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통곡의 벽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그대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에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저도 경계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알게 되면 반드시 연락을 하도록 하죠.”
젠킨의 눈이 다른 곳으로 향한지 3일 정도가 흘렀을 무렵.
운페이는 페어리들에게 생츄어리와 림을 쫒는 것이 쉽지 않음을 토로했다. 몇 번의 큰 사건이 있었기 때문일까, 모습을 완전히 감췄기 때문이다. 운페이와 비올레가 빼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다지만, 이 넓은 성국에서 몸을 숙인 자를 찾기는 어렵다.
페어리 공주는 사정을 이해했다.
게다가 그들 역시 더 이상 성국에서 머무르기 힘든 상황. 결국, 돌아갈 채비를 꾸리기 시작했다. 성국에 들어올 당시의 인원과 비교하면 채 일 할도 안 되는 수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와 연락을 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음. 그러니, 이 아이를 남기도록 하죠.”
“캬?”
“린. 그대가 이들 곁에 남아서 눈과 귀가 되어 주세요. 할 수 있겠죠?”
경매장에서 구해왔던 우든 페어리 일족의 전사, 린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주의 질문에 답을 했다. 그들에게 공주의 명령은 절대적. 활화산 같이 눈빛을 빛냈다.
“아직 페어리를 찾고 있을지 모릅니다. 일단은 모두 데려가고, 다른 방식으로 접선을 하는 게 어떨까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린, 나사사(Nasasa)를 하도록 해요.”
나사사. 들어 본 적 없는 단어에 운페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린은 가볍게 답을 하고는 세세이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캬악. 캭.’ 운페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무언가를 얘기하더니, 날개를 파르르 떨며 고개를 숙였다.
“우리 페어리는 반 정령체의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은 무리지만, 드루이드에 한정한다면 계약이 가능하죠.”
츳. 츠츠츠.
린의 몸에서 환한 빛이 새어나왔다. 머리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색이 깃들어 있던 곳이 하나씩 발광하며, 하얗게 표백되었다. 앞에 선 세세이가 입을 살짝 벌리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나사사. 이제야 기억이 나는군. 드루이드의 형상변환 능력을 빌어, 페어리가 정령화 하는 기술. 역시 공주라 이건가. 오래된 기술인데, 잘도 알고 있군.”
비올레가 손뼉을 치며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정령화. 반 정령인 페어리의 몸을 드루이드 특유의 능력을 빌어, 완전 정령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페어리 하나가, 드루이드 하나와. 일대 일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기술로, 고대로부터 전해진다.
파앗-!
짧은 빛이 방 안을 채웠다.
린이 있던 자리에는 주먹 만 한 빛 덩어리만 남아 있었다. ‘정령?’ 운페이가 처음 보는 광경에 신기 한 듯 묻자, 비올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공을 붕붕 돈 린이 페어리 공주 앞에 서서는 빛 무리를 흩날렸다.
“린, 잘 부탁해요. 생츄어리에 배신자가 있다면, 그것은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다른 곳에 있는 동포들 역시 위험 한 상황. 린의 역할이 막중해요.”
그녀 앞에 선 린이 빛을 반짝이며 응대했다.
정령화를 한 상태라 말은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본래대로 돌아 갈 수도 있는 겁니까?”
“가능해요. 이 능력을 유지하는 건 저기 있는 드루이드의 힘이니, 일정 거리 이상 벗어나게 된다면 곧 본래의 상태로 돌아오게 될 겁니다.”
“그럼 세세이 곁에 머무르기만 하면 이 상태가 유지된다는 거군요.”
세세이가 두 손을 꽉 쥐고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녀는 은혜 입은 몸. 무언가 도움이 되는 것 같자, 기분이 좋아졌다. 볼이 발그레했다. 린이 표르르 날아서 그녀의 머리위에 앉았다. 머리카락에 파묻히니 금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인간인 그대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 우습지만, 어쩔 수 없군요. 부디 우리 가족을 해친 이들이 누구인지 밝혀 주세요.”
“걱정 마시기를.”
“아, 그리고 이것……”
드디어 주나. 운페이가 번지는 웃음을 꾹 참았다.
