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 오래 된 것. 오래 될 것.
놀람은 잠시.
상황이 어렵다는 것은 눈으로 봐도 충분하다. 운페이가 비올레의 어깨를 툭 치고는 앞으로 튀어나갔다. 화르륵. 등 뒤에서 붉은 화염이 타올랐다.
발끝에 나뭇가지가 닿는다.
끼리릭. 성난 용아병의 얼굴이 운페이의 시선에 잡혔다. 뼈로 만든 칼이 허공을 가르며 쾌속하게 튀어왔다. ‘뼈다귀 따위가.’ 가볍게 응대하며 손으로 후려쳤다. 와그작. 단단한 뼈가 그대로 분쇄되었다.
취리릭. 허리 양 쪽에서 쌍검이 튀어나왔다. 왼쪽에는 청아가 오른쪽에 백아가. 쌍아가 날카로움을 뽐내며 용아병의 전면을 가로질렀다. 반듯하게 잘린 뼈가 토막 나 흩날렸다.
“가루가 되어야 죽는다!”
펜이 다급하게 외쳤다.
“하! 복잡하기도 해라!”
휘리릭. 운페이가 몸을 돌렸다. 사상력이 뻗어나가 사방의 힘을 끌어왔다. 충돌하고, 충돌한다.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부딪친 힘들은 거대한 에너지를 만들었다. 산을 부수고 하늘을 쪼갤 수 있는 힘.
“부서져라.”
비틀린 검세가 와류를 낳고, 이것은 공간을 갈가리 찢어냈다. 토막 난 용아병은 이 힘을 견디지 못하고 잘게 부서지기 시작했다. 토막이 되고, 가루가 되고. 종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흥! 어느 세월에!?”
뒤에서 비올레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녀가 거대한 화염구를 만들어 머리위에 띄웠다. 이글이글. 페이의 안색이 까맣게 죽어갔다. 설마 숲을 다 태우려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이다.
“썩 꺼져라, 뼈다귀들아!!”
불꽃이 해일처럼 번져서 용아병들을 쓸어갔다.
얼추 봐도 수십 갈래의 불꽃. 사람들을 피해서 정확하게 용아병만을 타격했다. 엄청난 정교함. 사색을 띄던 페이의 얼굴이 감탄으로 바뀌었다.
키릭. 키릭.
그대, 저 멀리 후방에 있던 용아병이 시위를 놓았다.
운페이와 비올레. 우선순위를 뒤에 놓은 것이다. 허공을 가르며 하얀 화살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왔다.
텅. 하지만 그것은 그녀 앞쪽으로 드리워지는 하얀 벽에 막혀서 그대로 부서졌다. 두꺼운 성력. 한낱 화살로는 꿰뚫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 뜨거. 야! 끼어들지 말라고.”
“위험하잖아!”
“아니거든!?”
남쪽에서 세레인이 뛰어왔다.
위기를 감지한 운페이와 비올레가 먼저 뛰어 나가고 그녀는 세세이와 함께 조금 늦게 합류 한 것이다.
“뭐, 상관없어! 상대가 언데드라면 나도 도울 수 잇으니까.”
“자, 잠깐만요. 이들은 언데드가……”
“정화되어라!!”
세레인이 두 손을 위로 치켜 들었다.
그녀의 손을 타고 하얀 광망이 퍼져 올랐다. 세상을 비추는 거대한 기둥. 이는 큰 곡선을 그리며 하늘에 도착. 폭죽마냥 터졌다. 일대를 가득 메우고 있던 용아병들의 머리로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파삭. 파삭.
파사사사삭.
이 빛 덩어리에 닿은 용아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단 하나도 빼놓지 않았다. 저항? 그런 기미는 전혀 없었다. 조금 전까지 길길이 날뛰던 이 흉물스러운 마물은 세레인의 빛 하나에 무너져 내렸다.
“어, 어떻게?”
“후후. 언데드는 저도 상대 할 수 있거든요.”
“아니, 그러니까 저놈들은 언데드가 아닌데……아닌가? 내가 잘못 알았나?”
페이가 거대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알기로 용아병은 분명 하그네스의 힘을 받은 마물. 일반적인 성력으로는 격퇴되지 않는다.
“이거 참. 살풀이 좀 하나 했더니, 세레인이 모두 쓸어 버렸군.”
“나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아아. 잘했어. 덕분이 일찍 끝나고 좋았지 뭐.”
“쳇. 저, 계집 없어도 금방 끝나는 건데.”
툴툴 거리기는 하지만 일단 상황은 끝났다.
