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 부서지는 흐름
“타이렌.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아는가?”
“아르미아의 기척이 없다. 교황청에서 빛기둥이 솟아올랐으니 아마도……”
“봉인이 풀리고 있는 것이다.”
타이렌의 말을 람이 마무리 했다.
운페이와 대치하고 있던 세레인은 갑작스러운 비명과 함께 빛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직후 교황청 가운데서 거대한 빛기둥이 솟아올랐다.
사도들만이 덩그러니 남게 된 것이다.
“봉인이 풀린다면 우리에게 좋은 것이 아닌가?”
“아니. 그렇지 않아. 아르미아가 일에 개입했을 때부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혼돈의 봉인에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어. 지금 봉인을 푸는 것 역시 우리가 바라는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겠지.”
“허면 어찌 할 생각인가? 이대로 봉인이 풀리는 것을 막아야 하나?”
타이렌이 빛기둥과 세레인 등을 감싸고 있는 빛 덩어리를 살폈다.
어찌 할 만 한 수준의 힘이 아니다. 그냥 건드려 봤자, 반발력으로 자신들만 당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겠지. 지금까지 판을 만들어 둔 것이 누구인데, 이제와서 곁다리로 전락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방법은?”
“혼돈으로 간다. 무슨 꿍꿍이가 있든지, 신들이 원하는 것은 본래의 혼돈이 부활하는 것은 아닐 터. 우리는 그렇다면 가장 옛 형태와 맞는 것으로 상황을 돌린다.”
“어떻게 말인가?”
타이렌이 입고 있던 신관복을 벗어 던졌다.
몸이 새카만 각질로 덮여 있었다.
“장벽 이북의 마왕을 소환하며, 동시에 품은 혼돈의 힘을 폭주시킨다. 봉인 자체를 우리의 힘으로 어찌 할 수는 없겠지만, 상황을 어지럽히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 그리고 그것이 상황의 균형을 깬다면, 우리에게 흐름은 이어진다.”
“힘을 폭주 시키고 난다면 우리의 목숨도 장담 할 수 없다.”
“흐흐흐. 움트라. 이제 와서 두려운 건가?”
서늘한 타이렌의 목소리에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젠킨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움트라. 그 이름은 제 3성기사단 단장의 이름이며, 젠킨을 가르쳤던 이름이기도 하다. 젠킨이 서문으로 가기 전, 부단장으로 있던 곳이 제 3 성기사단 와일드였다.
“흥-! 유치한 도발이다, 타이렌. 어차피 나는 돌아 갈 곳도 없다.”
움트라가 로브를 벗어 던졌다.
얼굴 반쪽이 각질로 덮인 그의 모습이 밖으로 드러났다. 젠킨이 숨을 삼켰다. 사도라니. 보이지 않는 모습에 림의 일각이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사도라고는 감히 추측 한 적이 없었다.
그의 기억에서 움트라는 강건하고 충직한 기사였으니까.
“큭큭. 그래. 그런 거지. 적어도 여기 있는 사도 중에 돌아갈 길이 있는 존재는 없다.”
“비극의 주인공처럼 말 하지 마라. 우리는 선택을 했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면 그뿐.”
남은 한 명. 람도 로브를 벗었다.
그는 12번째 성기사단의 단장이며, 일전에 통곡의 벽에서 운페이와 한 차례 맞붙은 적이 있는 인물이다.
“큭큭. 맞는 말이다. 다만, 그 결과는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해. 세상은 혼돈에 놓이고, 경직된 질서는 무너진다. 반드시.”
“어찌되든 좋다. 나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고 싶을 뿐.”
“별 달리 이유 따위는……”
타이렌, 람, 움트라의 몸에서 회색빛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공허로 품어 둔 혼돈의 파편이 거칠게 방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봉인 된 것과 비교하면 티끌만도 안 되는 양이지만, 그들의 생각대로 현상을 흔들기에는 충분했다.
다만, 그들도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 하나 있었다.
봉인 속 상황이 신들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점.
회색빛이 폭발하여 종탑을 뒤덮었다.
***
“하나는 혼돈을 부활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죽는 거야.”