공주가 날개를 파르르 떨자, 희미한 빛이 그 위로 잠시 머물렀다. ‘페어리는 모든 게 날개로 통하나?’ 낮게 중얼거리는 순간, 툭 하고 바닥으로 무언가 떨어졌다.
“휴. 이것이 페어리의 정수입니다. 인간에게 넘어가는 건 처음이군요.”
“소중히 다루겠습니다.”
“당신이라면 그럴 거 같군요. 이상하지만……”
공주가 희미하게 웃으며 구슬을 넘겼다.
크기는 엄지손가락 만 했다. 푸른빛이 은은하게 감돌고, 들고 있는 것만으로 청량감이 몸에 깃들었다.
“그럼, 뒷일을 부탁하겠습니다. 린도 잘 부탁하고요.”
“무사히 돌아가기를 빌겠습니다.”
공주를 비롯한 페어리들이 마차에 올랐다.
서문의 사람들은 이미 비올레가 손을 써 둔 직후. 림의 인물들이 감시에 손을 뻗었다 한들, 뱀파이어의 최면을 이겨 낼 방도는 없었다. 스쳐가는 마차는 아무 일 없이 성문을 통과할 것이다.
탕. 운페이가 마차의 문을 닫았다.
이내 덜그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
“갔군.”
“갔네.”
떠나는 마차를 보며, 운페이와 비올레가 동시에 말했다.
목소리에서 후련함이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맡았다지만, 집안에 불청객들이 여럿이 몰려있는 건 아무래도 거슬리는 일이었다. 특히 비올레가 그러했다. 페어리들은 대놓고 그녀를 싫어했으니까.
“저, 저. 이거, 아니. 린이 조사는 언제부터 할 거냐고 물어봐요.”
“지금 남편이랑 오붓하게 있는 거 안 보여? 확 튀겨버리기 전에 닥치라고 전해주렴.”
윙윙. 세세이의 머리카락 사이에서 린이 튀어나왔다.
반짝이는 게 꼭 반딧불 같다. 빛의 강도를 바꿔가며 자신의 감정을 피력했다. 하지만 비올레에게 그게 먹힐 리 없다. ‘흥!’ 콧방귀를 뀌며 손가락으로 그녀를 튕겼다. 비물질인 정령 상태이지만, 비올레는 뱀파이어. 그 정도의 간극은 쉬이 넘을 수 있다. 딱 소리가 나고, 린이 빙빙 돌아 다시 세세이의 머리위로 추락했다.
“린. 조급한 마음은 알지만, 조사는 이미 진행 중이야. 걱정 할 필요 없어. 이렇게 큰 성에서 특정 무리를 찾는 건 다급하게 움직인다고 될 일이 아니지. 적당한 준비와, 알맞은 타이밍.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야.”
“남편 말 잘 들었지?”
비올레가 기세가 올라서 한 마디 덧붙였다.
허리춤에 손을 딱 올리고 말 하는 모양새가, 안주인으로 제격이었다. 운페이가 픽 웃고는 그녀의 허리를 감아 가까이 당겼다.
“마누라도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고. 이래저래 기댈 곳이 우리밖에 없는 처지잖아.”
“남편은 너무 마음이 여려서 탈이야. 이곳으로 돌아오고 난 뒤부터는 더 그래.”
“그런가? 나도 어쩔 수 없나 보네.”
운페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험지에서 갈고 닭은 마음이라 해도, 고향으로 돌아오니 풀어진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지적당하니 조금은 민망했다. 비올레와 함께 성국으로 떠나기 전에, 변하지 않는다고 그리 당당하게 말 했었으니까.
“흥! 뭐, 싫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저런 꼬맹이들보다 나를 좀 더 봐 줬으면 해.”
“당연한 얘기야. 내가 사랑하는 건 우리 마누라 밖에는 없다고.”
“그럼 증명……읍!”
그럴 말이 나올 줄 알았다.
운페이가 한 발 앞서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옆에서 보던 세세이가 얼굴을 확 붉힌 채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가 벌어진 건 어쩌면 착각. 머리카락으로 불시착 했던 린은 다시 반짝이며 솟아올랐다. 왜인지는 그녀만 알 것이다.
쪽. 가벼운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입이 떨어졌다.