뒤로 물러났던 생츄어리 사람들이 일행을 중심에 두고 몰려들었다. 특히 세레인을 보는 시선이 굉장히 뜨거웠다. 성국에 있는 빛의 신을 그들이 신봉하는 것은 아니나, 이 정도 이적이면 반할 만 하다.
“페이.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해 주겠어요?”
“아아. 그렇지. 모두 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이야기가 꽤 길 것 같습니다.”
쿠르릉. 페이가 떠 오른 뿌리를 다시 수습해 나갔다.
힘을 너무 거하게 써서 한 동안은 싸우지 못할 듯싶었지만, 괜찮다. 위기를 타파 해 줄 용사들이 나타났으니까.
***
“싫다.”
“에, 엑! 어째서 말입니까?”
거처로 들어온 일행은 페이에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들었다.
주민들의 실종과 성국을 향한 공격 태세. 그리고 알아낸 용아병. 마룡 하그네스의 부활 소식까지.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는 모든 내용을 털어 놓았다.
말미에 페이가 도움을 요청 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우리도 바빠. 남 일에 끼어 들 틈이 없다고.”
“하, 하지만 우리끼리는 상대 할 수가 없습니다. 마왕께서 힘을 쓰시면 상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뭐, 내가 나서면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이미 얘기했지만, 우리 사정도 바빠. 남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고.”
“도와드릴게요.”
“응? 너, 뭐야 계집?”
“우리는 이들에게 신세 진 일이 있잖아요. 코론 등을 지금까지 보호 해 준 것도 그렇고. 그냥 넘어 갈 수는 없어요.”
세레인이 정면에서 반박했다.
비올레이 경우도 마찬가지. 혼종에 대한 단서를 얻고 여정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결과적으로 보면 생츄어리 사람들 덕분이다. 은혜를 받고 그냥 지나친다는 것은 그녀의 상식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너! 지금 우리는 바쁘다고!”
“내가 없으면 어차피 안 되는 일이잖아요. 그럼 비올레 혼자 가 보시던지요.”
“힘으로 끌고 가지 못할 거 같아?”
“해 볼래요? 내가 비올레를 이기지는 못해도, 지지는 않을 걸요?”
우웅. 세레인의 몸 주변으로 성력이 아로 맺혔다.
그녀 말 대로 모든 힘을 보호에만 쓴다면 마왕인 비올레 조차 그녀를 강제하지는 못한다.
“너, 감히……!”
“아아. 그만 해.”
운페이가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이대로 나두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수준에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화가 난 비올레를 껴안아 토닥이고, 세레인에게는 눈빛으로 자중을 부탁했다.
“남편! 지금 저년이 말 하는 거 들었잖아!”
“알아, 알아. 조금 진정 해. 급한 건 알지만, 여기서는 조금 생각을 달리 할 필요가 있어.”
“……응? 무슨 소리야?”
“우리가 붉은 숲으로 돌아온 시점에 갑자기 드래곤이 깨어났어. 이게 우연이라고 봐?”
“아, 응. 조금 특이하기는 하지만……”
한 두 해 자고 일어나는 거라면 몰라도, 셀 수도 없는 세월을 격하여 일어난 일이다. 우연? 절대로 그럴 리 없다. 운페이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알다시피 사도는 우리를 저지하려 하고 있어. 세레인을 빼앗아 가려는 거지. 나는 이 드래곤 역시 그 수단 중 하나라고 봐.”
“드래곤이? 하지만 굳이 왜 이곳에서……”
“일단은 길목. 두 번째는 힘의 회복. 세 번째는 세레인의 성격. 가는 길을 붙잡고, 반드시 싸울 수 있게 만들려는 거지.”
“음.”
비올레가 금세 넘어갔다.
입을 비죽거리기는 했으나, 그냥 가자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세레인을 한 번 째려보고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휴……’ 운페이가 낮게 한숨을 내쉬고 옆에 앉았다.
“페이. 그 드래곤은 저희가 상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그래 주시는 겁니까?”
“네. 다만, 지금에서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상대를 해야 하는지도 막막합니다. 혹시 그에 대한 정보가 있다면 알고 싶군요.”
“아, 그렇군요. 정보라. 어쩌면 가능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페이가 큰 머리를 끄덕였다.
드래곤과 싸운 존재의 이야기라면 도움이 될 것이다. 한 바탕 몸을 움직여 뻐근하지만, 도움이 되려면 어쩔 수 없겠지.
그가 큰 줄기를 흔들며, 일행에게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생츄어리의 심처. 더 깊은 곳으로 이동 할 예정이었다.
