌 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했다. 인간은 힘을 얻어 파괴를 일삼았고, 수많은 종족이 멸망했다. 세계는 혼탁해지고 어디에도 질서는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너희 신들이 혼돈을 봉인했다고 말 하는 건가?”
“일단은.”
“일단은……? 무슨 소리지? 다른 의도가 있었나?”
“아하하. 너희는 신이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힘만 센 멍청이들. 아닌가?”
비올레가 톡 쏘았다.
하지만 아르미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야. 신은 인간과 다르지 않아. 힘이 셀 뿐 그들의 생각, 사상, 행동거지는 대동소이하지. 혼돈을 봉인 할 때도 그랬어. 그들이 이 순수한 힘 덩어리를 단순히 봉인하는 것에 크나큰 아쉬움을 가졌어.”
“혼돈에 욕심을 냈다는 건가?”
“아아. 욕심 욕망 탐욕. 너무나 근원적인 감정이지. 신도 벗어 날 수 없었어. 그렇기에 신들은 스스로를 에너지로 해체하면서까지 한 가지 계획을 꾸미지.”
그녀가 손을 들어 운페이와 비올레를 가리켰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손으로 찔렀다.
“어둠을 대표하는 것이 비올레. 빛을 대표하는 것이 세레인. 그리고 그 가운데서 혼돈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너. 운페이.”
“……무슨 헛소리지?”
“이해하고 있을 텐데? 지금 네 몸에서 싹 튼 혼돈을. 생각 해 본 적 없어? 다른 사도도 공허와 혼돈의 힘을 가지고 있는데, 왜 같은 걸 싹틔우지 못했나?”
운페이가 타이렌 등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들은 답을 해 줄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 역시 당황한 얼굴로 운페이를 보고 있었으니까.
“어둠의 비올레. 빛의 세레인. 둘 사이에 위치한 너는 지속적으로 혼돈의 중심에 서게 된 거지. 몸에 품은 공허 안으로 싹이 트고, 이는 점차 하나의 존재로 성장하게 된 거야. 아무것도 모른 채 힘을 쓰기에 급급했던 저 멍청이들과는 다르게.”
“개소리!! 위대한 신을 인간이……인간이 품었다는 건가!?”
“글쎄 신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혼돈은 그저 현상과 같은 거야. 물체를 던지면 아래로 떨어지고, 시간이 지나면 생명이 나이를 먹는 것과 같아. 혼돈은 태어 날 수밖에 없는 존재였어.”
짐승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인간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생명은 살아있다는 흔적을 세계에 남긴다. 이는 축적되어 잘려진 의미의 표상을 타고 흐른다. 그것이 가장 낮은 곳으로 뭉쳐서 쌓이게 된다. 그렇게 탄생 한 것이 혼돈이다. 위대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신도 그러하듯, 그렇게 거대한 힘을 누군가 의지를 가지고 다루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지지.”
“혼돈을……다루기 위함이었군.”
“후후. 그래. 좌우에 달린 날개라 해야 할까. 비올레와 세레인은 네 중심을 잡아주는 균형추와 같은 거였어. 온전하게 혼돈이 싹을 틔워서 우리가 바라는 대로의 신이 되어 주게끔.”
성녀를 통한 빛의 탄생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어둠의 선택과 이를 가운데에서 품을 주인의 탄생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비올레를 보았다. 그녀는 인간을 그리워하여 권속을 만들었다. 다른 마왕들의 창조물과는 달랐다. 그녀는 인간을 초월하였지만,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둠이 한 줄기 빛을 품어야 하는 조건과 맞아 떨어졌다. 그리하여 비올레가 어둠이 될 존재가 선택되었다.
그렇게 몇 천 년이 흘렀을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운페이가 등장했다. 그는 공허와 싸우는 비올레와 만났고 그녀와 사랑을 하게 된다. 어둠은 사랑을 품었고, 인간은 어둠을 품게 되었다. 게다가 그 인간은 그 당시 성녀였던 세레인과 깊은 인연이 있는 자였다.
때가 왔다.
계획이 시작된 것이다. 타이렌 등은 스스로 혼돈을 깨우기 위해 모든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면에는 아르미아를 비롯한 신들이 있었다. 그들은 에너지만 남긴 채 봉인의 조각이 되었지만, 이에 접촉하는 타이렌 등에게 영향을 미치는 건 어렵지도 않았다.
“그럼 어째서 세레인을 데리고 간 거지? 너희가 원하는 대로라면 내 곁에 그녀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균형이 안 맞거든. 비올레에 대한 네 사랑이 너무 깊어서 한 쪽으로 균형이 기울어졌어. 그래서야 온전한 혼돈이 될 수 없어.”
“……내가 억지로 세레인을 사랑하기라도 하라는 말이냐?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반드시 그러란 법이 있나? 네가 세레인을 사랑하게 되는 일도 있을 거 같은데.”
반복적인 말에 운페이가 인상을 구겼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 나는 세레인을 사랑하지 않아!”
“……아.”
“응?”
“아, 응. 그러니까 그게……알고는 일었는데. 응. 여기는 어디지? 아……”
휘청거리던 아르미아. 아니, 세레인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미묘한 기운이 그녀 몸 주변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세레인!”
“오, 오지마!”
파앙. 달려가던 운페이의 몸이 뒤로 튕겨나갔다.
손과 발이 저릴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방금 그 말은……”
“알아. 나도 안다고.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네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는지도. 그냥. 그냥 곁에 있고 싶어서 그랬던 거뿐이야. 네 옆에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했으니까……”
일렁임이 점차 커져갔다.
이는 세레인을 뒤덮고, 종탑의 절반 가까이를 채웠다.
“세레인! 진정해!”
“하지만……하지만……그래도 혹시나 하고 바랬어. 네가 나를 돌아봐 주기를. 너를 먼저 만난 건 나였는데. 따뜻한 말을 걸어 준 것도 내가 먼저였는데. 왜 내가 아닌 그녀일까. 왜 네 곁에 설 수 있는 건 내가 아닌 그녀일까……?”
드득. 드드드.
종탑이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닥이 갈라지고 천장에서는 흙먼지가 떨어졌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힘은 사위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타이렌을 비롯한 사도들은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여겼는지 밖으로 몸을 피했다.
“젠장……!”
“남편, 우리도 피해야 해!”
“하지만 그녀는……”
“남편!!”
운페이가 갈등했다.
그가 사랑하는 건 비올레가 유일하다. 하지만 세레인은 어릴 적 유일하게 따뜻한 모습을 보여 준 친구다. 그 따스함은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유일하게 빛이 되어 준 것이었다.
“그래도 그냥 갈 수는 없어.”
“남편……”
“마누라. 마누라는 내가 이런 상황에서 도망이나 치는 놈이었으면 해?”
“……못됐어. 다른 여자 구하러 가는 길에 응원하기를 바라는 거야?”
“우리 마누라는 대인배니까.”
말하면서도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 싶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마음은 확고하다. 이 웃기지도 않는 신파에 그녀를 희생시킬 수는 없다.
“다 끝나고 각오해.”
비올레가 운페이의 손을 마주잡았다.
뻗어오는 회백색 물결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꺄아아아아아!!!”
세레인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 작가의말
세레인의 운명은 과연......
* 그보다 새 글에 관심 좀 가져주세용~ 좀 다크하게 시도하고 있는 글이랍니다. 홍보 글 타이밍 기다릴 시간이 없어서 이렇게 남기는 수밖에 없네요 ㅠㅠ
* Great Father 연재중입니다. 자기글에 자기 글 남기는건 괜찮겠죠?
Comment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