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구르단
붉은 낙뢰가 떨어졌다.
세상을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여 버리는 것 같았다. 하늘에 뜬 태양조차 그 빛에 초라함을 느껴 고개를 숙였다. 떨치는 위력은 대기를 짓눌렀고, 대지에 자리한 생명들은 공포에 눈을 조아렸다.
굉음이 그 뒤를 이었다.
먹먹하여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소리였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입을 벌리고 소리치는 사람들은 모두 벙어리가 되었다. 뻐끔거리는 입모양만이 퍼지는 소리의 물결위에 부표처럼 떠다녔다.
떠오른 먼지와 흩날리는 바람.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충격이 사방을 휩쓸고 난 뒤 잔재로 남아 너울거렸다. 범위 밖에 있던 이들은 세레인의 방어막에 의해 간신히 몸을 건사 할 수 있었다.
“……”
“후. 화려하게 하셨군.”
세레인은 붕어마냥 입을 벌렸고, 운페이는 귀를 탁탁 치며 탄성을 흘렸다. 몇 번 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때마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승지기들이 고대의 마법을 이어와 사용한다지만 비올레는 고대의 존재 그 자체. 그녀가 사용 할 수 있는 마법에는 아득한 시절에 신조차 두려움에 떨게 만든 것도 있었다.
지금 사용한 것은 하그니트(Hagnite).
테이올라의 전율이라고도 불리는 마법이다. 아주 오래 전 존재했던 뱀파이어 로드가 자살 할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결과는 보다시피 끔찍할 정도의 마법으로 탄생했지만.
“그……”
가라앉은 먼지 사이로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비올레가 뚜벅뚜벅 걸어가 쌓인 먼지를 손짓으로 밀어냈다. 그 아래, 엉망이 된 몰골의 구르단이 보였다. 사지는 태반이 부서졌고, 상체 일부와 머리 정도만이 남아 있었다. 사실,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키킥. 벌레 같은 모습이군.”
“네, 네년……”
“아아. 어디를 움직이려고. 벌레답게 바닥에서 꿈틀거리라고.”
“크아악!!”
비올레가 구르단의 가슴을 발로 밟았다.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던 가슴뼈가 함몰되고, 심장 부근이 깊게 찔렸다. 구르단의 입으로 핏물이 흘러나왔다. 눈은 충혈 되어 툭 하고 튀어나올 듯 보였다.
“고통스럽나? 고통스러워서 죽을 거 같아? 응? 어떻지?”
“그아아……!!”
구르단이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손도 발도 없다. 목 위로 남은 머리만이 간신히 흔들릴 뿐이었다. 그 모습에 비올레가 입술을 핥으며 웃었다. 가학적인 모습. 이게 그녀의 본성이었다.
툭. 그때, 그녀의 어깨를 누군가 잡았다.
조금은 뜨거운. 익숙한 손이었다. 그녀가 눈매를 조금 좁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잊지 못할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애들 놀라.”
“……”
“자자. 이걸로 진정하라고.”
운페이가 혀끝을 이로 살짝 물어 핏물을 베게 했다. 그리고 비올레의 허리를 잡으며 입맞춤을 했다. 피와 온기. 그 안에 든 마력이 비올레의 정신을 가볍게 두드렸다. 사람이 온기를 주고받기 위해서 악수나 포옹을 하는 것처럼.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운페이의 존재에 그녀의 눈매가 천천히 풀려갔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운페이가 입술을 떼어냈다.
“……”
“눈에서 힘 풀어. 이미 다 풀린 거 아니까.”
“하지만 좀 아쉬운데? 이왕 하는 거 조금 더 해 주면 안 될까?”
“여기서 하기는 좀 그렇잖아. 사람들 눈도 있고.”
“킥. 남편은 은근히 부끄럼쟁이라니까?”
비올레가 킥킥 거리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구르단을 누르고 있던 발도 풀어냈다. 섬뜩하게 자리했던 기세가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혈인 마법은 뱀파이어의 종족 마법. 그 만큼 본성을 자극하는 힘이 있었다. 비올레가 종족을 초월 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능력을 쓴 마당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마 운페이가 없었다면 피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일단은……”
운페이가 시선을 구르단에게 돌렸다.
몸뚱이가 조각 난 상황에서도 그는 살아 있었다. 가슴 언저리와 팔이 붙어있던 자리 등에서 붉은 기포가 계속 끓어오르며 재생을 시도했다. 실로 대단한 생명력이었다. 공허의 힘으로 초월적인 재생력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는 상식 이상의 수준이었다.