운페이가 ‘오늘부터 자유이용권?’ 이라며 귓속말을 했다. 비올레가 붉어진 얼굴로 그를 힐끔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불타는 3일의 시작이었다.
***
교황청 내부 접객당.
정갈하게 꾸며진 방 안에 두 사람이 마주보고 앉아있다. 한쪽은 세레인. 하얀색 신관복에 푸른 빛 나는 티아라까지 걸치고 있었다. 성녀가 공식적으로 움직일 때 착용하는 복장이다. 마주 한 사람은 70은 족히 넘어 보이는 노인. 하얀 도포에, 곤색 미트라를 착용하고 있었다. 주교나, 대 주교가 미사에 착용하는 복장이다.
쪼르륵. 노인이 차를 따랐다.
둘만이 자리한 공간이라, 그 소리조차 크게 들렸다. 세레인이 잔을 두 손으로 잡은 채, 살짝 고개를 숙였다. 노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잉그하트님. 저는 한가롭게 차나 마시러 온 게 아니에요.”
“후후. 성녀시여, 그리 마음이 다급해서야, 어찌 신의 은총을 널리 베풀 수 있겠습니까. 마음을 여유롭게 가지세요.”
잉그하트.
두 번째 대주교의 이름이다. 교황청 내부의 대소사를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대주교들 보다 권한이 높다고 인식되고 있다. 주름 진 얼굴에 온화한 미소. 웃는 천사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로 외부의 인지도 역시 상당하다.
“교황을 보지 못한 것이 벌써 1년이 넘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됩니다.”
“그분 옆에는 훌륭한 분들이 많이 있답니다. 성녀께서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얼굴조차 볼 수 없다니요.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니라면 왜 접견이 허락되지 않는 겁니까?”
“그분은 지금 중요한 일을 수행중이십니다. 다른 이의 방문으로 집중이 흐트러지면 그 여파는 성녀께서 책임지실 건가요?”
웃는 낯이나, 말은 날카롭다.
세레인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올 때마다 이런 반응이다.
“대체 그 중요한 일이 뭐죠? 제게도 말 하지 않는 일이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죄송하지만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교황께서는 성녀의 안전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여나 괜한 관심으로 다치는 게 아닐까 우려하는 거죠.”
“무슨 의미죠?”
“안다고 좋을 게 없다는 뜻입니다. 이제 겨우 성녀위에 자리 잡은 분에게 너무 많은 부담은 독이나 다름없죠. 부디 그 의미를 헤아려 주시기를.”
언중유골.
말 속에 뼈가 있는 것이다. 세레인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하지만 그대로 물러 날 만큼 대가 약하지도 않았다. 아니, 이제는 약하지 않았다. 믿을 만 한 사람이 뒤에 있으니 없던 용기도 올라왔다.
“그런 말로 물리려 하지 마세요. 저도 더 이상은 간과 할 수 없습니다. 만약 교황과의 만남을 주선하지 않는다면, 저 역시 안수기도를 그만 둘 수밖에 없습니다.”
“……성녀의 직분을 마다하겠다는 말입니까?”
“교황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 역시 직분 이상의 행위 아닙니까?”
“무모한 짓을 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이 잘못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세레인이 잉그하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심유하고, 무겁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등 뒤에 누가 있음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그녀가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좋습니다. 그리 원하시니 들어드리는 수밖에요.”
“아, 그럼……”
“단, 조건이 있습니다.”
잉그하트가 식어버린 차를 한 입 마셨다.
찻잔에 가려진 그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벽을 둘러보고 오세요.”
“통곡의 벽을 말하는 겁니까?”
“성녀가 되었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 중 하나입니다. 그 동안은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하지 못했을 뿐이죠. 직분을 충분히 수행했다 싶으면, 교황과의 만남을 주선하도록 하겠습니다.”
“약속하시는 거겠죠?”
잉그하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늘하던 눈은 다시 온화한 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반색하는 세레인을 묵묵히 응시했다. ‘돌아온다면……’ 낮게 중얼거리는 말.
그녀는 듣지 못했다.
- 작가의말
운페이 : 잠깐. 린이 주기로 한 보물은?
* 재밌게 보고 가세요. 선삭에 눈물이 찔끔 나기는 하지만, 지지 않습니다!
* 댓글 달아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역시, 하나하나가 힘이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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