***
생츄어리의 건립 당시 아무 곳이나 선정 한 다음에 이곳에서 자리피자! 라며 소리 친 것은 아니다. 생츄어리의 심처는 드래곤과 상대하였던 붉은 숲의 마수의 근원지. 즉, 뿌리에 해당하는 지점이다. 페이가 마수와 같은 에이션트 트리였기 때문에 몸의 일부를 양도받아서 거처를 꾸리게 된 것이다.
“하. 붉은 숲의 마수라니.”
“운페이. 알고 있어?”
“알다마다. 내가 북쪽으로 쫓겨나게 된 실질적인 계기가 마수 때문인데. 당시에는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고.”
운페이가 치를 떨었다.
붉은 숲의 마수는 무섭도록 강했었다. 당시 익혔던 어떤 방법으로도 상처 입힐 수 없었고, 어디를 도망가도 그의 줄기를 떨쳐 버릴 수 없었으니까. 운 좋게 웅크라들이 만들어 둔 전송장치를 발견하여 북쪽으로 이동하였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싸웠으면 백이면 백 죽었을 것이다.
“마수. 아니, 이제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좋겠군요. 페이수. 그것이 그 분의 이름입니다.”
“페이수. 이름이 존재했던 겁니까?”
“그렇죠. 그 역시 에이션트 트리 일족. 가족이 존재했었죠.”
“그럼 어째서 마수 같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건가요?”
트라가 쓰게 웃었다.
이것은 일족에 얽힌 비화. 붉은 숲이, 왜 붉은 숲이라 불리는 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냥 슬픈 사연일 뿐입니다. 페이수는 본디 에이션트 트리의 수장. 대륙 대 이동 당시에 무리를 이끌던 대장이었습니다. 우리 에이션트 트리는 천년을 살고 천년을 이동하는 게 습관. 이를 이끌어 줄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죠. 힘이 좋고, 영특한 페이수가 우리를 이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대륙에 산재하는 숲의 대부분은 에이션트 트리가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들이 뿌리 내린 곳은 금세 숲이 되고, 생명이 움터온다. 해서, 오래 된 부족에서는 이들을 신이라 추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운이 안 좋았을까, 아니면 운명이 그리 된 것일까. 페이수는 무리를 잘못 인도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거닐은 곳에는 비가 오지 않았고, 토양에는 수분이 부족했죠. 무리는 하나 둘 씩 말라서 죽어갔습니다. 그 많던 무리의 숫자는 금세 줄어갔고……마지막 순간에는 그만이 남았죠.”
“어떻게 그런……”
“더 슬픈 것은 그가 모든 부족을 잃고 슬퍼하는 기점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이미 다 죽어간 마당에. 그는 그 자리에 서서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제가 읽기로는 칠주야. 대지가 전부 붉게 물들 때 까지 울었다고 합니다.”
붉은 숲.
이 독특한 모습의 숲이 만들어진 이유가 페이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모든 가족을 잃고, 슬픔에 겨워 피눈물을 흘렸다는 에이션트 트리. 너무나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흑……”
“세세이.”
세세이가 그만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 역시 같은 부족을 모두 잃은 입장. 페이수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되었다. 붉은 토양과 붉은 잎이 그의 피눈물이었다 하니, 가슴 한 쪽이 저미도록 아려왔다.
“휴. 하여튼 그 이후로 페이수는 반쯤 미치게 됐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공격하게 된 것이죠. 붉은 숲의 마수. 사냥꾼들이 붙인 이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겁니다.”
“그런 페이수지만 당신에게 만큼은 영역을 내 주었군요.”
“같은 부족은 아니지만 동포였으니까요. 어쩌면 지키지 못한 부족에 대한 마음을 저에게 투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쓰린 페이의 말이 나직이 흘렀다.
드센 비올레 조차 이 상황에서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페이수가 지금 죽었다는 말인가요?”
그때. 눈물을 훔치며 세세이가 물었다.
페이의 설명에 의하면 그렇다. 용아병이 활개치고, 하그네스가 부활하는 것은 페이수의 죽음. 그것이 뒷받침이 되면 안 된다고.
“느낌에 의하면. 하지만 이곳에서 읽어내면 보다 정확한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부탁할게요. 봐 주세요.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겠습니다.”
세세이의 간청에 페이가 몸을 움직였다.
바닥에 뿌리가 쑥 박혀서는 한 곳으로 꿈틀꿈틀 이동했다. 이곳은 페이수의 뿌리. 에이션트 트리의 생명은 뿌리에서 나오는 것. 그를 읽어 내려 함이다.
툭. 두 에이션트 트리의 뿌리가 한 곳에서 닿았다.
- 작가의말
용아병 : 와, 님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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