“좀 물어 보자고. 공허. 그리고 권능은 대체 어떻게 손에 넣은 거지?”
“크으으……”
“솔직하게 대화를 나눠 보자고. 아니면 이 고통이 끝나지 않을 거 같은데.”
“크아악!!”
운페이가 팔이 있던 부위를 발로 걷어찼다.
부글거리던 기포가 팍 하고 부서졌다. 재생이 시도되고는 있지만 비올레의 마법이 강력하게 힘을 구사하고 있어, 쉽지가 않았다.
“순순히 말 하면, 고통 없이 끝내주지.”
“내가……내가 말 할 거 같으냐!?”
“할 거 같은데? 얼마나 참을 수 있겠어? 하루? 이틀? 일주일? 아쉬운 건 우리가 아니라고. 이 고통이 평생 동안 이어진다고 생각 해 봐. 네 잘난 고집이 끝까지 이어 질 수 있을 거 같아? 그냥 지금 포기하라고. 말 하고 끝내. 어렵게 갈 필요가 없잖아.”
“너, 너……”
구르단이 이를 갈았다.
부드럽게 웃으며 얘기하는 운페이 때문이다. 차라리 광기 어린 비올레는 나았다. 참고 버티면 홧김에 손을 쓸 족속이니까. 하지만 운페이에게서 느껴지는 느낌은 전혀 달랐다. 한계 없는 의지. 위도, 아래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라면 정말로 평생 동안 이 상태를 유지하게 만들 수 있어 보였다.
“어때? 이제는 말 할 생각이 드나?”
“크으으……”
일그러지는 구르단의 얼굴을 보며, 운페이가 가볍게 웃었다.
앞서 싸울 때도 느꼈지만, 구르단은 가진 바 강맹한 힘에 비해서 의식 수준이 낮았다. 단지 저급한 도발을 했기 때문에 그리 느낀 것이 아니다. 권능을 불러왔을 때의 불안정함이나 전투 시의 어긋난 감각 등이 그러했다.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았다. 누군가 억지로 힘을 주입 한 듯한 느낌.
“!!”
잠시의 생각에 빠져 있는 순간.
구르단의 입안에서 검은 기운이 솟구쳐 운페이의 팔을 감쌌다. 너무 빠르고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 조차 반응하지 못했다.
“남편!”
“이, 이건!?”
운페이가 황급히 손을 흔들어 검은 기운을 털어내려 했다.
하지만 아교라도 바른 듯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몸속에서 이 기운에 동조하는 존재가 있었다.
“이, 빌어먹을 놈이!!”
비올레가 권능으로 검은 존재를 잡아 당겼다.
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운페이의 팔을 잡은 존재. 즉, 공허는 그녀가 다루는 권능을 상회하고 있었다.
“크으윽!!”
운페이가 팔을 잡은 채 무릎을 꿇었다.
구르단에게서 완전히 분리 된 공허는 운페이의 팔을 파고 그의 몸을 파고 들어갔다. 안에서 당기고, 밖에서 파고들고. 운페이가 전력으로 이를 막아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삽시간에 몸 안으로 들어와 깃들어 있던 공허와 동조를 하기 시작했다.
“세레인!!”
비올레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세레인을 불렀다.
그 외침에 세레인이 폭발적으로 성력을 구현했다. 운페이의 몸이 성력에 반발하는 것 때문에 망설이고 있던 것이다.
새하얀 빛이 운페이의 몸으로 떨어졌다.
몸 안에 있는 공허와 새로 들어온 공허가 즉시 이에 반발했다. 그의 몸 주변으로 새카만 연기가 피어올랐다.
“끄으으……”
운페이의 눈이 하얗게 돌아갔다.
성력으로 새로운 공허를 막아내려 했지만, 공조 현상이 너무 강했다. 이를 끊어 내기 전에 운페이의 몸이 타 버릴 판이었다.
“운페이……”
세레인이 어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녀도 눈치가 있고, 머리가 있다. 지금 운페이의 몸으로 파고 든 것이 말로만 듣던 공허임은 바로 깨달았다. 그렇기에 비올레가 자신을 부른 것이기도 하고. 하지만 공허를 잘라내기 전에 운페이가 성력에 반발해서 죽어버릴 것 같았다.
멈출까?
하지만 이미 공허의 제어가 안 돼서 힘들어 하는 운페이다. 또 다른 공허를 받아들이고 나서 그 여파가 어떻게 올 지 장담하기 어렵다.
계속 힘을 사용할까?