“뭐……?”
한참을 뜸 들여 나온 대답에 운페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방법이 유일해. 봉인을 풀거나, 열쇠를 다음 세대로 넘기거나. 중간은 존재 할 수가 없어.”
“다른 세계로 들어 온 거라면 문 닫고 나가면 되는 일이잖아.”
“그게 아니란 건 운페이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잖아. 열쇠의 기동은 한 방향 통로를 여는 것과 같아. 일을 끝마쳐 혼돈이 돌아가는 길에 편승하거나, 통로를 부숴서 돌아가는 것 뿐.”
세레인이 담담하게 말 했다.
열쇠의 파괴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죽음으로 귀결됨에도.
“멍청한 계집애는 그냥 두고 열쇠만 없애는 방법은 없나?”
“애초부터 그렇게 설계 된 물건이 아니야. 봉인을 풀거나, 품은 존재가 죽어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거나.”
“그 빌어먹을 신들의 짓이라 이건가?”
“응. 이런 상황까지 생각하고 만든건지는 잘 모르겠지만……꽤 고약하네.”
운페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봉인을 풀 수도, 열쇠를 부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세레인의 말에 따르면 봉인이 풀리는 것은 신에게 혼돈의 제어권을 넘기는 일. 과거, 인간의 힘이 두려워 북쪽으로 밀어버린 것이 신들이다. 하나 있던 제약마저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눈에 훤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열쇠를 부술 수도 없다.
그것은 세레인의 목숨이다. 어던 선택지에도 그것은 들어있지 않았다.
“운페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선택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잖아.”
“말 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여기까지 무슨 생각으로 왔는데, 이제 와서 포기한다고? 나한테 그런 선택은 없어.”
“그래, 멍청한 계집애야. 네 꼴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딴 소리는 하지 마. 남편이 그런 걸 선택 할 리가 없잖아.”
눅눅한 세레인의 말에 두 사람이 거의 반사적으로 답을 했다.
세레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워 하다가, 가볍게 웃었다. 마음 한 가득 우울함이 가득 차 있었는데, 저 말이라도 들으니 한 결 기분이 나아졌다.
시원하게 찼지만 나를 아껴주고는 있구나.
얻지 못한 사랑에 금이 간 마음이지만, 그나마 조각나지 않게 풀이나마 발라주고 있다. 동정에 더 금이 갈 법도 하지만 왠지 그렇지는 않았다. 어쩌면 운페이의 거절 자체를 이미 예상하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너무 잘 어울리니까.’
여행 내내 두 사람의 모습을 봐 왔다.
세상 천지에 이렇게 어울리는 한 쌍도 없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틈이 난다면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보겠는데, 도통 그런 것이 없다. 종족이 다름에도 신경 쓰지 않고, 거친 말과 행동에도 사랑으로 받아 들인다.
누오도 제 짝이 있다 하는데, 이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맺어진 한 쌍 같았다.
‘그러니까……’
그녀가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운페이와 비올레를 머리를 맞대고 지금 이 상황을 어찌 타개할지 고민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조차 보기 좋아, 괜히 가슴이 시렸다. 둥글게 맺히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 내고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어차피 방법은 없다.
혼돈의 봉인을 풀거나 자신이 죽어서 통로를 해방하는 것밖에. 이미 혼돈의 힘 자체에 먹혀서 그 어떤 능력도 구사 할 수 없다.
셋 중 둘이 살아야 한다면, 자신이 빠지는 게 답이다.
‘죽고 나면 기억해 줄까?’
이기적인 생각이란 건 안다.
하지만 그런 바람이 들기도 한다. 살아 있다면 비올레보다 못한 기억이겠지만, 죽고 난다면 조금은 더 깊게 생각하지 않을까. 비웃음 날 정도로 어리석은 마음이지만,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어릴 적에는 왕자님이 와서 평생동안 행복하게 살 줄 알았는데.’
생각하니까 또 마음이 울적해진다.
방법 강구에 열중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열쇠는 그녀와 연결되어 있다. 활성화된 이상 그것을 스스로 꺾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두 사람, 행복해야 해.”