공허의 반발로 운페이가 받는 피해와, 공허가 물러나는 힘의 수준. 둘 중 후자가 더 낮은 것이라 장담 할 수가 없었다. 무리하게 힘을 주다가 운페이가 먼저 죽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떻게.
세레인이 당혹으로 어지러워하는 순간.
그녀의 가슴 한 쪽에서 기묘한 기운이 새어나왔다. 기존의 성력과 거의 비슷한. 지금과 같이 집중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차이였다.
이는 쏟아지는 성력에 스며들어 운페이의 몸을 어루만졌다.
반발은 사라지고, 고통은 잦아들었다. 날뛰던 공허는 고개를 숙이고, 표백되던 운페이의 눈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팟. 짧은 빛을 남긴 채, 세레인의 성력이 끊겼다.
풀썩. 쓰러지는 운페이를 비올레가 황급히 안아 들었다. 그녀도 사실 정상은 아니었다. 직격은 아니었지만, 세레인의 무지막지한 성력 기둥 근처에 있었으니까. 피부가 끊어 올라서 까만 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우, 운페이!?”
“운페이!”
세레인과 세세이가 다급하게 외치며 그에게 뛰어갔다.
비올레가 침착하게 그의 생명력부터 점검했다. 미약하지만 안정되어 있었다. 딱히 공허의 움직임도 잡히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목숨에는 지장이 없는 것이다.
“어, 어떻게 된 거야?”
“그건 내가 묻고 싶군. 무슨 짓을 한 거지?”
“무슨 짓?”
“내 눈을 속이려 하지 마. 네 성력에는 다른 힘이 섞여 있었어. 그리고 그 힘이 공허를 진정시켰지. 대체 무슨 꿍꿍이냐!?”
비올레가 운페이를 안은 채 세레인을 노려봤다.
성력에 가장 민감 한 것은 그녀. 그런 그녀가 다른 성질의 힘을 감지하지 못할 리 없다. 게다가 방금 전은 공허가 미쳐 날뛰던 상황. 그런 상태를 단번에 진정시킬 수 있는 힘이라는 건 그녀의 상식에서는 없었다.
“나, 나한테 왜 그래? 나도 모른다고.”
“흥! 그래서, 그 힘이 네 것이 아니라는 건가?”
“그, 그건……솔직히 나도 모르겠어. 나도 조금 전에야 느낀 거라고. 전까지는 전혀 몰랐어!”
“그걸 믿으라고 하는 거냐!?”
비올레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지금까지 함께 여행 한 사이지만, 다른 의도가 있어서 접근 한 거라면 용서 할 마음이 없었다. 목 줄기를 파고들어, 그 핏물을 모두 마셔 줄 생각이 있었다.
“그만……”
“남편!”
“운페이!”
그때, 운페이가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하고는 힘겹게 눈을 떴다. 하얗게 물들었던 동공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후우. 싸움은 나중에……”
운페이의 말에 세레인이 시선을 돌렸다.
토막 나 있던 구르단의 시체는 가루가 되어 있었고, 그가 지휘해 온 오돈 왕국국은 모두 바닥에 고꾸라져 있었다. 영문을 몰라 하던 코쿤 왕국 군부터, 근처 행인들까지. 천천히 사태를 파악하고는 승리를 외치기 시작했다.
만세. 이겼다. 살았다. 등.
금세 환호성이 일대를 뒤덮었다.
“쉴 수 있는 곳으로……”
“그럴 거 같았다.”
어딘가에 숨어있던 테일러가 불쑥 나왔다.
그 옆으로는 상인으로 보이는 남자 몇 명이 서 있었다.
“시설은 확실 한 거겠지?”
“무, 물론입니다. 가장 좋은 곳이죠.”
“좋아. 이 남자를 따라가자고. 친형이 여관을 한다더군.”
일행이 전투에 한창 일 때 다른 상인들과 얘기를 해 두었던 것 같다.
발이 빠른 건지, 위험에서 도망 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도움이 되는 행동이었다. 비올레가 힘없는 운페이를 안아들었다.
“앞장 서.”
공주님 안기로 안긴 운페이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 작가의말
하그니트(Hagnite) : 혈인 마법 중 하나. 피로 만든 번개를 소환한다. 시전자의 마력에 비례해서 위력이 정해진다. 물리력으로 방어하는 건 거의 불가능.
예전에도 한 번 나온적이 있지만, 세레인이 가진 힘은 하나가 아닙니다.
공허. 이 이름이 중요 한 거죠.
재밌게 보고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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