“……세레인?”
“멍청한 계집! 무슨 짓이야!?”
그녀 앞으로 하얀 빛무리가 뭉치기 시작했다.
그것이 열쇠임은 멍청이라도 알 수 있다. 운페이가 손을 뻗고, 비올레가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밖의 공간과는 달리 두 사람 다 특출난 힘이 없었다. 백열하는 열쇠를 눈으로 보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콰콰콰쾅-!!!
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거대한 폭음과 함께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운페이와 비올레. 비장하게 열쇠를 꺼내 든 세레인까지 균형을 잃은 채 구석으로 쓸려갔다.
쩌억. 한쪽 공간에 커다란 균열이 생겨났다.
동시에 색으로 표현하기 힘든 무언가가 그 사이로 흘러나왔다. 운페이가 황급히 비올레와 세레인을 부축하여 일어났다.
바닥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세레인! 당장 열쇠를 집어넣어!”
“아, 아냐!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뭐야! 멍청한 계집아! 그럼 이건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세레인도 알고 싶다.
목숨 버릴 각오까지 하면서 열쇠를 꺼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운페이의 팔을 부여잡고 있는 지금 모습 자체가 왠지 창피하다.
“이건……”
“남편, 뭐야? 뭔지 알겠어?”
운페이가 가슴을 부여잡은 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균열에서 나오는 희미한 기운은 점차 그 세를 불려가고 있었다.
익숙하다.
아니, 모를 리 없는 기운이다. 이미 씨앗으로 잉태하여 몸속에 품고 있으니까. 지금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은 바로 혼돈의 기운이었다. 그것도 사도 등이 가지고 있는 어설픈 흔적이 아닌 진짜.
“봉인이 깨어지고 있어.”
“어째서? 우리는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밖.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그게 가능 한 건가? 봉인은 열쇠로만 풀 수 있는 거잖아?”
“이미 열쇠는 사용 중이었으니까. 절반은 풀렸다고 봐야지.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간섭을 하려면 그냥 힘으로는 불가능해. 가능하다면……”
“사도-!”
운페이와 비올레가 동시에 답을 했다.
콰콰쾅-!
그 사이 또 한 차례 공간이 뒤틀렸다.
새어나오는 기운은 이제 일행이 서 있는 곳까지 도달해서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열쇠 때문인지 더 이상의 접근은 하지 않았지만, 풍기는 기운 만으로 세 사람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남편, 저기!”
그때, 비올레의 눈에 커다란 균열이 들어왔다.
처음 금이 간 지역인데, 사이가 벌어져서 사람 하나가 들어 갈 만 한 크기로 성장해 있었다.
“저기로 나가면 되는 거 아냐!?”
“잠깐만! 열쇠로 만들어진 통로를 깨고 들어오는 거라면 혼돈이 있는 타 차원의 영역이야. 그냥 나간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운페이가 균형을 잡으며 생각했다.
일단은 세레인의 말이 맞다. 혼돈을 통째로 타 차원에 넘긴 뒤 그 입구를 닫은 것이 봉인. 현재 있는 곳은 그 차원으로 연결한 임시 통로. 벽이 깨어진다는 것은 타 차원의 영역으로 일행이 넘어 간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애초에 혼돈은 완전히 내쫒을 수 없는 존재였어.’
완전히 단절하여 봉인하였다면 쓸데없이 교황청 등을 세울 필요도 없었다. 끊어지지 않은 채 영향력을 계속 미치고 있었기에 지금과 같은 복잡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세레인이 죽어서 통로가 붕괴되나, 지금처럼 힘으로 쪼개지나 그게 그거. 포인트는 본래의 차원으로 회귀.’
운페이가 입술을 콱 깨문 뒤 비올레와 세레인을 나란히 잡았다.
두 사람이 먼저랄 것도 없이 그의 얼굴을 돌아봤다.
“여기서 나간다.”
어떻게? 라는 물음은 던질 틈도 없었다.
이미 운페이는 앞으로 달리고 있었다.
- 작가의말
세레인 : 뻘쭘 ;;;;;;;;
* Great Father 연재중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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